일부 성서 학자들은 다니엘 8장의 작은 뿔을 셀류쿠스 왕가의 한 왕인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IV)로 잘못 생각해 왔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로 더 많이 알려진 안티오쿠스 4세는 보수적인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기원전 168년에서 165년까지 성전 봉사를 중지시켰다. 경외서(經外書)에 포함되어 있는 마카비전서와 후서는 안티 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활동을 언급하면서 다니엘 8장9장에 나오는 구절들을 인용하였다. (156.1)
 그러나, 성경은 다니엘 8장의 작은 뿔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고 기술하고 있지는 않으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다니엘 8장의 예언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뿔은 왕국을 나타내는 데 반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한 왕에 불과하다. 즉, 그는 네 뿔 중 하나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셀류키아 왕조의 하대에 속하는 국왕이 아니라 중대에 속하는 국왕이다(셀류키아 왕조의 기간은 B.C. 312 / 311 년 ~ 65 B.C.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재위 기간은 175~164 B.C.이다). (156.2)
 그리고,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크게 “형통”하지도 못했고(12절) “심히 크게” 되지도 못했다(9절), 그의 부왕(父王) 안티오쿠스 3세는 대왕이란 호칭을 받았고 또 그렇게 불릴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셀류키아 왕국의 옛 주권을 회복시킨 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당대의 일부 비판자들로부터 “에피마네스”(Epimanes) 즉 미친 사람으로 풍자되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남쪽에서 즉 이집트와의 전쟁에 승리를 했지만 로마의 사신 포필리우스 라이나스(C. Popilius Laenas)로부터 그의 철군을 희망한다는 로마 원로원의 뜻을 전달받고는 허겁지겁 철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냉혹한 표정의 로마 사신은 들고 있던 지팡이 끝으로 안티오쿠스의 둘레에 원을 긋고는 안티오쿠스에게 그 원 밖으로 발을 내딛기 전에 원로원의 통고에 대한 대답을 하라고 요구하였다.6 (156.3)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동쪽 즉 메소포타미 땅에서 불투명하고 유감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사망하였다. 처음에는 꽤 성공적으로 보였던 “영화로운 땅” 즉 팔레스타인 지역의 경영도 결과가 좋지 못했다. 그 곳에 그가 쌓은 모든 노력은 그가 사망하기 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56.4)
 더구나, 그가 유대 성전을 더럽힌 사실을 “2,300주야”의 예언에 맞추려는 모든 시도들이 하나같이 실패하였다. 마카비전서 1장 54~59절, 4장 52~54절에 대한 최근의 주석서에서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하여 성전 봉사가 중단된 기간을 3년 10일로 기술하고 있다(168년 Chisley 15에서 165년 Chisley까지). (156.5)
  (156.6)
 이제 마카비전서 1장 54절을 보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대 성전의 제단에 멸망의 가증한 행위(브텔루그마 에레모세오스, 단 9:27, 희랍어)를 하였다고 되어 있다(그는 분명히 성전 제단 위에 우상을 세우고 돼지의 희생을 바쳤다. 이로써, 돼지를 만지는 것도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을 경악케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주신 말씀에서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을 그의 날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사건으로 말씀하셨다(마 24:15). 예수님은 추가하여 말씀하시기를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정말 다니엘 8장의 작은 뿔의 의미를 깨닫고자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과 우리의 결론이 달라서는 안 된다. 기원전 164년에 사망한, 즉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말씀하시기 200여 년 전에 살았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멸망의 가증한 물건을 세우는 작은 뿔일 수는 없는 것이다(p. 186~188에 있는 관련 문제와 해답을 하라) (157.1)
 다니엘 8장의 작은 뿔은 로마이다.
 다니엘 8장의 작은 뿔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대상은 로마 제국과 또 이 제국을 계승한 로마 가톨릭이다(물론 이 두 기구의 어두운 면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지만). 다음은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이다. (157.2)
 1. 다니엘에 잇따라 나타나고 있는 이상들은 앞서 지나간 이상을 부연하고 또 대비한다는 원칙에 따라, 우리는 다니엘 8장의 작은 뿔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니엘 7장의 작은 뿔과 이 뿔의 기초가 되고 있는 짐승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키고 대비시키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다니엘 2장7장에서, 로마는 희랍에 뒤이어 나왔다. 다니엘 8장에서도 로마가 희랍에 뒤이어 나타나고 있다. (157.3)
 2. 로마는 하늘 네 바람의 하나인 서방에서 일어났다(p. 155를 보라). (157.4)
 3.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이교 로마와 기독교 로마는 짐승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점에서 동질 관계를 구성하고 있다. 로마의 감독은 로마 황제의 후계자였다. 최근에 출판된 한 대학 교재에서 이 점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57.5)
서방(西方)에서는 교회가 로마 문명의 수호자로 나타났다. 로마 황제들은 이교의 대제사장의 직함 즉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의 직함을 포기했다. 로마의 신(神)들이 더 이상 숭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의 감독이 이 같은 사제(司祭) 기능을 떠맡게 되었다. 오늘날도 가끔씩 로마 교황을 폰티프(Pontiff)로 호칭하는 까닭이 이와 같다. 아틸라(Attila) 휘하의 훈(Huns) 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휩쓸고 로마 성 밖에 이르러 로마를 약탈하려고 할 때, 이들과 만나 담판한 사람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인 레오 1세 교황이었다. 아틸라는 레오 1세의 영적인 힘에 압도되어 로마 약탈의 계획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레오가 아틸라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로마의 성문에 나가 로마를 수호한 사람이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교황이었다는 사실이다.7
(157.6)
 로마 교회가 이교 로마 제국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현저하게 솟아난 이 작은 뿔은 로마 제국과 로마 교회를 함께 대표한다. (157.7)
 4. 로마 제국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는 달리 헬레니즘 시대의 “마지막 때에”(8:23) 성공적으로 중동 지역을 지배하였다. (157.8)
 5. 로마 제국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는 달리 중동 지역을 접수할 때 글자 그대로 “남편과 동편과 또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심히 강대해졌다”(9절). 처음에 서쪽에서 일어날 당시에는 “작은 뿔”과 같던 로마가 기원전 168년에 마케도니아를 정복하고 기원전 65년에는 시리아를, 그리고 기원전 63년에는 팔레스타인을, 또 기원전 30년에는 드디어 오랫 동안 보호국으로 간섭해 오던 이집트까지 장악하여, 이들을 모두 로마 제국의 지역으로 편입시키면서 크게 강대해졌다. (157.9)
 이전에 셀류키아 왕국의 수도였던 시리아의 안디옥은 로마와 콘스탄티 노풀에 버금가는 도시가 되었으며, 프톨레미 왕조하에서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제국의 풍요한 일개 도시가 되었다. (158.1)
 6. 이교 로마는 단호하고도 비극적으로 “스스로를 높여” “만군의 주재”를 대적하였다(11절). 예수 그리스도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십자가에 매단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와 군인들은 모두 로마 인들이었다. (158.2)
 7. 이교 로마와 기독교 로마는 모두 “강한 자들과 거룩한 백성”을 멸망시켰다. 즉 두 세력이 모두 수많은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고문하였다. (158.3)
 8. 이교 로마와 기독교 로마가 모두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여 버렸고”“그의 성소를 헐었다”(11절). 이교 로마는 문자 그대로 그렇게 하였다. 기원후 70년, 나중에 황제까지 역임하게 되는 로마의 장군 티투스(Titus) 휘하의 군인들이 예루살렘 성소를 불태워 초토화함으로써 성전 봉사가 영원히 끝나 버렸다. 기원후 130년 대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예루살렘에 이교 사원을 건립하고, 예루살렘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개명하고 유대인들에게는 이 도시의 출입과 거주를 금하였다. 이 금법은 수세기에 걸쳐 강요되었다. (15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