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행복하려거든(시편강해) 제 4장 나의 주 나의 하나님 23. 영원한 시간의 궁전(宮殿)에서
 시간을 써서 돈을 벌 수 있어도 번 돈을 써서 시간은 살 수 없다는 평이한 부등식(不等式)을 지나치게 똑똑해진 현대인은 등식(等式)으로 풀려 든다. 그들은 공간을 세(貰) 들 수 있어도 시간은 세 낼 수 없다는 평범한 진실을 무시하려 든다.

 — 시편 92편(239.1)
 시간을 앞지른 공간—공허한 세상
 아무튼 해가 지기 전까지 발로 밟는 땅은 자기 소유가 된다는 대지주의 황홀한 제안을 받은 가난한 소작인은 자기도 당장 될 수 있다는 대지주를 꿈꾸며 들뜬 마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아까워 식음도 전폐하고 휴식도 마다하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밟기 위해 숨이 넘어가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해가 떨어지면서 피로로 사색이 된 소작인이 숨이 턱에 받친 채 가까스로 지주 앞에 당도했다. 그러고는 발 앞에 힘없이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 넘어간 것이다. 측은히 여긴 지주는 하인을 시켜 시신을 거두게 한 뒤 양지바른 곳에 묻게 했다. 그리고 중얼 거렸다. “다섯척 몸이 누울 땅은 저렇게 애쓰지 않아도 누구나 다 차지하게 되는 건데 ∙∙∙ .” 각색된 명작 이야기가 아니라 요사이 부동산 시대의 풍자이다. (239.2)
 공간(空間)이 비좁아진 현대에, 공간에 대한 현대인의 집착은 대단하다. 부동산 파동이 보여 주는 광적(班的)인 열기, 바로 그 것이다 땅과 집이 인생의 모든 것인 양 세상이 돌아간다. 공간이 있어야 사람이 살 수 있으니 틀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써서 돈 버는 재주를 익힌 후(예를 들면 공부 같은 것), 돈을 벌어 집을 사고 땅을 산다. 그러나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인생의 자료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사실을 ∙∙∙ . 시간을 써서 돈은 벌 수 있어도 번 돈으로 시간을 살 수는 없다는 평이한 부등식(不等式)을 지나치게 똑똑해진 현대인은 등식(等式)으로 풀려 든다. 집이나 토지 등 공간은 세(貫)들 수 있어도 시간은 결코 세 낼 수 없다는 평범한 진실을 무시하려 든다. (240.1)
 공간이 시간을 앞지른 세상, 그것은 공허(空虛)한 세상이다. 그것이 요즈음의 뒤죽박죽이 되어 가는 세상과 인간의 모습이다. 궁극적인 해결의 실마리가 있기는 한 것인지! 시편 92편에서 서광(曙光)이 비쳐온다. (240.2)
 정상(頂上)이 있는 인생 등반—지존자 하나님
 시편 150편 가운데 “안식일의 찬송시”로 표제(標題)가 붙여진 유일한 시편이 92편인데 안식일 아침에 드리는 상번제(上番祭 •타미드)에 곁들여 부른 노래로 전해진다. 15절로 이루어진 92편1~7절까지의 일곱 절과 9~15절까지의 일곱 절이 가운데 있는 8절을 정점(頂點)으로 좌우에 산비탈을 이루고 있어, 그것이 히브리 문학의 특징인 교차 대구법(交义對句法)의 구조인 것을 쉽사리 알게 된다. 이러한 구조에 따라 92편은 아래와 같이 구성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그것은 정상(頂上)이 있는 인생 등반을 보여 주고 있다. (240.3)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至尊)하시니이다”(92편 8절). (241.1)
  (241.2)
 “지존자(至尊者 • 엘욘)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92편 1~3절). (241.3)
우상은 공간의 신이요, 부동산의 신이다.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둘째 계명은 하나님을 공간의 신으로 혼돈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241.4)
 “여호와여 주의 손의 행사(行事)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行事)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行事)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92편 4~6절). (242.1)
 공간을 앞지른 시간—시간의 궁전
 인생의 정상(頂上)인 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Where is God) 그것은 부동산에 몰두된 인간이 가진 공간 콤플렉스(sapce complex)의 표출이다. 어디라는 공간에만 존재하는 신은 하나님이 아니고 우상(偶像)이다. 우상의 공간은 신이요. 부동산의 신이다.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둘째 계명은 하나님을 공간의 신으로 혼동하게 것을 금하고 있다. 하나님은 공간에 속해 계시지 않고 시간에 계신다.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면서도 범신론적(洲神論的)인 하나님이 아니신 이유도 그것이다. (242.2)
 하나님의 창조는 빛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빛은 시간의 성분(成分)이요, 빛이 흐른 양(量)이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창조된 후에야 첫째 날이 시작되었고 지구의 역사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창 1:3, 5 참조). 여섯째 날 뒤늦게 아담을 지으시고 하와를 만드심으로써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창세기 2장 1절)어 졌을 때 하나님은 창조주이신 당신의 존재와 권위와 영광이 공간을 통하여 확인되고 기념되게 아니하시고 시간을 통하여 임재를 나타내시고 권위를 입증하시며 영광을 받으심으로 영원히 기념되게 하셨다. 그것이 시간으로 지으신 “창조의 기념관”인 안식일인 것이다. (242.3)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 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세기 2장 2, 3절). (243.1)
 성경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거룩”(holy), 곧 “카도쉬”(qadosh)가 가장 먼저 적용된 것은 장소가 아니고 시간인 것은 다른 종교에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손수 지으신 “시간 속의 궁전”(Palace in time)이요, 시간으로 손수 지으신 “창조 기념관”인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시간(時間)이 공간(空間)에 앞서가는 우주 질서를 안식일 제도에서 가식적으로 확인하기에 이른 것이다. 범죄 하기 전의 에덴동산은 이처럼 시간이 공간을 채움으로써 하나님의 임재가 넘치는 충만(充滿)한 공간性間), 공허(空虛)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243.2)
 시간을 창조하실 수 있는 하나님만이 영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요, 8절이 드러낸 “영원토록 지존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시간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 시간을 공간의 창작품으로 장식하신 “하나님의 행사(行事)”4~6절에서 찬양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높이” 드려야 할 찬양의 높이며 “크게” 눈 떠야 할 관찰의 대상이며, “깊게” 생각해야 할 사고의 깊이인 것이다. 그것을 공간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243.3)
 공간의 엑소더스—출애굽 [구속]의 기념관
 “악인의 풀 같이 생장하[였고] 죄악을 행하[였던]는 자는다 흥왕할[했을]지라도 영원히 멸망하[였]나이다”(92편 7절). (2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