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우스파 동고트 족은 교황 요한 1세를 콘스탄티노플로 파송하여 아리우스 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도록 촉구했다.
(127.5)
 이러한 신조상의 차이 때문에, 가톨릭 교도들과 아리우스 파 신도들은 서로 적대했다. 데오도릭 (Theodoric)이 지휘하는 아리우스 파 동고트 족(Ostrogoths)이 493년에 이탈리아를 점령하자, 로마 교황의 권위는 크게 위축되었다. 523년에, 데오도릭은 교황을 콘스탄티노플의 가톨릭 황제에게 파송하여 동로마 제국 내의 아리우스 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도록 촉구하였다. 그 얼마 후에, 그는 아예 교황을 투옥하고 말았다.19 (128.1)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가톨릭 황제들은 교황을 후원하기 위하여 세 개의 아리우스 파부족을 제거했다. 가톨릭 신호인 제노(Zeno 474-491) 황제는 487년에 동고트 족과 조약을 체결했으며, 이 조약의 결과로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헤룰(Heruls) 왕국이 사라졌다. 가톨릭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565~527)는 534년에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반달 족을 멸절했으며, 538년에 역시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동코트 족의 세력을 무너뜨렸다. 이 같이 하여, 다니엘의 세 뿔 즉 헤룰 족, 반달 족, 동고트 족이 “뿌리까지 뽑혔”던 것이다. (128.2)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고트 족이 무너진 해인 538년을 기억하라. 프랑스 군사 정부의 훈령을 받은 프랑스 장군 베르띠에(Berthier)가 성 시스티나(Sistina) 사원에서 자신의 대관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던 교황 비오 6세(Pius VI)를 체포한 것은 그로부터 1,260년이 지난 1798년의 일이었다. 프랑스 군사 정부는 로마 가톨릭 교회 자체를 파멸시키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교황을 체포하여 유배시켰다(이 사건에 대한 보다 상세한 주석은 God Cares 11에 있을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라). (128.3)
 다니엘의 예언은 작은 뿔에게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대권이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 꼭 같은 기간이 요한계시록 13장 5절에는 마흔 두 달로, 요한계시록 12장 6절에는 1,260일로 나타나 있다. (128.4)
 우리는 여기에서 상징을 취급하고 있다. 성서에 의하면, 네 짐승은 네 왕 혹은 네 왕국을 상징한다. 뿔들 역시 왕국을 상징하며, 물은 백성의 큰 무리를 상징한다. 성경은 또한 상징적인 예언에 있어서 1일로 1년을 대신하였다. (128.5)
 다니엘이 바벨론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을 때, 선지자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니푸르(Nippur)에서 활약하였다(66페이지를 보라). 에스겔 4장에서부터 6장에 이르는 상징적 예언 부분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1 일이 1 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128.6)
 로마 가톨릭의 발흥과 그 쇠퇴에 이르는 1,260 “일” 혹은 1,260 년의 기간은 다니엘 7장“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정확하게 성취시켜 주고 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작은 뿔의 성취라고 하는 우리의 이해를 더욱 확증시켜 준다(우리 시대에 와서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이 재흥된 것에 대해서는 God Cares!에 있는 요한계시록 13장의 주석을 보라). (128.7)
 “큰 말 하는 입”을 가지고 “동류보다 강”하여 보임
 동고트 족이 괴멸된 해인 기원후 538년으로 돌아가 보자. 로마 교황이 조심스럽게 다듬어진 신조(신경)와 막대한 정치적 잠재력 및 치밀한 조직을 갖춘 교회의 머리로서 서방 세계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상하게 된 것은 서로마 제국이 페허의 한 가닥 연기로 화하고 세 개의 아리우스 파 왕국들이 멸망하고 난 후의 일이다. 수많은 역사가들은 하나같이 고대 로마의 진정한 생존자는 로마 교회였다고 지적해 왔다.20 (128.8)
 이와같이, 로마 제국은 로마 교회에 의해 대체되었다. 아니면, 19세기 저술가들이 즐겨 표현했듯이, 이교 론마는 교황 로마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교황의 종교적 정치적 권리는 수세기에 걸쳐 증가되었다. 1076년에,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이 4세의 신하들에게, 만일 하인리히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려 하지 않는다면 하인리히에게 더 이상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128.9)
 이렇게 되자,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고한 군주였던 하인리히 4세도 별수없이 교황의 거처가 있는 알프스의 카놋사로 참회의 순례를 떠나 그 곳에서 3 일간이나 맨발로 눈 위에 서서 교황의 용서를 기다려야 했다. (129.1)
 1570년에, 교황 비오 5세는 교서(敎書) “레그난스 인 엑첼시스(Regnans in Excelsis:높은 곳에서 다스리시는 분)를 반포하셨다. 교황은 교서를 통하여 영국의 개신교 여왕 엘리자베드 1세(1558~1603)를 이단으로 저주하고, 따라서 여왕은 이제부터 통치할 권한이 없으며, 영국의 모든 백성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교황의 권위에 의하여 여왕에 대한 복종이 금지된다”고 선언하였다. (129.2)
 맥켄 지 교수는 “로마 교회의 가르치는 권위가 어떤 때는 재덕이 겸전하지 못한 사람에게 위임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비오 7세는 거룩하고 학식 있는 사람이었고 또 지금도 그렇게 존경을 받고 있지만, 영국의 엘리자베드 1세를 파문시킨 것은 교황권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오점의 하나”였다고 하였다.21 (129.3)
 “로마 교회의 가르치는 권위”가 재덕이 겸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은 1890년 대에 있었던 교황 레오 13세의 주장과 대조를 이룬다. 레오 XIII세는 1890년 1월 10일에 “그리스도 시민의 주요 임무에 관하여”라고 하는 회칙을 반포하였다. 교황은 이 회칙에서 강조하기를 “교회 내에서의 최고의 교사는 로마 교황이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교회와 교황에게 ‘하나님께 하듯’ 완전한 순종과 마음의 복종을 돌려야만 한다”고 하였다. 1894년 1월 20일에 반포한 “그리스도교국의 재연합”에 관한 회칙에서는 한술 더 떠서 “우리(즉 교황들)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지구를 붙들고 있다”고 하였다. (129.4)
  (129.5)
 얼마나 대단한 주장들인가. 그러나, 1512년의 제 5차 라테란 공회의(Lateran Council)가 교황 율리우스(Julius) II세에게 부여한 신분에 비하면 대단한 것이 아니다. 당시 크리스토퍼 마르켈루스(Christopher Marcellus)는 교황을 일러 “그대는 목자이시요 의원이시요 주권자이시요 농부이시요 마침내 그대는 이 땅에 계시는또한-분의 하나님의시다”(tu enim pastor∙·· tu denigue alter Deus in terris)22라고 하였다. 교황은 이렇게 떠드는 마르켈루스를 꾸짖지 않았다. 그 진술들은 그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에게 적합치 않게 보인다. 왜냐하면, 역사책에 묘사된 율리우스 II세의 모습은 “주로 정치가요 군대 지도자”23, “볼로냐(Bologna) 정복 때 친히 군대를 지휘한∙∙∙ 무장한 교황”24, 그리고 “교황 군대의 거짓 맹세꾼 우두머리”25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온화한 인상의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가톨릭의 대 문호 개방 정책이 시작된 이래로 현재의 많은 가톨릭 신도들은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직무)이 “이 땅에 계시는 또 한 분의 하나님”보다 크게 열등한 사람들에게 부여되어 왔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가톨릭 교도들은 이제 자신의 주체의식의 위기, 그리고 교회 권위의 근본적인 문제와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오늘날의 가톨릭 교도들은 이와 유사하게 각기 자신들의 교파 내에서 권위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는 여러 다른 교파 기독교인들의 열렬한 기도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130.1)
 우리가 여기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작은 뿔”“동류보다 강하게 되어” “큰 말하는 입을 가지게 될”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30.2)
 “성도들을 괴롭게 할 것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