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네째 짐승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었는가?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그들의 일부는 그러했다. 기원후 170년부터 236년까지 로마 시내 혹은 그 근교에 거주했던 히폴리투스(Hippolytus)는 「옥스포드 기독교 사전」에 “3세기의 가장 중요 한 신학자”로 기술된 사람이다. 그가 다니엘 주석에서 가르친 내용은 앞에서 우리가 다니엘 7장을 분석한 내용과 흡사하다. 다음에 소개하는 히폴리투스의 주석은 「니케아 공회의 이전 교부들」(The Ante-Nicene Fathers) 제 5권 178, 179페이지의 인용이다. (141.1)
“우상의 금머리”는 바벨론으로 대표된 “암사자”와 동일하다. “은으로 된 가슴과 팔”은 메대—페르시아를 대표한 “곰”과 동일하다. “놋으로 된 가슴과 팔”은 알렉산더 이후로 지배권을 누린 헬라(그리스)를 표상한 “표범”과 동일하다. “철다리”는 현재 제국을 장악하고 있는 로마인들을 뜻하는 “두렵고 무서운 짐승”이다.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 것은 앞으로 존재하게 될 “열 뿔”을 의미한다. “그들 중에서 자라나는 다른 하나의 작은 뿔”“적그리스도”이다. 그 우상을 강타하여 그것을 부수어 버리고 대신하여 온 천지를 채울 “돌”은 하늘에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그리스도이시다.
(141.2)
 2. 루터는 십계명에 관해 어떻게 가르쳤는가?
 마르틴 루터는 위대한 인물이요. 위대한 기독교인이요. 감동적인 저술가이며 영민한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정력적인 개혁자였던 만큼 때때로 시종 일관한 신학자가 되기 어려웠던 것 같이 보인다. 예컨대, 십계명과 안식일 문제에 있어서 그는 때에 따라 다른 주장들을 하였다. (141.3)
 광신자들에 대항하여 쓴 「하늘의 선지자들에 대항하여」라는 글에서는 안식일을 “모세가 유대인들에게만 준 것으로서 이방인이요.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상관이 없고∙∙∙ 바울은 안식일이란 이름까지 철폐하여 그것을 과거의 그림자처럼 불렀다”고 하였다.56 (141.4)
 그러나, 오스왈드 글라이트와 안드레아스 피셔와 같은 안식일 준수자들을 반대하여 쓴 「안식일주의 자들에 대항하여」라는 글에서는 전혀 다르게 주장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마지막으로 십계명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십계명은 시내 산에서 유대인들 또는 아브라함의 자손들만 모여 있는 가운데 수여 된 것이므로 유대인들로서는 모세의 율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 대하여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십계명을 모세의 율법이라고 부르기에는 모세가 너무나 세상에 늦게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십계명을 읽을 때) 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몇몇에 불과했다. 심계명은 모세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 밖의 모든 족장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있었으며 세상 전체에 미치고 있었다. 모세가 오지 않고 아브라함이 태어나지 않았다 해도 십계명은 아직까지 그러했듯이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듯이 태초부터 계속 인류를 다스려 온 것이다.”57 (141.5)
 그런데, 십계명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여 쓴 「도덕률 폐기론자들에 대향하여」라는 글에서는 “나는 내가 어떻게 하여 율법 또는 십계명을 배척하는 사람으로 평판나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 도대체 율법이 없는 곳에 죄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그 누가 할 수 있는가? 율법을 폐지하는 자는 틀림없이 죄까지 철폐 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58 라고 하였다. (141.6)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계명을 남겨 두어 실시하게 하셨다.”
(142.1)
 그리고, 창세기 주석에서는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위해 제칠일을 거룩하게 하셨다. 제 칠일은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목적이 이 속에 담겨 있었다. ∙∙∙ 비록 인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상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계명을 남겨 두어 실시하게 하셨다”59 라고 주장했다. (142.2)
 3. 세 뿔(부족)이 뿌리채 뽑힌 내력을 더 상세히 들려줄 수 없는가?
 “작은 뿔” 때문에 세 뿔이 뽑힌 내력은 백과전서나 그 밖의 서양 중세사(中世史) 책들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142.3)
 동로마 황제 제노(Zeno. 474~491)는 콘스탄티노풀에서 멀지 않은 한 특별 보류지에 진치고 있던 아리우스 파 신앙의 동고트 족(族) 때문에 날이 갈수록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이 때, 제노는 이탈리아 반도에 웅거하고 있던 아리우스 파 신앙의 헤룰 족(族)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헤룰 족의 우두머리 오도와카르(Odovacar)는 기원후 476년에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내몰고 왕을 참칭하고 있었다(오도와카르의 찬탈 행위를 역사가들은 서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간주한다). (142.4)
 487년에, 동로마 황제 제노는 동고트 족의 우두머리인 테오도릭(Theodoric)에게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헤룰 족을 쫓아내 줄 것을 공식적으로 위촉하였다. 제노는 성가신 동고트 족을 이탈리아 쪽으로 보냄으로써 콘스탄티노풀을 불안에서 놓여 나게 할 의도였다. 뿐만 아니라, 동고트 족과 헤룰 족이 싸워 어느 한 쪽이 이기고 진다 해도 동로마 제국으로서는 손해볼 것이 없었다. 5년 여의 전쟁 끝에, 동고트는 제노로부터 받은 임무를 완성하여 헤룰 족을 멸망시켰다. 이로써, 헤를 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아리우스주의의 세 뿔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142.5)
 테오도릭은 526년에 사망하였다. 그 다음 해에 유스티니아누스가 동로마의 황제에 즉위 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종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백성들은 종교적으로 황제와 일치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상,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세 개의 각기 다른 그리스도인 집단을 다스리고 있던 셈이었다. 하나는 아리우스 파 신도들로서 주로 서 방에서 우세하였는데,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무리들이었다. 둘째는 단성론자(單性論者. Monophysites)들로서 주로 동방에서 우세하였는데 예수님의 본성을 신성 하나만으로만 믿는 자들이었다. 세째는 가톨릭으로서 예수님의 본성을 완전한 인성이며 또 완전한 신성으로 믿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자신은 가톨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고, 533년에는 로마의 교황을 “모든 거룩한 교회들의 머리”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는 이러한 선언에 걸맞게 행동하였다. 그는 제위에 있는 동안 내내 교황을 교회의 머리로 선전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143.1)
 530년 대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아리우스 파의 반달 족과 동고트 족을 박멸키 위한 성전(聖戰)을 개시하였다. 물론, 이 원정에는 그 나름의 법률적 핑계가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이 싸움에 종군했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Procopius)는 그가 남긴 「전쟁들의 역사」(History of Wars)60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진정한 원정 동기는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는 것” 즉 아리우스 파로부터 가톨릭을 보호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143.2)
 유스티니아누스는 뛰어난 장군인 벨리사리우스(Belisarius)로 하여금 해로를 이용하여 군대를 콘스탄티노풀로부터 북아프리카로 이동시킨 다음 반달 족을 쳐부수게 하였다. 반달 족은 534년에 트리 카마룸(Tricamarum)의 전투를 끝으로 역사에서 “안개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61 (143.3)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의 지시에 따라 군대의 작전 행로를 이탈리아의 동고트 족에게로 돌렸다. 그는 배의 돛대들을 성벽에 걸어 군사들을 올라가게 하는 작전을 이용하여 시칠리 해안의 팔레르모(Palermo)성을 점령하였다. 536년 겨울에, 그는 단 5,000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저항 없이 로마에 입성하였다. 동고트 족은 15만 명의 병정으로 로마 시를 에워싸고 반격해 왔다. (143.4)
 고트 족은 당시 어리석게도 벨리사리우스로 하여금 식수가 끊겨 항복케 할 요량으로 로마로 들어가는 14 개의 도수관(導水管)을 끊었다. 그러나, 끊긴 도수관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은 성 밖 일대를 진구렁으로 만들어 말라리아 모기떼를 서식하게 하고, 결국은 말라리아 전염병이 창궐케 되었다. 거대하던 고트 족의 군대는 전염병으로 거의 쓰러졌고, 드디어 538년, 벨리사리우스는 적은 병력을 가지고도 동고트 군대를 손쉽게 물리칠 수가 있었다. (143.5)
 이후에도 여러 해에 걸쳐, 이탈리아에서는 소소한 전투가 이곳 저곳에서 계속되었으나, 결국 가톨릭의 장군 나르세스(Narses)에 의해 동고트 족은 말살되었다. 앞서의 헤룰 족과 반달 족처럼 동고트 족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그 당시는 참혹한 흉년과 열병이 겹쳐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만행이 도처에 발생하였는데, 두 여인이 남자 17 명을 잡아먹는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63 (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