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교가 여러 가지 심각한 생애의 시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는다. (183.1)
 지난 가을, 필자의 학생 부부가 추수 감사절에 고향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얼음이 언 길에서 미끄러졌다. 정신을 수습한 그들은 어깨를 맞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불과 수마일 거리 밖에서 다가오던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더니 그들의 소형차를 들이받아 젊은 아내를 죽이고 말았다. (184.1)
 3주 전에는 필자가 출석하는 교회의 네살 먹은 귀여운 아이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같은 시기에 필자가 봉직하는 학교의 한 여학생의 약혼자가 결혼 날자를 두 달 앞두고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184.2)
 우리는 동 아프리카에서 그리스도교 부족이 대량으로 학살당한 이야기, 중앙 아메리카에서 선교하는 수녀들이 강간을 당한 이야기, 아시아에서 복음주의 침례교도들이 투옥되 었다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다. 여러분 자신도 진실한 신앙인이면서도 질병이나 이혼 또는 죽음, 그 밖의 뼈아픈 실망으로 고통을 치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184.3)
 우리들 가운데 가장 강인한 신앙의 소유자들도 때로는 정말 백마의 기사가 있어 세상 일이 달라지는 것인지, 정말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보살피고 계시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박국같은 영감받은 선지자도 다음과 같이 탄식하고 있다. (184.4)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합 1:2, 3).
(184.5)
 비참하리 만큼 낙담스러운 순간에 선한 임금 다윗도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흐느껴 울었다(시 22:1). (184.6)
 유명한 저술가이며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인 C. S. 루이스(Lewis) 교수도 그의 아내가 암으로 사망한 후 동일한 낙망을 체험하였다. 그의 가슴은 고뇌로 인해 터질 것 같은데 하늘은 언제나와 같이 조용하고 높기만 하였으며 그 문은 이중으로 잠겨있는 것 같았다. 낙담한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184.7)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이것은 가장 불안한 징후의 하나이다. 네가 행복할 때, 너무 행복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 너무 행복한 나머지 하나님의 너에 대한 요구가 간섭같이 들릴 때 그때 만약 그대가 하나님을 기억하고∙∙∙감사와 찬송으로 그분에게 돌아간다면 그대는 쌍수로 환영을 받을 것이다. 아니면 그렇게라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온갖 도움이 허지로 끝난 절박한 처지에 그의 도움이 필요하여 그에게로 찾아가 보라. 도대체 무엇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문은 면전에서 탕소리를 내며 닫히고 안으로부터 자물쇠를 걸고 또 이중으로 자물쇠를 거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러고는 침묵이다. 차라리 돌아서는 것이 상책이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적막함만이 더욱 두드러진다. 창문들에는 한줄기 빛도 비치지/않는다.5
(184.8)
 인간의 고통과 일곱 인
 만약 하나님이 책임자라면 왜 그는 무엇인가를 행하시지 않는 것일까? 그가 진실로 우리를 돌보고 계시다면, 왜 그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시는가? (184.9)
 일곱 인의 배경에서 이같이 진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오히려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성전 장면의 도입부적인 소개에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이 보였다. 첫째 인을 뗄때는, 땅 위를 달려나가면서 사람들에게 기쁨과 보증을 가져다 주고 믿는 자들을 전쟁과 기근과 역병의 기사들로부터 보호하는 그리스도교의 모습이 소개되었다. (184.10)
 그러나,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는 순교당한 “영혼들”“제단” 아래서 고통 속에 울부짖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계 6:9, 10). (185.1)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천사들이 노래하는 요한계시록 4, 5장의 보좌 장면과 영혼들이 “언제까지이니까?”라고 소리치는 6장의 제단 장면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185.2)
 제단 아래에 있는 영혼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9절) 마치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처럼 희생된 진실한 순교자들을 대표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이 책임자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보살피고 계신다면 어찌하여 그분은 그들의 기도를 응답치 않으시는가? 그들이야말로 기도에 응답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185.3)
 물론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셨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또 언제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순교자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17)라고 말씀하셨다. (185.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순교자들을 위해 대단히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모든 걱정들을 당신의 손에 맡겨 두고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잠시 동안 쉬라”(계 6:11)고 하셨다. 그리고, 보배로운 순교자들 모두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어 입게 하셨다. (185.5)
 예수님은 그의 한 비유에서 우리에게 교훈하시기를 하늘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흰옷을 예복으로 입어야 한다고 하셨다(마 22:1~14), 흰옷을 입는 것과 백마를 타는 것은 유사한 것이다. 흰옷은 예수님의 순결과 의를 대표하며,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것을 받고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 (185.6)
 순교자들은 흰옷을 받을 때 그 밖의 모든 것도 함께 받는다. 즉 하나님의 왕국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영원히 누리는 영생과 건강과 기쁨이 그것이다.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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