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날. 하나님이 “너 있으라,” “너 살라” 하시는 날
 안식일은 우리가 태초로 돌아가는 날이다. 태초의 창조와 재창조로 우리가 돌아가는 날이다. 창조와 재창조의 삶이 우리에게 재연되고 재현되는 날이다. 우리의 태초는 하나님이 “너 없으라,” “너 없이 되라” 하는 날이 아니다. 만물이 만물에게 적이 되어 하나님께 “저를 없이 하소서”(요 19:15)하고 부르짖는 날이 아니다. 사람과 만물이 “너 없이 하라,” “너 죽으라”고 팔을 휘젓고 주먹질하는 날이 아니다. 우리의 태초는 하나님이 “너 있으라” 하신 날이다(창 1:7).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셨고, 하나님이 “궁창에 광명이 있으라” 하신 날이다. 하나님이 “너 죽지 말고 살라” 하신 날이다. “피투성이라도 살라”(겔 16:16) 하신 날이다. “못났어도 살라,” “힘들어도 살라” 하신 날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있으라” 하여 태어나고 하나님이 “살라” 하여 사는 만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창1:4).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했다.” 안식일은 생명의 질서로 돌아가는 날이다. (294.1)
 안식일은 하나님이 땅에게 “풀과 씨 맺는 채소를 내라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창 1:11) 하신 날들의 재현이다. 또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물에게도 “생물을 번성케 하라”(창 1:20) 하신 날들의 재현이다. 만물이 만물의 생존과 번영에 기여하라 하신 날들의 재현이다. 하나님은 그 창조의 날들에 하늘과 땅과 바다에 있는 모든 생물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에 충만하라 짐승과 새들도 땅에 충만하라” 하셨다. 안식일이 우리에게 되돌려 주려는 창조의 질서는 하나님이 만물을 낳고 땅이 식물과 생물을 내고 바다와 공중이 모든 생물과 새들을 내어 기르는 질서이다. 땅과 바다와 공중이 생물로 번성케 하는 질서이다. 만물이 만물의 사랑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세계에 충만하는 질서이다. 만물에 앞서 사람이 자연의 관리자가 되고 청지기가 되는 질서이다. 사람이 자연의 생육과 번식을 조장하는 질서이다. 만물이 상생하고 공생하는 질서이다. (294.2)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연은 어떤가. 땅이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맺는 과목을 내는 질서인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뚜렷한 질서인가.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창 1:14) 분명하게 “이루어지는” 질서인가. 빛과 어둠의 교환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창 1:18) 질서인가. 물과 바다가 생물로 번성하게 하는 질서인가(창 1:20). 하늘의 궁창이 새들을 번성하게 하는 질서인가. 땅이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들을 번성하게 하는 질서인가(창 1:28).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열매맺는 모든 나무가 사람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축복하는 질서인가(창 1:29). 그리고 모든 푸른 풀이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새와 생명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고 있는 질서인가(창 1:30). 에덴에서 발원한 강이 우리의 삶의 동산을 적시고 있는 질서인가(창 2:10). (295.1)
 아니다.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지금은 더 이상 만물이 만물에게 “너 있다” 하는 안식일의 세상이 아니다. 지금은 만물이 만물에게 “너 없다” 하는 세상이다. 안식일 이후의 세상이다. 말세이다. 여섯 날의 세상이다. 지금은 새들의 씨가 마르고 있다. 동물들의 씨가 마르고 있다. 나무들과 동물들의 씨가 마르고 있다. 물들의 근원이 마르고 있다. 만물의 근원이 병들고 있다. 땅이 풀을 내지 못하고 육축을 내지 못하고 있다. 바다와 물이 생물을 내지 못하고 있다. 물이 생물을 축복하여 번성케 하지 않는다. 공중이 새들을 축복하지 않는다. 축복하기보다는 저주하고 있다. 모두가 서로를 번성케 하기보다는 서로 씨를 말리고 있다. 사람이 세계와 만물의 관리자와 청지기가 아니다. 사람 때문에 세계와 만물은 생육하고 번성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람 때문에 땅에서 만물의 자취가 사라지고 있다. (295.2)
 진실로 지금은 무서운 세상이다. 사람이 창조주의 진노를 두려워 해야할 날이다(계 14:7). 그렇다. 지금은 하나님이 두려운 세상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의 진노가 두려운 날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지는 날이다. 안식일은 이 두렵고 무서운 날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안식일로 우리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 세상과 이 자연과 만물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안식일로 말미암아 태초의 날에 사람이 담당했던 역할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만물에게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296.1)
 지금의 사람은 만물의 목자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만물의 생명을 훔치는 도둑이다. 인간은 세계와 만물로 망하게 하는 파괴자이고 살생자이다. 사람이 세계와 만물에게 가는 것은 훔치러 가고, 죽이러 가고, 멸망하러 간다(요 10:10). 그들을 살리고 그들의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목자의 마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요 10:10). 사람들은 만물의 목자가 아니다. 도둑이다. 살생자이다. 땅으로 망하게 하고(계 11:18), 이 세계를 망하게 하는 파괴자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296.2)
 안식일: 상생과 공생의 언약
 태초의 세계, 곧 안식일의 세계는 언약의 세계이다. 생명의 언약의 세계이다. 하나님과 사람과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다 이루어진 일곱째 날에(창 2:2), “하나님이 쉬어 평안하신”(출 31:17) 그 제칠일 안식일에 “한 장막에서”(계 21:3) 함께 쉬면서(출 20:11) 생명의 한 식구가 되기로 맹세한(창 2:2) 언약의 세계이다. 만물이 한 지붕의 한 식구가 되기로 한 언약이 안식일 언약이다. 온 만물이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고”(레 26:11) 한 장막 안에서 하나님이 만물의 여호와가 되고, 만물이 여호와의 기르시는 피조물이 되는 언약이(겔 20:20) 안식일 언약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되는 언약이(계 21:3-6; 고후 6:16) 안식일 언약이다.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사는”(사 11:6, 7, 9) 언약이 안식일 언약이다. (296.3)
 그러나 사람이 범죄함으로 태초의 이 질서가 파괴되었다. 무슨 죄인가? 상생과 공생의 안식일 언약을 파괴한 죄이다. 안식일을 파괴한 죄이다. 상생과 공생의 안식일 언약이 파괴되면서 에덴이 파괴되었다. 사람이 안식일 언약의 상징인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태초의 질서가 파괴되었다. 사람이 생명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생명을 먹음으로써 에덴의 질서에 끝이 왔다. 사람이 지키고 돌보는 청지기의 자리를 떠나 부리고 약탈하고 짓밟는 압제자의 자리로 옮겨가면서 낙원에 끝이 왔다. 사람이 그 양을 돌보고 양으로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얻게 하는 목자의 마음을 잃고 양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둑의 마음(요 10:10)을 품게 되면서 안식일의 나라는 황폐해졌다. 생명의 동산은 황막한 광야로 바꾸어졌다(창 3:17-19). 더 이상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지”(창 1:110) 못했다. 자연계의 파괴는 인간계의 파괴와 중첩하였다. 선악과를 유린한 인간은 인간의 목숨을 유린하였다. 살생자는 살인자가 되었다. 생명의 노래는 끝나고 죽음의 울음이 그 자리를 메웠다. 아벨의 울음소리와 땅의 부르짖는 소리와 짐승의 아우성 소리가 그 좋았던 땅을 가득 메웠다. (297.1)
 하나님은 홍수로 이 “부패와 강포로 가득한”(창 6:11) 세상을 다시 한번 깨끗하게 하였다. 노아 홍수는 하나님의 재창조였다. 하나님의 재창조는 어떠한 질서를 의도했는가. 첫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만물이 상생하고 공생하는 질서를 의도했다.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을 축복하고 피조물들이 피조물들을 서로 축복하는 생명의 질서였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다시 한번 생명의 언약을 세우셨다. 사람뿐만 아니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에게 언약을 세웠다”(창 9:10).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과 더불어 언약을 세웠다”. 하나님이 자기와 사람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을 맺었다”(창 9:11). 노아의 무지개는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사이의 영원한 언약”(창 9:16)의 증거였다. 다시는 서로가 서로를 멸하는 관계로 살지 말자하는 언약이었다. (298.1)
 그러나 이번에도 사람에 의하여 이 언약이 지켜지지 않았다. 언약은 파괴되었다. 상생과 공생의 언약이 파괴되었다. 이제 세상은 더 이상 만물이 만물을 지키고 보호하는 세계가 아니다. 만물이 만물을 먹는 세계이다. 만물이 만물을 파괴하는 세계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제일 앞에 나서서 땅을 망하게 하고 천연계를 망하게 하는 시대이다. 사람이 씨채 식물을 먹고 사람이 피채 고기를 먹는 시대이다(창 9:4). 사람이 생명의 근원 곧, 그 종자까지 먹고 멸하는 시대이다. 사람 때문에 만물의 근원이 마르고 있고, 만물의 씨가 마르고 있는 시대이다. 사람 때문에 물들의 근원이 썩고 있는 시대이다. 사람 때문에 땅의 근원이 피폐하고 하늘의 바탕이 피폐해 가는 시대이다. (298.2)
 안식일의 질서에서 자연과 만물은 본래 사람의 사랑과 봉사를 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이제는 만물과 세계가 사람의 폭력과 위협에 종속되었다. 지금은 사람이 사는 방식이 만물을 축복하고 보살피는 방식이 아니다. 특히 현대의 기술 문명은 사람이 생명의 선악과를 먹고 유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이 만물의 목자가 되어 만물로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도둑이 되어 만물의 생명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방식이다. 이 기술 문명과 이 기술 시대의 인류는 하나님의 피조물로부터 터져 나오는 저 울부짖음을 들어야 한다. 우리가 이 외침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우리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못하고 그 고통을 깨닫지 못하며 그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무서운 죄를 통회하지 못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더 말할 수 없이 크고 무서운 저주이다. (299.1)
 안식일의 언약: 생태계의 양심
 이 세계와 이 자연이 하나님의 세계가 되려면 먼저 사람이 천연계의 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이 생태계의 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물이 좋고 선하며, 심히 좋고 심히 선했던 태초의 날로 돌아가야 한다. 태초의 거룩한 언약으로 돌아가야 한다. 태초의 언약이 태초의 양심이다. 안식일 언약이 태초의 언약이다. 안식일 언약이 태초의 양심이다. 안식일 언약이 생태계의 양심이다. 인류는 안식일로 돌아가 생태계의 양심을 되찾아야 한다. (299.2)
 그러면 생태계의 양심에서 사람은 무엇이냐. 안식일의 언약에서 사람은 무엇이고 생태계의 양심에서 사람의 직분은 무엇이냐. 안식일은 사람이 “자신과 아들과 딸과 남종과 여종과 육축과 문안에 유하는 나그네”의 보호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날이다. 안식일은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기억하고 그들로부터 손을 떼는 날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에 더 이상 손대지 말라 하시는 날이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내 놓으라” 하셨듯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세계와 자연과 만물을 그 손에서 “내 놓으라” 하시는 날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너희들은 도둑이 아니고 목자가 되라” 하시는 날이다. 목자의 마음이 생태계의 양심이다. 목자의 역할이 안식일의 언약에서 사람이 담당한 역할이다. 청지기와 소작인의 역할이 사람의 역할이다. (299.3)
 땅과 바다와 하늘과 그 사이의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이다. 안식일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토지는 내 것이요 너희는 나의 소작인일 뿐이라”(레 25:23)고 하신다. 안식일의 짝인 안식년과 희년에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부채를 면제하였다. 가난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팔려간 토지들을 원 소유자에게 반환시켰다(레 25; 신 15:1-18). 하나님의 토지가 오래 약탈되어 기력이 쇠잔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경작자들에게 안식년에는 땅을 그대로 놔두게 하셨다. 사람으로 땅에 손대지 못하게 하셨다. “내 땅을 네 손에서 놓으라” 하셨다. “내 땅을 자유케 하라” 하셨다. 내 땅으로 “숨 돌리게 하라” 하셨다. (300.1)
 안식년은 계집 종의 자식만 숨돌리는 날이 아니다. 육축도 숨 돌리는 날이다(출 23:12). 땅도 숨돌리는 날이다. “제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찌라” 하셨다.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라”(레 25:4) 하셨다. 안식일의 질서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내 백성을” 손대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소유 앞에서 마음을 삼가는 사람이다. 시내산 둘레에 금줄을 치고(출 19:12, 13) 이웃의 생명과 재산 둘레에 금줄을 쳐 “내 발을 금하는”(사 58:13) 사람이다. 아무에게도 아무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누구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300.2)
 그렇다.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은 “네가 다스리지 않는” 날이다. 네가 부리지 않는 날이다. 네가 이용하지 말고, 이득을 취하지 말고, 억누르지 말아야 하는 날이다. 네가 만물의 청지기의 자리로 돌아가고 네가 만물의 봉사자와 목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날이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푸른 초장에 눕게 하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시 23:2) 역할로 돌아가는 날이다. 안식일의 사람은 목자로서의 사람이다. 청지기로서의 사람이다. 피조물을 부리지 않고 돌보는 사람이다. 이용하지 않고 돕는 사람이다. 빼앗지 않고 주는 사람이다. 피조물을 먹이고 치료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예수 같고 예수의 제자들 같은 사람이다. (301.1)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가난하고 병들고 죄 많은 사람들만 안식일의 세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죄인들만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롬 8:21)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안식일의 날과 안식일의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 만물이 이 안식일과 더불어 목자 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롬 8:19). 모든 피조물들이 “죽음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의 자유를 함께 누리기를 기다리고 있다”(롬 8:21). (3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