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을 내밀라 제 3 장 신적 권위를 직접 드러내신 기적들 기적 12 ► 여자여, 네 병에서 놓였다
  • 1
 본문 : 눅 13:10-17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당신의 규례대로 회당에 가셨다. 회당장은 크신 교사이신 예수님께 성경을 읽고 해석해 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1)
 회당은 유대인들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곳으로 그들의 종교 문화의 중심지였다. 율법에 의해 유대인 열 가정만 있는 곳이면 회당을 지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면 거의 모든 성과 마을에 회당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행 15:21). 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을 들었다. 안식일 외에 평상시에는 회당이 지방 법정으로 사용됐으며(막 13:9), 일반적으로 학교 역할을 담당하여 이곳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를 드렸다. 회당은 예루살렘 성전처럼 희생을 드리는 장소가 아니었으므로 제사장들은 회당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단지 그들은 회당에서 행해지던 예배행사에 종종 초청만 받았을 뿐이다. 유대인 사회에서 회당의 일과 지역 사회의 일은 주로 장로회와 회당장 아래 있었다(눅 7:3-5;막 5:22). 회당장은 예배를 인도했으며 회중 중에서 기도할 사람, 성경을 읽을 사람, 그것을 해석할 사람을 뽑아 부탁하는 일을 했다. 회당장 밑에 오늘날 교회의 집사들이 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 회당장을 도와 율법서를 나르고 장로회에서 결정한 형벌을 집행하는 일 등을 도맡았다. (201.2)
 회당장의 부탁을 받아 성경을 읽으신 후 그것을 해석하고 있던 예수님은 청중들 틈에 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병색(病色) 짙은 한 여자를 보셨다. 삐딱하게 앉아 있는 그녀는 지난 십팔 년 동안 귀신에게 붙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했던 것이다. 귀신이 들리면 별 희한한 일이 다 생긴다. 귀가 먹는 자, 벙어리 되는 자, 더러운 말하는 자, 간질 증세를 나타내는 자, 맹인이 되는 자 등이 있는데 이번 경우에는 몸이 꼬부라져 고통 속에 살아가게 하는 귀신이다. (202.1)
 예수님께서 삐딱하게 앉아 있는 그녀를 보자마자 귀신 들려 꼬부라진 줄을 대번에 아시고 연민의 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꼬부라진 형편에 회당에까지 왔으니 얼마나 기특한 일이었는가!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불쌍한 여자를 고쳐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설교를 중단하신 주님께서 그녀를 불러내었다. (202.2)
 “저 쪽에 앉아 있는 몸이 꼬부라진 자여, 이리로 나오라” (202.3)
 “예, 가겠습니다.” (202.4)
 꼬부라진 여자를 불러냈을 때에 청중들의 시선은 모두 그녀에게 집중됐다. 주님께서는 그 불쌍한 환자에게 안수해 주셨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202.5)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202.6)
 예수님의 선포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꼬부라진 여자에게서 귀신이 떠나 가고 곧 몸이 똑바르게 펴진 것이다. 삐딱하게 꼬부라져 18년 동안이나 고통 중에 살던 여인이 건강하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녀는 자기를 낫게 해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다. (202.7)
 안식일에 주님께서 설교하시던 중 병 고치시는 것을 목격한 회당장이 심히 화를 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응급 환자 외에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18년 동안 꼬부라져 앓던 여자는 응급 환자가 아니었다. 회당장은 분내어 무리에게 소리쳤다. (203.1)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203.2)
 사실 회당장은 예수님께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직접적으로 항의할 만한 용기가 없는 위인이라 단지 우회적으로 주님께 항변(抗辯했을 따름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203.3)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203.4)
 담대하신 주님께서 회당장과 그에게 동조하는 모든 자들을 두고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정면에서 부르셨다. 너무나 권세가 있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감히 이에 도전하는 자가 없었다. 비난하고 외식하던 자들은 너무나 이치에 맞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했다. 결국 회당에 있던 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매우 기뻐했다. (203.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몇 달 전에 일으키신 이 기적은 회당 안에서 행한 기적으로서는 마지막이었다. (203.6)
 그러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꼬부라진 여인을 고쳐 주신 참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안식일의 참된 목적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 꼬부라진 여인을 쭉 펴게 고쳐 주시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여도 괜찮다는 것을 몸소 실천에 옮기신 것이다. (203.7)
 예수님은 안식일에 불쌍한 환자의 병을 고쳐 주시다가 고소를 당한 일이 여러번 있었다. 고소자들은 사람보다 제도를 더 사랑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소나 나귀는 밖으로 끌고 가서 물과 여물을 먹였다. 주님께서 바로 그 점을 들추어내어 마귀에게 묶였던 여인을 풀어 주신 것으로 비유했다. 기독교에서는 언제나 개인을 조직보다 앞세운다. 기독교만큼 개인의 인간적 가치를 존중해 주고 옹호해 주는 곳은 없을 것이다. 개인이 조직을 위해 존재한다는 조직의 절대화는 전체주의 혹은 공산주의 국가의 주장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사람을 더 사랑해야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결코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4.1)
 나는 오늘의 기적에서 몸이 꼬부라졌던 여인의 신앙 상태와 동정심 많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진한 감동을 받는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있었다. 우리도 안식일마다 교회에 가야한다. 또한 악한 영 때문에 18년 동안 몸이 꼬부라져 가슴 한 번 쭉 펴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던 그 여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갔었다. 비록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성전으로 갔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적인 질병을 핑계삼아 공중 예배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어야겠다. (204.2)
 꼬부라진 여인이 자기의 병을 고쳐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동정심 많으신 주님께서 그 불쌍한 여인을 보시고 설교를 중단하신 후 회중석에서 불러내어 치유해 주셨다. 순전히 주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이었다. 비록 그날이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또한 설교 도중이라 할지라도 귀신에 사로잡혀 꼬부라진 여인의 딱한 입장을 먼저 생각하시고 그녀를 고쳐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분은 오늘날도 항상 우리의 형편을 먼저 배려해 주시는 동정심 많은 주님이시다. (204.3)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