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의 일곱 인 부분을 뒤로하기에 앞서, 기본적인 질문을 하나 제기할 필요가 있다. 어찌하여 오직 어린 양만이 일곱 인을 떼실 수 있는가? 여러분이 기억하다시피, 요한이 일곱 인으로 봉(封)해진 두루마리 책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그는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아 “크게 울었다”(계 5:1~4). (200.1)
 그러나 이십 사 장로 중에 하나가 그를 위로했다. “유대 지파의 사자∙∙∙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계 5:6)고 했다. 그때 갑자기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는 어린양이 나아와서 하나님의 손에서 그 책을 취하셨다. 그때 찬양의 노래가 공중에 울려 퍼졌다: (200.2)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계 5:9, 10).
(200.3)
 이와같이 오직 어린 양만이 인들을 뗄 수 있다고 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이유들을 분석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 밖의 추가적인 이유들은 요한계시록의 다른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일곱 인을 논의해 오면서, 여러분은 각기 자기 나름대로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통찰을 갖게 되었을 것이며, 그 통찰을 남과 더불어 나누어 갖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아래에 필자 나름의 일곱 가지 이유를 소개하려 한다. (201.1)
 1. 어린 양은 우리의 중보자이시다.
 요한계시록 1장 1절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기별이 계시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즉 “이는 하나님이 그(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한 것이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미래를 알려 주시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두루마리 책을 취해 그 인들을 떼셨을 때 그는 요한계시록 1장 1절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신 것이다. 실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는 모든 축복”을 위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유일의 통로요 “중보자”(딤전 2:5)이시다. (201.2)
 2. 어린 양은 미래를 아신다.
 어린 양의 “일곱 눈”(계 5:6)은 지각과 통찰과 예지의 충만을 나타낸다.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시작과 끝이시다.(계 22:13, 1:8; 사 44:6~8), 그는 현재와 과거를 알듯 미래를 환히 아시는 분이시다. 예컨데 예수님은 어느 제자가 자기를 배반할 것인지를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요 6:64). 오직 하나님만이 미래를 정확히 예언할 수 있으시다. 느브갓네살 왕이 다니엘에게 예언적인 신상의 묵시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다니엘은 대답하기를 “박사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장이가” 능히 미래를 설명할 수 없고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단 2:27, 28)이시라고 하였다. (201.3)
 3. 어린 양은 “일곱 뿔”가지고 있다.
 어린 양의 일곱 뿔(계 5:6)은 모든 주석가들이 동의하고 있는 바와 같이 어린 양의 권세의 충만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 28:18)고 하셨다. 또 대제사장의 심판정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을 향하여 “인자가〔재림 때에〕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을∙∙∙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말씀하셨다. (201.4)
 어린 양이 뗀 여섯째 인은 재림을 묘사하고 있다(계 6:16, 17). 어린 양은 중요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려 하고 있다. 악한 세 기사(騎士)들로 인한 나날의 고생스러움과 개인적인 박해자들로 말미암는 우리의 고통스러운 시련으로 세상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죽음으로도 세상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재림이야말로 세상의 끝인 것이다. 그 때 어린 양 예수님께서 인간 생활의 전권(全權)을 가지고 오시며 만사를 주장하실 것이다. 재림 때 어린 양은 자신의 권세를 발동하여 그동안 우리들이 당해 온 모든 억울한 일을 바로 잡으실 것이다. (201.5)
 4. 어린 양은 고통을 당해 오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 책을 취하시러 걸어 들어오셨을 때 그는 마치 “일찍 죽임을 당한”(계 5:6)어린 양같이 보였다. 이 표현은 이사야 53장에서 왔다. 거기에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슬픔의 사람이며 고통을 아는 자)”, “그는 멸시를 받아서” 등의 표현이 나온다. 예수님은 고뇌어린 기도가 응답받지 못할 때 그 심정이 어떠한지를, 하늘의 문이 이중으로 잠긴듯한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내 하나님이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울부짖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을 통해 아시는 분이시다(마 27:46; 시 22:1). 잠깐 동안 예수님은 “제단 아래에 있는 성도”의 처지에도 계셨었다. (201.6)
 

예수님은 죽어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죄인이 심판날에 경험할 고뇌를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죽음으로 승리하셨다.
(202.1)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은 자들을 능히 도우시리라”(히 2:18). 인을 뗄 때마다 밝혀진 예언적인 정보들은 하나 같이 대단히 나쁜 소식들이었다. 악한 기사(騎士)들이 인류를 끔직하게 괴롭힐 것이라고 했다. 충성스러운 신자들이 순교의 죽음을 당하리라고 했다. 죄없는 사람들이 흉악한 죄목으로 고통을 당할 것이라 했다. 공의와 재림을 호소하는 기도가 오래도록 응답받지 못한다고 했다. (203.1)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나쁜 뉴스도 예지하셨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이 나쁜 소식을 미리 우리들에게 알리시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깊은 배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어린 양은 이미 그 같은 일들을 경험을 통해 알고 계시며 그가 그러한 고통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크게 격려가 된다. (203.2)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우리를 돌보고 계신 것 같지 않다는 나쁜 생각이 들 때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203.3)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얼마나 보답하는가? 구약 시대에 사단은 하나님께 욥을 헐뜯어 말하기를 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유일한 까닭은 하나님이 그를 번영케 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만약에 당장에라도 그의 번영을 거두시면 욥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 가지로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사단은 냉소하였다. 욥의 친구들의 생각도 사단의 생각과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이해하셨다. 하나님은 욥이 어떠한 처지를 당하게 되어도 여전히 충성스러울 것을 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이 욥의 산업을 파산시키는 것을 허용하셨다. 그리하여 사단은 단 하루 만에 욥의 전 재산을 쓸어 버렸다(욥 1:6~19). (203.4)
 욥은 하나님이 그를 신뢰한 그대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말할 뿐이었다. (203.5)
 오래지 않아 하나님은 욥을 그 전보다 더 풍성히 축복하셨다. 그러나 말하려는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욥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쳐도 그것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했다는 것이다. 욥의 모범, 곧 “욥의 인내”는 그 때 이후로 고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영감으로 작용해 왔다. (2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