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3 부 안식일과 생명 제 1 장  안식일, 하나님이 “너 있으라,” “너 좋다,” “너 살라” 하시는 생명의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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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의 명령: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
 안식일은 우리에게 창조와 재창조의 재현이다. 안식일의 선포는 창세기 선포의 재현이다. 창세기의 선포는 창조주의 “너 있으라”는 선포이다. 하나님의 “너 있으라”는 가라사대가 창세기의 선포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창 1:3)가 창세기의 선포이다. “물 가운데 궁창이 있으라,” “궁창에 광명이 있으라,” “땅에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맺는 과목들이 있으라”가 창세기 선포이다.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과 날개있는 모든 짐승들이 그 종류대로 있으라.” 그리고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가 있으라”가 창세기의 선포이다. 그리고 이 선포가 재현되는 날이 안식일이다. (286.1)
 “너 있으라”하는 하나님의 “가라사대”는 생명의 선포이다. 죽지 말고 살라는 생명의 선포이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피투성이라도 살라”(겔 16:6)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모든 생명이 창세적 명령이다. 모든 생명이 창조주의 명령이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태어난 존재이고 “죽지 말고 살라”는 창조주의 명령을 받들어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생명, 즉 “살아야 함”이 창조주의 일차적 명령이다. 피조물의 일차적 책임과 의무가 생명의 책임과 생명의 의무이다. 생존 자체가 창조주에 대한 일차적 순종이고 믿음이다. (286.2)
 “너 있으라”는 명령, “너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는 명령은 죽을 지경이 되었다할지라도 살라, 죽는 것이 백 번 났다 싶을 때도 살라,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창피하고 수치스러울 때도 살라는 명령이다. 부모 형제가 나를 버리고 온 세상이 나를 버리고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 싶을 때도 살라는 명령이다. 십자가의 예수처럼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고서도 살라는 명령이다. 우리가 안식일에 듣는 명령이 이 생명의 명령이다. (287.1)
 출애굽기 3장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야웨라 밝히셨다. 하나님은 야웨이시다. 야웨는 “나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다(출 3:14). “나는 나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 그대로 하나님은 참으로 “있음”(Being)이시다. “스스로 있음” 이시고, 스스로 “됨” 이시다. 스스로 “. . . 이다” 이신 분이다. 우리로 “있게” 하시고, 우리로 “. . . 이다” 이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있으라” 하시는 분이시오, “. . . 이 되라” 하시는 분이시다. (287.2)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시 14:1; 53:1) 하지만 그들에게도 “나 여기 있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 아니다”고 하여도 나 여호와는 여전히 너희의 “하나님이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진실로 여기 “계시고” 진실로 너희의 하나님 “이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이 창세기의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이 안식일의 하나님이시다. 출애굽기 3장에서 “나 있다,” “나 이다” 하시는 하나님이 창세기 1장에서는 “너 있으라”고 하신다. “빛 있으라” 하시고 “너는 빛이다” 하신다. “사람 있으라” 하시고 “너는 사람이다” 하신다. 안식일의 하나님은 “나 있다”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너 있으라”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287.3)
 안식일의 하나님은 “나 여기 있다” 이신 하나님이시며, “나 너의 하나님이다” 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너 있으라”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너는 나의 자녀이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안식일에 뵈옵는 하나님은 이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재현되는 안식일의 창조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너 있으라,” “너 살라,” “너는 내 자녀이다,” “너는 의로운 자이다,” “너는 거룩한 자이다” 하시는 사건이다. (288.1)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없다,” “네가 없다,” “세상은 허무하다”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셨고 빛이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있으라 한 것은 모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있고, 이삭도 있고, 야곱도 있다. 모두 죽었지만 여전히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고 이삭의 하나님이시며 야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죽었으니 없다고 하겠는가. 만물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없는 만물이 허무할 뿐이다. (288.2)
 그리고 하나님이 “있으라” 하신 것은 모두 “좋은 것이다.” “선한 것이다.” 의미 있는 것이다.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좋다,” “선하다” 하시는 존재들이다(창 1:10). 하나님이 “심히 좋다,” “심히 선하다” 하시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신 세계에 좋지 않고 선하지 않은 것은 “독처하는” 존재뿐이다(창 2:18). “독처하는 삶뿐이다.” 남들을 “없다” 하고 오직 나 혼자가 “있다” 하는 생존뿐이다. 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이 “너 있으라,” “너희 있으라,” “그들이 있으라” 하시는 날일 뿐만 아니라, “너 좋다, 너 선하다, 너희가 좋다, 너희와 그들이 모두 좋고 선하다” 하시는 날이다. 그리고 우리도 너와 그들을 향하여 “네가 좋다,” “그들이 좋다”고 말해야 하는 날이다. (288.3)
 안식일은 만물이 “있는” 날이다. 나 혼자 있는 날이 아니라 나와 함께 만물이 있는 날이다. 내가 있고 만물이 있을 뿐 아니라 나와 만물이 함께 “좋고 선한” 날이다. 나 홀로 의롭고 선할 뿐 다른 모든 이들과 만물이 나쁘고 악하여 내가 손봐줘야 하는 날이 아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는 날이다”(마 18:10). 연소함으로도 업신여기지 말고(딤전 4:12), 빈곤하다 하여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는 날이다(고전 11:22). 안식일의 왕국에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바보라 욕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마 5:22). (289.1)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 있으라” 하고 “너희는 나의 자녀이다”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으로 부르시는 날이다. 만물을 향하여 “너 있다”할 뿐 아니라 만물을 향하여 “너 좋다” 하시는 하나님의 역할로 우리를 부르시는 날이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있음과 있게함의 생명에 동참케 하는 날이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곁에 “그들을 있게 하고 그들을 너희의 무엇이게 하라”고 부르시는 날이다. 그들을 “있게 하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가 동참하는 날이다. 우리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존의 생물학적 생명과 사회학적 생명의 청지기로 나서는 날이다. (289.2)
 안식일의 원수들
 사람을 죽이고 피조물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있으라” 하신 것을 없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을 없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음이라고 선언한 것을 없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somebody, something이라고 부르는 것을 nobody, nothing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저희는 분명히 있는 무엇이다 라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저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전혀 없는 무엇, 곧 허무라고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사람을 죽이고 피조물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좋다” 하시고 “선하다” 하신 것을 나쁘다 악하다 하는 것이다. 나쁘다 악하다 하여 없이 하는 것이다. 그들을 생물학적으로 없이하는 것 일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까지 없이 하는 것이다. (289.3)
 사람을 향하여 “없다” 하고, 피조물을 향하여 “없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좋다 하시고 선하다 하신 것을 향하여 나쁘다 하고 악하다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을 없음이라 하고 헛되고 허무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망하게 하고 하나님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을 나쁘고 악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망하게 하고 하나님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있음이신 하나님, 의미이시고 보람이신 하나님, 좋으심이고 사랑이신 하나님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아무 것도 아님이 아니다. 허무가 아니고 악함이 아니다. 무의미가 아니다. 모든 것은 있음이고 의미이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의 무엇이다.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이시고 사랑이시고 영원이신 그분에게 무엇이다. 하나님이 있으라, 하나님이 무엇이라 하신 그 모든 것들에게 만물은 무엇이다. 그리고 만물은 좋음이다. 아름다움이다. 선함이다. (290.1)
 스스로 “계심” 이시고 스스로 무엇이신 하나님을 그 마음과 입으로 “없다” 하는 미련한 자들은 안식일의 생명과 선함의 바깥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다. 안식일의 하나님이 있으라 하신 것들 중에 지극히 작은 것 어느 하나에게라도 “너는 없다,” “저들을 없이 하소서” 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안식일의 원수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이다. 적그리스도이다. 거짓 선지자들이다. 엄연히 있는 데도 불구하고 엄연히 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리다하고 늙었다하고 못생겼다하여, 또 병신이라 하며 배우지 못했다 하며 약하다 하며 그리고 떼거리가 없다 하고 돈이 없다 하고 피부색이 어떻다 하고 내 지방사람이 아니라 하고 내 식구가 아니라 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죄가 많다하여 그들을 “없다” 하고 그들을 “나쁘다 악하다” 한다면 그리고 그들을 없이 여기고 업신여기면 그는 안식일의 원수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원수이다. (290.2)
 하나님이 “너는 빛이다,” “너는 사람이다,” “너는 내 자녀이다” 하신 것들 중의, 그리고 하나님이 “좋다” 하신 것들 중의 지극히 작은 어느 하나에게라도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너는 좋지 않고 나쁘다” 한다면 그는 창조주 하나님의 원수이고 안식일의 원수이다. (291.1)
 십자가는 사람의 생존과 사람의 위상을 “없이” 하는 흉기이다. 생존을 부정하고 생존을 없이하는 X표가 십자가이다. 엄연한 “있음”을 부정하는 X표가 십자가이며 있음의 “좋음”에 대한 X표가 십자가이다. 하나님이 낳은 사람의 아들의 존재를 나쁘다 하고 그들을 “없이 하소서”하고 부르짖은 죄가 이스라엘의 죄이다. “있음” 이시고 “있게 하심” 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없이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요 19:19) 하고 소리지른 죄가 이스라엘의 죄이다. 옛 이스라엘의 죄이고, 현 이스라엘의 죄이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땅에서 사람을 지워버린 죄이다. 안식일의 “살아라 살게 하라”는 명령을 지워버린 죄이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 하신 생명의 명령을 어긴 죄이다. 드디어 “긍휼 없는 심판을”(약 2:13) 기다려야 하는 죄이다. (291.2)
 일주일의 여섯 날은 우리의 “있음”이 흔들리는 날이다. 우리의 “좋음”이 흔들리는 날이다. 우리가 무지하고 늙고 병들고 무능하고 죄 많아 우리의 “좋음”“있음”이 의심스러워지는 날이다. 바람직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나의 있음이 의심스러워지는 날이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헌신으로도 천사의 방언을 말하는 능력으로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으로도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을 알아내는 지식으로도 흔들리는 나의 “있음”을 안정시킬 수 없다. 사방으로부터 나에 대하여 들려오는 소리는 “없이하라”는 아우성뿐이다. 나를 향한 아우성은 “없어지라”는 것뿐이다. 여섯 날들은 “없이하라”하는 아우성이 우리에게 물결치는 날이다. 마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창 2:2) 날들과 같다. 그러나 안식일의 성령은 이 공허하고 허무한 수면에 운행하신다. 제칠일은 여섯 날의 위에 있는 날이고, 여섯 날의 수면 위에 운행하는 하나님의 신의 날이다. 제칠일은 여섯 날의 위에 운행하는 날이다. 성령은 제칠일과 함께 여섯 날의 수면에 운행하신다. 제칠일과 제칠일의 성령은 암탉이 알을 품듯이 이 여섯 날의 허무 안에 있는 우리를 품으신다. 그리고 허무와 없이함의 깊은 수면 위에서 우리에게 부르짖는다. “너 있으라!” 그리하여 제칠일에 우리가 있는 것이다. 피투성이의 목숨이지만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죄 많은 목숨이지만 사는 것이다. 부족한 삶이지만 여전히 사람이며 부모이며 자식인 것이다. 친구이며 형제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292.1)
 안식일의 자녀들이여. 어렵고 부족하다하여 삶을 포기하지 말자. 세상이 우리더러 “없어지라” 하여도 없어지지 말자. 세상이 우리더러 “자격이 없다” 하여 책임을 놓으라 하여도 사람의 책임, 사는 책임을 놓지 말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너 좋다” 하시고, “너 의롭다” 하시면 우리는 좋고 의로운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권세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있음”이라 하고 “이다” 하고 “좋음이다” 하고 “의롭다” 하시고 그리하여 다시 말하노니 “살라” 하시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7-39). 안식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293.1)
 안식일의 자녀들이여. 사람을 죽이지 말자. 살아있는 생명을 없이 하지 말자. 좋은 생명들을 나쁘다 하지 말고 악하다 하지 말자. 존재하는 생존을 약하고 나쁘다 하여 없이 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자. 천연계에는 하나님이 있으라 하여 있는 세계이다. 네가 있으라 하면 있고 없으라 하면 없어져야 하는 사람도 없고 생물도 없다. 모든 생존이 다 그렇다. 하나님이 있으라 해서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있으라 하여 있는 천연이고 자연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너 있으라” 하심의 날이다. 하나님의 “너 좋다” 하심의 날이다. 하나님이 “있으라” 하여 내가 있고 네가 있다. 그들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이 “좋다” 했으면 좋은 것이다. 우리도 그들이 좋다고 해야 한다. 안식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너 있으라” 하고, “너 좋다”는 창세기적 선포로 다시 살아나는 날이며, “너 있으라”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나의 생존을 확인하는 날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있다” 하고 “좋다” 하는 생명의 사역에 동참하는 날이다. (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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