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부 록 G. 조셉 베이츠(Joseph Bates)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안식일 신학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안식일 신학의 발전에 기여한 베이츠의 공로는 진실로 지대하였으며 그 주장의 대부분이 아직도 유효한 것으로 남아있다. 물론 베이츠 신학으로 부터의 발전과 이탈이 모두 불가피하였다. (349.3)
 실제적인 목적들 때문에 세천사들은 모두 그들의 기별과 함께 날아가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첫 두 천사들은 그 관련성이 더 이상 밀러 운동의 시기만으로 제한되지 않았다. (349.4)
 밀러의 재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람들이 안식일 교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은 셋째 천사의 기별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첫 두 천사의 기별들을 배워야 했다.34 1857년에 제임스 화잇은 재림전심판(Pre-Advent Judgement)에 “조사심판”(Investigative Judge-ment) 란 이름을 주었다.35 (349.5)
 베이츠가 일요일의 준수를 짐승의 표로 지적한 것은 후에 크게 수정되었다. 제아무리 신학적인 이론이 그렇다 할지라도 일요일을 지키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독실한 것이 분명한데 그들이 모두 짐승의 표를 지녔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엘렌 화잇은 일요일을 준수하는 어떤 사람들도 제칠일 안식일이 일요일 안식일로 변경된 사건이 배도한 기독교에 의해 생겨났다는 분명한 증거를 거절하기까지는 짐승의 표를 지닌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촉구하였다.36 (350.1)
 사실 기독교의 일요일 준수가 비 성서적인 기원을 가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좀더 분명한 증거를 찾으려는 계속적인 노력이 안식일과 일요일에 대한 진지한 연구로 이어졌다. 제이. 엔. 앤드루스의 학구적인 연구의 결과인 「안식일과 주간의 첫째 날의 역사」(History of the Sabbath and the First Day of the Week)는 베이츠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는 것으로서 앤드루스의 생전에 세 차례나 간행을 거듭했다. 엘. 알. 콘라디(L. R. Conradi)는 1912년에 앤드루스의 위의 책을 네 번째로 간행할 때 내용을 크게 개선한 것이 아니었으며 사실상 그는 현명하지 못하게 아돌프 하르낙(Adolf Harnack)의 주장을 쫓아 영지주의(Gnosticism)를 안식일을 일요일로 변화시킨 주요 요인으로 기술하였다.37 그리고 씨. 엠.소렌슨(C. M. Sorenson)이 프란츠 쿠몽(Franz Cumont)의 주장을 쫓아 미트라교의 영향을 안식일이 일요일로 변경한 주요한 요인으로 제시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38 엘렌 화잇은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꾸어진 주요 요인을 단순하게 초기의 세속주의, 복음에 대한 오해, 유대 율법주의에 대한 혐오감, 그리스도의 부활의 관점에서 느껴지는 일요일의 매력에서 찾았다.39 (350.2)
 베이츠가 강조하는 바 안식일과 하늘 성소에서 이행되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봉사가 안식일 준수자의 성품을 발전시키고 그들의 죄를 도말하는 일에 관련되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완전히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많이 쇠퇴해진 것이 사실이다. 현대의 북미 재림교회 저술가들은 하늘 성소와 관련시키고있는 베이츠의 주장보다는 오히려 아브라함 헤셀의 “시간속의 대성전”(Cathedral in Time)개념에 더 많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40 일찍이 1853년에 제임스 화잇은 제칠일 침례교의 한 소책자 「안식일의 엘리후」(Elihu on the Sabbath)를 열렬히 받아들이고 순식간에 그것을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고전으로 바꾸었다. 이 책은 1903년까지도 보급되고 있었으며 그때까지 50만 부가 인쇄되었다. 그 책은 베이츠의 서적들을 특징짓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서적 종말론의 대부분을 빠뜨리고 있었지만 이렇듯 많은 보급률을 누렸다.41 (350.3)
 「안식일의 엘리후」의 인기에서 잘 나타났듯이 성소의 그리스도가 희석된 현상은 1850년과 1890년 사이 에 다루어진 안식일에 대한 주장들 속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모습이 심각하게 무색하게 된 현상과도 평행을 이루고 있다. 엘렌 화잇은 재림교회에 목회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명과 생애”를 자신들의 기별의 큰 책임으로 삼도록 호소하였다.42 하나의 변화가 1888년에 미네아 폴리스에 소집된 대총회 모임에서 엘렌 화잇과 엘리트 제이. 와그너(Ellet J. Waggoner)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와 강연에 의해 시작되었다. 1893년 10월까지 떠불유. 떠불유. 프레스코트(W. W. Prescott)의 「그리스도와 안식일」(Christ and Sabbath)은 166,000부가 발행되었다. 39면 밖에 안되는 이 작은 책자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무려 260회에 걸처 의미심장하게 이용되었다. 이 책의 중심적인 의도는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련을 갖지 않고는 누구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350.4)
 요약
 1845년에 조셉 베이츠는 제칠일 침례교회의 안식일을 받아들였으며 그 후 5년에 걸친 일련의 출판 활동을 통하여 안식일 신학을 조직적인 성서종말론으로 발전시켰다. 그런데 그의 성서적 종말론은 그가 겪은 밀러파 재림 신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이같은 작업 과정에서 하이람 에드손과 스티픈 피일스, 그리고 특별히 제임스 화잇 같은 젊은 동료들과 교류하였다. 그의 영적인 후계자들인 오늘날의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도들은 아직도 여전히 그의 주장을 맹목적인 자세가 아니지만 진지한 자세로 옹호하고 주장한다. (3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