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길 제 5 편 지성소 제27장 대속죄일과 그 원형
 대제사장이 회개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사탄을 상징하는 아사셀에게 옮겼기 때문에, 어떤 이는 그리스도 대신에, 사탄이 죄를 담당하는 자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것은 아사셀이 이스라엘의 속죄에 어떠한 역할도 담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간과한 결론이다. 그의 피를 성소 안에 들여간 일이 전혀 없다. 반면에 죄에 대한 속죄는 모든 죄를 그 피로 정결케 하는 큰 죄의 담당자이신 그리스도와 참된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염소의 피에 의해서 성취되어진다(요일 1:7). 그리스도와는 달리 사탄이 결국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의 죽음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그가 범죄하도록 유혹한 죄 때문이다. (248.3)
 우리는 이 점에서 결코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하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그분의 생명을 자원하여 주셨다(요 3:16). 따라서 그분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자, 그들의 죄를 큰 죄의 담당자 위에 올려놓는 자는 그들의 죄가 요구하는 형벌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죄의 불가피한 결과가 죽음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최후의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 누가 할 것인가? 공정히 평가하자면, 이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자는 사탄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심판이 끝날때, 대제사장의 원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사셀의 원형인 사탄에게 형벌을 올려놓으실 것이다. 공정히 평가하자면 사탄은 “자기가 자행한 모든 죄악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하고, 그가 범하도록 유혹한 죄에 대하여 형벌을 받아야 하”(각 시대의 대쟁투, 660)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계속 유지되지 않은 자들은 물론 그 이름이 결코 기록되지 않은 자들 모두는 자신의 죄의 대가로 인해 사탄과 함께 불못에 던져져, 마침내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계 20:10, 15). (248.4)
 이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하게 옹호되는 것이다. (249.1)
 대속죄일의 시간
 표상적인 심판의 날인 대속죄일은 “이달 구 일 저녁” 정각에 정확하게 시작되어,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레 23:32) 계속되었다. “저녁”은 매일의 시작과 끝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시각이었다. 그러므로 해가 지는 구 일 저녁은 십 일의 시작을 나타냈다. 이때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십 일 전에 나팔 소리로 미리 통고되어진 대로 예루살렘의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늘 성소가 정결하게 될 때인 심판의 실제적인 날의 시작 시각은 하나님에 의해 지정되었다.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단 8:14). 믿을 만한 자료에 의하면, 1844년의 칠월 십일은 오늘날로 시월 이십이 일에 해당한다. 이때에 조사심판이 하늘 성소에서 시작되었다(단 8:14). 그것은 유예의 기간이 끝날 때 마쳐질 것이다. 표상에서 대속죄일에, 이스라엘의 모든 죄가 깨끗함을 입을때, 대제사장은 백성에게 축복을 선언하였다. 그와 같이 실제적인 심판의 날이 끝나고, 구속받은 이스라엘의 죄가 도말될 때, 하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 22:11; 시대의 대쟁투, 613)고 그분의 축복을 선포하실 것이다. 유대력의 다른 모든 규례와 같이, 대속죄일도 “사건에 있어서뿐 아니라 그 시기에 있어서도”( 시대의 대쟁투, 399) 성취될 것이다. (249.2)
 봉사
 대속죄일의 봉사는 그 시간만큼이나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이것들 역시 하나님에 의해 지정되었다. 대제사장의 직무외에도 대속죄일에 백성들이 해야 할 네 가지 명확한 임무가 있었다.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날에는 아무 일一어떤 육체 노동一도 하지 말 것은 ∙∙∙ 대속죄일이 됨이니라”(레 23:27, 28).4)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이 모든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이스라엘로부터 분리되는 형벌이 따랐다. (249.3)
 “성회”
 지상 성소와 관련된 대속죄일은 만 하루 동안의 봉사였다. 그날의 예루살렘 성회에는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빠짐없이 참석해야 했다. 그 모임은 부주의나 태만 또는 쓸모없는 교제로 시간을 보내는 때가 아니었다. 대제사장이 속죄소에서 그의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각 사람은 자백한 모든 죄가 도말되도록 열렬히 기도하며 자신의 마음을 깊이 살피는 날이었다. (249.4)
 스스로 알고 있는 죄를 자백하고 용서받지 않은 채 그날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을 소홀히 여긴다면 그 죄인은 이스라엘 중에 더 이상 계수될 수 없었다. (250.1)
 대속죄일이 고대 이스라엘에게 이처럼 중요한 날이었다면, 실제적인 마지막 심판의 날인 그 원형은 우리에게 얼마나 더 중요하겠는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 휘장 가운데로 ∙∙∙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할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 ∙∙∙ 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19-25). (250.2)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영혼을 “괴롭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팻은 “절제하며 금식하다”로 번역하였다. 대속죄일의 원형 기간 동안, 불신자들은 “노아의 때와 같이” “먹고 마시고”(마 24:37-39), 축제인 것처럼 흥겹게 떠들며 지낸다. 그들은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 5:13)는 말씀을 무시한 채, 떠들썩하게 웃으며 경박한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양심을 마비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연구할 마음을 빼앗는 오락을 즐길때에만 행복과 평안을 느낀다. 그들은 때의 심각함을 실감하지 못한다. 그들은 비유에 나오는 부자처럼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자기의 영혼에게 “영혼아, 여러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외친다. 참으로 가련한 영혼들이여! 그들의 부(富)는 결코 그들을 구원할 수 없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눅 12:18, 19, 21)하였기 때문이다. (250.3)
 사탄은 그들을 정로에서 이탈시키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다. 그들의 유일한 안전책은 바울의 기록처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 그러므로 ∙∙∙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 .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살전 5:4~8)는 것이다. “이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레 23:29)기 때문이다. (250.4)
 “화제를 드리고”
 “민족이 매일 여호와께 헌신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에 끊임없이 의지”(부조와 선지자, 352)하는 것을 상징하는, 아침과 저녁의 상번제는 대속죄일 봉사의 일부를 이루었다. 번제는 “향기로운 냄새”의 제사라고 불렸는데, 이는 몸과 혼과 영의 완전한 헌신을 나타냄으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의 향을 올렸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제사는 자신을 온전한 번제로써 내어 주신 그분께 대한 감사와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드려졌다. (250.5)
 번제의 제물은 놋 번제단에서 불태워졌다. 번제단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며, 마음의 모든 우상과 모든 악한 것들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을 표상하는 장소였다. 지금은 대속죄일의 저녁 제사 시간, 곧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고전 3:13-15) 시간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첫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한번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을 마치기 위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그분께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251.1)
 “휴식의 안식일”
 대속죄일을 올바로 준수하기 위한 또 다른 요구 사항은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레 16:29), “이날에 아무 일(‘어떤 육체 노동’, 레 23:25, 킹제임스역)도 하지 말”(레 23:28)라는 것이었다5)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 .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레 23:31, 32). 이 명령은 그것을 강조하는 표현만큼이나 중요하였으니, 하나님께서는 “이날에 누구든지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내가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레 23:30)라고 명하셨다. 모든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과 시간은 그날의 봉사에 집중되어 있었다. 분열된 마음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대속죄일은 온 힘을 다하여 바치는 온전하고도 진심 어린 헌신만을 요구하였다. (251.2)
 원형적인 대속죄일이요, 실제적인 심판의 날인 이때에, 우리는 한가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영혼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서, 그분의 사업과 조화되지 않는 어떤 기업에 종사한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지엽적인 문제로 바쁜 자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와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R&H, 1. 21. 1890.). “하나님의 백성임을 공언하는 자들이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지엽적인 문제로 바쁠때,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잃는 모험을 그만큼 하는 것이다”(Manuscript, E. G. W.). 이것이야말로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 금하신 “육체 노동”이 아닐까? 지금 예수님께서 하늘 성소에서 당신의 자녀로 확정한 자들의 사건을 조사하고 계신다. 이러한 때에 만약 우리가 심판의 기별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기별을 전하는 일에 무관심하거나 냉담하다면, 과연 표상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보다 덜 심각한 선고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실제의 심판 날을 모형이나 “그림자”보다 덜 관심 있게 여기실 것인가? 대속죄일은 “어떤 육체 노동도 하지 말”(레 23:25, 킹제임스역)고, “쉼의 안식일”로 지켜야 할 날이었다. 그렇다면 이 속죄의 원형적인 날에 우리의 모든 시간과 수입,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힘, 종류를 막론한 우리의 모든 노동을,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촉진시키고 마치는 유일한 목적에 전념하여야 하지 않을까? (2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