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의 역사적인 국면 중에 개신교도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모으는 것은 아무래도 박해자로서의 모습일 것이다. 현대의 가톨릭 당국자들이 그들의 교회가 저지른 소름 끼치는 종교 탄압의 이미지를 완화시키려고 백방으로 애쓰고 있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도 종교 탄압의 역사적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새 가톨릭 백과사전」(New Catholic Encyclopedia)에서도 “현대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종교 재판 특히 중세의 막바지에 스페인에서 자행했던 종교 재판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가장 어두운 기록의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고 했다. 이 사전은, 네덜란드에서만 50 년 동안에 2천 명의 개신교도들이 살해되었으며, 1572년 8월 23일 밤에 개시되었던 성 바르돌로메 오(Bartholomew)의 대학살에서 3~4천 명의 프랑스 위그노(Huguenots)교도들이 살해된 것을 인정하고 있다.26 (130.3)
 이 수자는 최소한의 수자이다. 이 수자에는 알비조 파 신도들(Albigenses)과 왈덴스 인들을 근절키 위해 로마 가톨릭이 일으킨 십자군들의 만행이 간과되었다. 또 이 수자에는 산발적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종교 박해의 행위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개신교도들과 가톨릭 모두를 합쳐 8백만 명 이상의 군인 및 민간인 사상자들을 낸 것으로 추정되는 30 년 전쟁(1618~1648)도 포함되지 않았다. 비 가톨릭계 인사들의 연구를 보면, 화란의 개신교도 피살자가 2천 명을 훨씬 초과하며, 프랑스 위그노 교도의 피살자 수도 3~4천 명을 훨씬 초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약 5천 명의 그리스도인을 살해한 로마 제국이 다니엘 7장에서 “무섭고 놀라운” 짐승으로 기록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로마 제국은 이교 제국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모습은 하나님께 얼마나 참혹하게 보였을 것인가! “단 한 마리의 참새도 그대의 하나님 몰래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마 10:29;필립 역). 하나님께서 세상을 돌보시고 계시는 것이다! (130.4)
 통계야 어떠하든지, 수자 만으로는 개인적인 고뇌를 나타내지 못한다. 화형주에 묶이우기 전에 그의 발이 먼저 불에 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영국 사람 존 브라운(John Brown)의 고통이라든지, 젖먹이 어린 아기와 함께 자루 속에 묶여 익사해야 했던 헬렌 스타르크(Helen Stark)의 고뇌, 그리고 2 주 동안이나 팔과 다리가 묶이운 채로 매달린 그의 아버지에게 동정을 나타내었다는 이유로 곤봉에 맞아 죽어야 했던 8살짜리 빌리 페티(Billy Fetty)의 고통 같은 것은 통계에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다.27 (130.5)
 통계 수자는 살을 태우고 말리는 듯한 고문의 고통을 전달해 줄 수 없다. 여러분은 손을 등 뒤로 묶은 후 그 손을 다시 밖으로 빼내어 위로 들어올려 어깨의 관절을 골절케 만드는 고문을 상상해 보았는가? 또 여러분은 손목에 체중을 싣고 물구나무를 서게 하여 종교 재판의 심문관이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교회의 이름으로 “이래도 신앙을 철회하지 않겠느냐?”하며 다그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가? (131.1)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잔인할 수 있었는가 하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거듭났다는 복음주의의 신앙인들도 서로 “통렬한” 비난을 교환할 수 있고 근거 없는 뜬소문으로 사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에 열을 낼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도움이 필요하다. (131.2)
 우리는 또한 중세 시대에 인명이 천시되어 심지어는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빵한 조각을 훔친 죄로 그 아비가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합법적인 고문의 역사에서 무엇인가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131.3)
 로마 제국의 사법 판사들은 로마법에 의거하여 피소된 사람을 으례 중죄인으로 보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죄를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는 고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고문 자체를 피소인이 받아야 할 형벌의 일부로 간주하였다. 박해를 받아야 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실제적인 형 집행의 과정에서보다도 로마 법정에서의 심문 과정에서 더 큰 고통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131.4)
 게르만 족들이 로마 제국을 점령함으로써, 법정 고문의 관습은 대부분 중지 되었다. 850년경에, 고츠초크(Gottschalk)라는 한 수도승이 한 교회 법정에서 고문을 받게 되었다. 그가 예정설의 교리에 대해 비 가톨릭적 견해를 신봉한 까닭이었다. 이 때, 프랑스의 리용 주민들이 맹렬한 항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성한 너희들은 온유한 심정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고 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가지고 주교에게 항의하였다.28 그런데, 12세기에 와서 로마법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으며, 고대 로마의 법정 고문의 관습이 다시 유행하게 되었다. “새 가톨릭 백과사전”에 보면,29 (131.5)
“게르만 족들의 관습과 개념의 영향을 받아 9~12세기에 걸쳐 고문이 거의 폐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마법의 부흥과 더불어 12세기에 와서 법정 고문의 관습이 다시 부활되었다.... 1252년에, 교황 인노센트 4세는 이단에 대한 시정(市政) 당국의 고문 행위를 인준하였으며, 이로써 고문은 종교 재판의 심리 과정에 있어 필수적인 절차의 하나로 인정 받게 되었다.”
(131.6)
 이 얼마나 놀라운 성서 예언의 성취인가! 로마 교회는 중세를 통해 자행한 가장 야만적이고 비 기독교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이 이교 로마 제국의 직접적이고 정력적인 후계자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같이, 작은 뿔은 착오 없이 그 무서운 짐승의 머리에서 솟아나온 것이다. (131.7)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우리는 지금까지 배도와 박해에 관한 바울의 예언이 모두 기독교 역사에서 성취된 슬픈 증거들을 살펴보았다. (131.8)
 우리는 중세의 가톨릭 교회가 “바로 그”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는 작은 뿔과 가톨릭의 역사적인 동일성을 확증시켜 주는 주목할 만한 자료들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필자는 앞서 다니엘 7장의 예언에 있어서는 의도적으로 가톨릭 신앙이 기독교 신학과 인간의 복지에 끼친 지대한 공헌이 간과되고 가톨릭이 범한 부정적인 과오들이 강조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132.1)
 이제는 작은 뿔의 특징으로서 아직까지 별로 언급한 일이 없는 또 하나의 사항 즉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한 작은 뿔의 계획된 시도를 살펴 볼 차례이다. 교황 비오 5세가 영국 왕 엘리자베드 1세를 파문하고 영국인들에게 여왕에 대한 충성의 의무가 없다고 선포한 사실은 이 예언의 성취로 간주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132.2)
 1400년경에, 페트루스 데 안카라노(Petrus de Ancharano)는 “교황은 변개할 수 있다”는 엄청난 주장을 펴 놓았다. “이는 그의 권세가 사람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양을 얽매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완전한 권세를 가진 자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30 (132.3)
 이 놀라운 주장은 종교 개혁 기간에 실제적인 실효를 거두었다. 루터는 그의 양심이 성경에 의해서만 포로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오직 성경만이)가 루터의 슬로건이었다. 교회의 어떤 전통도 생애의 지침이 될 수 없었다. (132.4)
 그런데 어느 날, 요한 액크(Johann Eck)와 몇몇 가톨릭 성직자들이 “오직 성경 만”이라고 외치는 루터에게 왜 성경의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을 지키느냐고 놀려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32.5)
 엑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다”라고 한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그러나, 교회는 자신의 권위에 근거하여 안식일을 일요일로 변개하였다.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뀌어진 경위에 대해, 루터는 성경적으로 근거를 찾을 수 없다”31 주장했다. (132.6)
 개신교의 돌풍을 저지시킬 목적으로 소집된 트렌트 공회의(1545~1563)에서 레기오의 대주교 가스파레 데 포소(Gaspare de Fosso)는 1562년 1월 18일자의 연설을 통하여 이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교회의 권위는 성경에 아주 많이 나타나 있다. 교회는 한 편으로 성경을 추천하고 성경이 신성한 것임을 선포하며 우리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고한다. ∙∙∙ 그런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주님에 의해서 가르쳐진 성경의 규례(계명)들을 교회의 권위에 의해 중지시켰다. 하나님의 계명에 나타나 있는 영광스러운 날인 안식일이 주의 날로 변경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이들 및 이와 유사한 주제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해 중지된 것이 아니라(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하려 오심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교회의 권위에 의해 변경된 것”32이라 하였다. (132.7)
 개신교에 대한 이 같은 도전은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다. 1957년판 피터 가이에르만(Peter Geiermann)의 「가톨릭 교리에 대한 개종자의 교리 문답」(The Convert's Catechism of Catolic Doctrine)을 보면 가톨릭 교회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과 답변이 교수되고 있다. (1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