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12 장  안식일, 시간 속의 지성소
 1981년 나는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안식일, 근대인을 위한 그 의미』(The Sabbath, It's Meaning for Modern Man)를 『안식일, 시간 속의 지성소』란 이름으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그때 삼육대학교와 한국재림교회는 이른바 “시골 운동”의 열정으로 한바탕 몸살을 치르고 있었다. 나는 이 운동에 비판적인 사람의 하나였다. “재림교회사,” “기독교회사” 강의를 통하여 성서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적 관점에서 그리고 선교 신학적 관점에서 이 운동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운동에 대한 나의 비판적인 논평은 주로 “안식일 신학”을 통하여 나왔다. 그리고 재림신학을 통하여 나왔다. 안식일과 재림 신앙의 시간적 요소를 강조하는 문맥에서 “시골 운동”의 지나치게 공간 중심적인 신앙 사고를 비판하였다. 나의 이 같은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의 하나가 바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안식일』이었다. 내가 이 책을 번역하여 출판할 때 부제를 “시간 속의 지성소”로 정한 배경에는 물론 이 책 자체가 “시간의 성소”적 개념을 주로 강조하고 있는 까닭도 많이 작용했지만, 그 못지 않게 “시골 운동”이 지나치게 공간 성소적 시각으로 치우쳐 있는 것에 대한 대항적 표현으로 정한 것이기도 했다. (263.1)
 헤셀의 『안식일』은 나의 안식일 신앙 인식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책이었다. 고등학교 휴학 중에 아인슈타인의 『나의 세계관』을 통해 안식일 신앙 인식에 크게 눈을 뜬 이후로 이 같은 글을 여러 해 동안 만나 보지 못했다. 나는 헤셀의 이 글을 읽은 후에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안식일 신앙에 관한 한 이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마치 여러 해 동안 비싼 보석 돌을 가지고 놀면서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여 마치 값싼 돌멩이의 하나로 알면서 가지고 있다가 갑자기 어느 날 그 진가를 알게된 여인과 같다고 할까. 나는 헤셀의 『안식일』을 읽고 나의 안식일에 대해 또 한번 대단한 긍지를 느끼게 되었다. (263.2)
 나는 헤셀의 안식일을 통해서 여러 해 동안 몰랐고 따라서 소홀히 해왔던 시간의 문제에 눈뜨게 되었다. 그 동안은 나의 생존과 관심이 너무나 공간 위주로 되어 왔던 것에 깊은 반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 문명과 역사가 너무 공간적으로, 너무 물체와 물질 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온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 나의 신 관념, 나의 천국관이 너무도 공간과 물체 위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물량 중심의 가치관이었던 것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시간이 있고 질이 있고 정신이 있었으나, 그것들이 나의 사고에서는 상당히 도외시되어 왔던 것이다. (264.1)
 나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공간과 공간의 종교와 공간의 신들과 공간적 가치관에 대하여 다소 내려다보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우상 종교와 공간 종교의 한계를 어느 정도 들여다보는 기분이 되었다. 공간적인 으시댐에 대해 다소 기죽지 않을 힘을 얻은 것 같았다.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눈에 보이는 것으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 그 무엇으로도 그를 제한 할 수 없고 그리고 절대로 제한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며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 5)하신 명령을 알만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누가 보는 것을 바라리요”(롬 8:24) 했던 사도 바울의 심정도 이해할 것 같았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후 4:18)거나,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했던 바울의 말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264.2)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물체보다 더 있는 것이다. 확실히 있는 것이다. 물체처럼 쉽게 없애지 못하게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오히려 참으로 있는 시간의 속성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물체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유사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공간과 물체에서 찾으려 했을 때 우리가 우상숭배에 빠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안에서 찾아야 한다. 영이신 하나님을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에서 찾아야 한다. (265.1)
 또한 헤셀의 『안식일』은 사람의 목표로서 거룩을 내세우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내 눈을 뜨게 하였다. 위로 오르는 생명의 운동은 거룩에 도달함으로써 그 일을 다 마친다. 사람은 배고프고 목마름으로써만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더러워지고 버림받음으로써도 죽음에 이른다. 거룩한 분의 품 밖 어둠으로 내어 쫓김으로 죽음에 이른다. 젖과 꿀이 흘러 낙원이 아니다. 공의가 강같이 흐르고 거룩이 충만해야 낙원이다. 하나님의 의도한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 거룩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265.2)
 시간과 생명
 헤셀의 말대로 “기술 문명에서는 공간의 제물을 획득하기 위하여 시간을 소비한다.” 그러나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더 많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공간을 점유하고 물질을 획득하는 인간의 능력은 시간의 경계선에서 돌연히 그 수명이 끊어진다.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전 12:6-7) 간다. 시간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시간의 끝이 진짜 끝이다. 권력의 끝이 진짜 끝이 아니다. 재물의 끝이 진짜 끝이 아니다. 그 동안 우리는 우리에게 돈이 없고 권력이 없지 우리에게 시간이야 왜 없겠느냐는 듯이 살아왔다. 소털같이 많은 것이 시간이고 재산과 명예와 권력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시간 같은 것이야 아낄 것이 무엇이랴 하는 식으로 시간을 희생시켜왔다. 그러나 이제 나의 시간이 끝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끊어져 가는 시간을 늘리고 끊어진 시간을 되돌려 놓는데 네 창고에 쌓아둔 금과 은과 옷이 그리고 권력과 명예가 무슨 소용이 되는가. 진실로 시간이 존재의 핵심이고 삶의 핵심이다. (265.3)
 공간의 왕국에서는 왕이 되는 것이 최고이다. 두목이 되어 권력을 휘둘러야 한다. 다스리는 것이 으뜸이다. 그래서 다스리는 능력을 장악하는데 골몰한 나머지 시간의 나라를 까맣게 망각한다. 시간의 나라를 상실한다. 시간의 삶과 그 열망을 상실한다. 시간의 나라의 보이지 않는 삶, 시간의 나라의 보이지 않는 가치관, 시간의 나라의 보이지 않는 보화를 상실함으로써 우리의 생명의 위험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구원이 위태롭기 시작했다. (266.1)
 시간의 나라에서는 삶의 목표를 획득에 두지 않고 존재하는데 둔다. 소유하는데 두지 않고 사는 것 같이 사는 데에 둔다. 소유함에 두지 않고 주는 데에 둔다. 지배하는 것에 두지 않고 분배하고 나누며 사는데 둔다. 정복에 두지 않고 더불어 살고 맞추어 살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데 둔다. 우리의 영생과 구원은 공간을 지배하고 대상을 지배하는 것으로써 삶의 목적을 삼음으로써 그리고 공간의 물체를 차지하고 소유하는 것을 삶의 유일한 관심사로 삼으면서 위태로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창조하고 생산하는 삶의 노력에 행복이 있다. 소유에 대한 사랑에 불행이 있다. 인간의 지순한 심령들이 “이익의 샘 가에서 부수어졌다. 자신을 물질의 노예로 팔아버릴 때 인간은 샘 가에서 부수어진 하나의 그릇이 되 버린다.” 공간의 나라는 소유의 나라이고 독점의 나라이다. 나눔과 공유와 공존이 불가능한 나라이다. 내가 앉은 의자에 남이 함께 앉을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의 나라는 나눔의 나라이다. 공존과 공생의 나라이다. 시간은 만인을 동시대인으로 만든다. 시간의 나라는 모두를 자신에게 초청하여도 자리가 모자라지 않는 나라이다. 안식일의 나라에서는 좌석이 부족하여 참가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 하늘 나라는 시간의 나라이다. 안식일의 나라이다. 무한히 함께 나누고 함께 살 수 있는 나라이다. (266.2)
 이교의 신들은 공간의 신들이다. 그들은 영이 아니다. 물체의 신이고 물질의 신이다. 물체이고 물질이다. 지배와 소유의 신이다. 그들은 역사 안에 있지 않고 자연 안에 있다. 공간 안에 있다. 물체 안에 물체로 있다. 유한한 존재이다. 공간에 제한되어 있고 공간과 물체에 붙어사는 신이다. 유물론이 이러한 종교의 핵심이다. 이 종교의 신들은 수탈의 신이다. 강탈의 신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시간의 하나님이시다. 영의 하나님이시다. 소유의 하나님이 아니라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존재의 하나님이시다. 공유의 하나님이시다. (267.1)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없는 것같이 업신여김을 받기 일쑤다. 그러나 사람은 시간을 무시할 수가 없다. 시간을 무시하면 어림없다. 시간의 두려운 모습이 죽음이다. 우리는 시간을 회피할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을 회피할 수 없다. 우리는 공간을 이용하여 시간을 정복 할 수도 없고 시간을 회피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시간을 달랠 수도 없다. 길은 하나 밖에 없다. 시간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시간을 영접해야 한다. 시간과 화해해야 한다.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시간을 통해서만 시간과 화해할 수 있고 시간과 더불어 살 수가 있다. (267.2)
 높은 삶은 재산을 증식하는데 있지 않고 벼슬을 높이는 데에 있지 않다. 인간의 영적인 차원은 거룩한 시간을 만나는데서 열린다. 사람의 영력은 돈이 많고 권력이 많아지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력과의 만남에서 오며 영적인 순간과의 대면에서 오는 것이다. 영적인 만남의 순간, 영적인 통찰력의 순간이야말로 사람의 사는 경계를 옮기고 사람의 사는 차원을 다르게 하는 능력이다. (268.1)
 공간과 물체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하나님이 “좋다”고 말씀하신 창조물이다. 이것들을 깎아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깎아 내리는 것이다. 문제는 공간과 물체에 대한 인간의 과공(過恭) 이다. 공간과 물체에 대한 인간의 무분별한 굴복이다. 공간과 물체를 소유하려는 인간의 병적인 탐욕이며, 인간의 노예 같은 경배이다. 시간과 공간이 모두 중요하지만 물체가 순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과 시간이 공간과 물체에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68.2)
 성경과 시간과 거룩
 성경은 공간에 대해서보다는 시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성경은 세계를 시간의 차원에서 보고 있다. 성경은 사물들과 도시들에 대해서보다는 세대들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고 있다. 나라들보다는 나라들이 흥하고 망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한다. 지리보다는 역사에 대하여 더 많이 말한다. (268.3)
 성경의 하나님은 거룩을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거룩의 출발은 시간의 거룩이다. 성경의 종교는 시간의 성화에 목표를 두고 시간의 성화로 세계의 성화를 시작하는 종교이다. (269.1)
 공간 일변도의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일정하고 반복적이다. 힌두교도들에게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같은 것이다. 같은 시간의 반복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역사가 없다. 역사의 발전을 모른다. 시간의 변화를 모른다. 그러나 성경의 시간은 모두 다른 것이다. 똑같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었으나”(창 1:13) 같은 날이 아니다. 각각 첫째 날이고, 둘째 날이고, 셋째 날이지 또 첫째 날이고 그리고 또 첫째 날이라 하지 않았다. 똑같은 두 개의 시간은 없다. 모든 시간은 각각 유일무이하며 각 순간에는 오직 하나의 독점적이며 무한히 귀중한 시간만이 주어지는 것이다. 작은 산, 큰산이 있듯이 얕은 골짜기 깊은 골짜기가 있듯이 큰 시간 깊은 시간이 있다. 백두산 같은 날, 태평양 같은 날이 있다. 보통날이 있고 오순절이 있고 대속죄일이 있고 안식일이 있다. 보통날이 성전이라면 안식일은 대성전이다. (269.2)
 성경은 시간의 거룩에 목표를 두고 있고 시간의 거룩으로 세계의 거룩을 시작하고 있다. “거룩”이란 뜻의 히브리 단어가 “카도쉬”이다. 이 고귀한 단어가 성경에서 최초로 사용된 경우는 창세기 2:3이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는 구절이다. 하나님은 이 거룩한 단어 “카도쉬”를 인간의 역사에서 최초로 사용하셨을 때 위대한 산에 대하여 사용하지 않으셨다. 위대한 제단이나 사람이나 민족이나 공간에 대하여 사용하지 않으셨다. 시간을 위하여 시간에 대하여 사용하셨다. 시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시간에 사용하셨다. 제칠일 안식일을 최초로 “거룩하게” 하셨다. (269.3)
 이것은 대단히 특별한 사건이다. 고대의 모든 종교들이 공간의 거룩, 공간 속의 거룩, 자연 속의 거룩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시간의 거룩으로 세계의 거룩을 시작한 성경의 이야기가 얼마나 놀랍고 특별한 사실인가를 알 것이다. 성경의 이 가르침은 고대의 이교적 전통으로부터의 중대한 이탈이 아닐 수 없다.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로부터 이탈한 것 같은 이탈이요 모세의 출애굽 같은 탈출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고, 바벨론에서 나온 것 같은 빗겨감이다. (2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