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것은 “세 왕을 넘어뜨리”도록 되어 있었으며, 작은 뿔이 일어나자 “먼저 뿔 중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다(8절, 24절). (125.9)
 5. 그것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다”(8절, 24절). (125.10)
 6.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다(25절). (125.11)
 7. 그것은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다(25절). (125.12)
 8. 그것은 “한 때, 두 때, 반 때”의 기간에 특별한 권세를 누리도록 예정되었다(25절). (125.13)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위의 여덟 가지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즉, 로마 제국이 쇠락한 후 커다란 종교一정치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사람들의 마음에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리스도 교회가 바로 그 실체이다. 만약, 개신교들이 16세기의 로마 가톨릭 교회를 현재의 여러 기독교단 가운데 유력한 교단의 하나인 로마 천주교로 간단히 생각한다면 자칫 오해를 일으킬 위험이 따른다. (125.14)
 실제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약 1천 년에 걸친 유럽의 유일한 교회였다. 초기의 이러한 보편성 때문에 개신교도들과 가톨릭 교도들은 모두 그것을 좋은 것으로든 나쁜 것으로든 “우리”의 기독교적 유산의 구현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126.1)
 그런데, 너무도 자주, 그것은 더 좋은 쪽의 유산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가톨릭의 대학들은 법률, 의학, 그리고 신학의 횃불을 밝혔다. 대부분의 가톨릭 수도원들은 사실상 당시로서는 유일의 병원들을 운영하였으며 고아들과 노인들을 보살폈다. 가톨릭의 라틴어는 외교와 상업상의 국제어로 발전하였다. 영국의 시토 수도회의 수도승들(Cistercians)은 중요한 양모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이 서유럽의 대부분을 기독교화시켜 신앙적으로 그들을 보살폈다는 것이다.14세기 시골 교구의 성직자에 대한 초오서(Chaucer)유명 한 시구는 어느 세기의 성직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126.2)
“교구는 넓고 인가(人家)는 흩어져 있지만
또 흑 비가 내리고 천둥 치는 날이 있다 해도
그는 여전히 방문 길에 나선다.
신병이 나 불편을 가리지 않고 꼭 찾아가 위로를 하였다.
사는 곳의 멀고 가까움과
살림 살이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았다.
으례 손에 지팡이 쥐고 두 다리로 걸어다녔다.
양떼들이 배워야 할 본보기가 있다면,
그가 먼저 행한 후에 가르쳤느니.”
13
(126.3)
 개신교 독자들은 이 기독교를 “로마 가톨릭”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다. 노틀담 대학의 존 맥켄지(John L. Mckenzie) 교수는 그의 저서「로마 가톨릭」14에서 “로마 가톨릭 교도들은 이른바 그들의 로마주의적 특색(Romanism:가톨릭에 대한 경멸적 호칭:역자 주)이 그들의 참 기독교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고 했다.15 맥켄지 교수는 “로마주의(Romanism)의 중요성에 관한 이 신념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가톨릭 교도들이 로마주의를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로마 천주교회에 대한 토론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16 (126.4)
 예수회(Jesuit) 회원인 맥켄지 교수는 이처럼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앞으로 그의 글을 인용하는 경우가 자주 있을 것이다, 그는 그가 소속하고 있는 교회의 역사적인 결함에 대하여 이렇듯이 거리감 없는 솔직성을 가지고 기술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 같은 글을 편협한 이기주의를 위해 이용한다면, 이는 무례한 일이 될 것이다. (126.5)
 2, 3세기 기독교의 주류를 이루는 집단에게 가톨릭(보편적)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이 명칭은 안디옥의 주교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기원후 115년에 서머나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종파주의자들이나 이단에 대조되는 “보편적인” 또는 “정통적”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 었다. (126.6)
 “열 뿔”의 출현
 보편적인 것에서 로마 가톨릭적(로마 천주교적)인 것으로의 변천은 로마 제국의 기세가 기울어져 게르만 민족의 침입에 시달리던 시기에 발생하였다. (126.7)
 첫 기독교인 황제인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306~337)는 엄청난 인플레이션, 무거운 과세 부담, 국민의 사기 저하, 만성적인 국경 분쟁 등의 요인을 해소시키는 방안의 하나로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126.8)
 이로 인해 이탈리아에 힘의 공백이 생겼고, 그 결과 로마 주교(王敎)의 세력이 크게 신장하게 되었다. (127.1)
 376년에, 미개한 서고트 족(Visigoths)의 대집단이 공식 허가를 얻어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 제국 영토로 진입해 왔다. “그들은 밤낮으로 끊임없이 판자로 만든 배와 뗏목, 그리고 카누를 타고 그 강을 쏟아지듯이 도하해 왔다.” “그들의 수자를 확실하게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프리카 바다의 물결을 세거나 서풍(西風)에 날리는 모래알들을 세려는 사람과 같다”라고 당대의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s Marcellinus)가 기록하였다.17 (127.2)
 서고트 족을 뒤이어 20여 개의 게르만 부족들이 로마 제국으로 침입해 왔으며, 이 종족들이 현재 유럽 민족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부족들의 이름을 들자면 서고트 족 외에 동고트 족, 반달 족, 부르군드 족, 롬바르드 족, 앵글로 색슨 족, 프랑크 족, 알레마니 족, 헤룰 족, 수에브 족 등이다. 이 부족들이 다니엘에 나오는 “열 뿔”인 것이다. (127.3)
 세 뿔이 뿌리까지 뽑힘
 이들 부족 중에는 로마 제국에 침입해 들어오기 전에 기독교화된 부족들도 있었으나, 그들의 기독교는 가톨릭이 아니라 아리우스 파(Arianism) 기독교였다. 즉 이 부족들은 가톨릭 신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피조물로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1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