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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대 사람 다리우스는 누구인가?
 성서 비평가들은 메대 사람 다리우스가 성경 이외의 자료에 알려진 예가 없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메대 사람 다리우스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 비평가들은 수년 전에 벨사살에 대해서도 같은 주장을 했었다. (104.1)
 벨사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이 잘못이었듯이, 다리우스에 대한 그들의 주장도 잘못되었다. 최근에, 메대 사람 다리우스에 대한 성서의 기사를 뒷받침해 주는 새로운 정보들이 많이 알려겼다. (104.2)
 (1)「나보니더스 연대기」4 로 알려진 점토판에는 기원전 539년 10월 12일에 바벨론을 공격한 군대 사령관이 구바루(Gubaru)였다고 했다(이 공격은 고레스가 10월 29일에 개선하기 2 주(週) 반 앞서 이루어졌다). 고대의 소설가이자 역사가인 크세노폰(Xenophaon)은 바벨론을 함락할 때 고브리아스(Gobryas)라는 사람이 고레스 왕을 위해 크게 공을 세운 사실을 말하고 있다.5 고브리아스(Gobryas)는 구바루(Gubaru)의 희랍어식 표기였다. (104.3)
 (2)「나보니더스 연대기」에는 구바루(Gubaru 또는 Gobryas)가 구티움(Gutium)의 총독으로 기술되넜다. 크세노폰은 그가 총독이었다고 증언한다.6 구티움(Gutium)은 메대의 한 성(省)이었다. 따라서, 성서에서의 다리우스처럼 구바루(Gubaru)가 메대 인으로서 언급되는 것은 무방한 일이다. (104.4)
 (3)「나보니더스 연대기」는 구바루(Gubaru)가 “바벨론에서 총독들을 임명했다”고 했다. 이 기사는 다리우스가 총독들과 총리들을 임명한 사실과 잘 부합한다(단 6:1). (104.5)
 (4) 구바루는 만 1 년 동안 바벨론을 다스렸다.「나보니더스 연대기」에 의하면 구바루는 타쉬리투(Tashritu:대략적으로 지금의 10월)월에 고레스를 위해 바벨론을 정복했으며 아라삼누(Arahshamnu:지금의 11월)월에 사망했다. 많은 저자(著者)들이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구바루가 바벨론을 함락한 다음달에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104.6)
 그러나, 윌리암 H. 쉐이(William H. Shea)박사7는 이러한 주장이 잘못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입증하였다. 바벨론의 역사 기록들은 항상 엄격하게 연대순으로 배열되었다. 그런데, 이 연대기를 보면 먼저 바벨론을 정복한 날짜를 밝히고 있으며, 그 다음에는 나보니더스에 의해 바벨론으로 압령(押領)되어 온 신(神)들을 구바루가 옛 고장으로 돌려 보낸 사실을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일이 키슬리무(Kislimu)월에서 앗다루(Addaru)월 (대략 현대의 12월에서 3월)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 연대기는 이 기사에 곧 이어 “아라삼누(Arahshamnu)월(月)에 구바루가 사망했다”고 하였다. 구바루가 죽은 가을은 적어도 그가 바벨론을 정복한 가을에서 만 1 년이 지난 때였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104.7)
 (5) 구바루는 바벨론의 왕으로 다스렸다. “바벨론의 왕”이라는 칭호는 바벨론성이 바벨론 제국의 수도였을 때, 그리고 바벨론이 앗시리아 제국에 예속되었을 때, 그리고 메대一페르시아 제국 시대의 잠정 기간에 국왕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바벨론이 앗시리아 제국에 병합된 후인데도 티글랏 필레세르 3세 (Tiglath-pileser III:745~727)는 앗시리아 제국의 왕, 황제이며 “바벨론의 왕”으로 자신을 공표토록 하였다. 바벨론은 함락 후 만 1년이 되는 기원전 538년 가을에, 메대-페르시아의 황제인 고레스는 “땅들의 왕”(King of Lands)이라는 황제의 칭호에 “바벨론의 왕”이라는 칭호를 추가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바벨론의 왕, “땅들의 왕” 고레스가 되었다. (104.8)
 쉐이 교수가 밝힌 바와같이, 고레스가 538년 늦가을에 “바벨론의 왕”이라는 칭호를 취했다는 사실은 그 해 11월에 구바루가 사망한 사실과 부합한다. 고레스는 구바루가 죽기 전까지는 바벨론의 왕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았다. 이것은 구바루가 바벨론의 왕이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구바루가 왕이었다는 또 다른 증거는 그의 죽음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105.1)
 쉐이 교수의 발견에 따르면, 바벨론의 왕실 연대기 기자들은 좀처럼 왕족이 아닌 사람들의 사망한 기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나보니더스 연대기」는 구바루의 사망 사실을 기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수년 후에 “그 왕의 아내”가 죽었다고 기록했다. 소거법(消去法)의 원리를 적용한다면, 그 부인은 구바루의 부인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연대기 기자가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왕은 고레스이다. 그러나, 만약 사망한 왕비가 고레스의 왕비였다면 마땅히 고레스가 왕비의 장례식에 참여해야 하는데, 그런 기사가 없다. (105.2)
 (6) 앗시리아의 왕들이 자신들을 바벨론의 왕으로 지칭했을 때, 그들은 가끔 그들의 본명들과는 다른 제위명(帝位名)을 취했다. 조금 전에 언급한 바 있는 앗시리아의 황제 티글랏 필레세르(Tiglath-pileser)는 자신을 바벨론의 왕 풀(Pul)로 불렀다. 앗시리아의 또 다른 황제 살만에셀 5 세(Shalmaneser V:727-722 B.C.)는 자신을׳바벨론의 왕 울루라이(Ululai)로 불렀다. (105.3)
 현대에는 이와 유사한 용례들이 있다. 추기경들이 교황에 선출되면 교황의 이름을 취한다. 앙겔로 기우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丘0110으111)는 교황 요한 23세가 되었다. (105.4)
 결론 : 이러한 증거를 미루어 볼 때, 메대의 다리우스가 구티움(Gutium) 사람 구바루와 동일인이며, 그가 메대一페르시아 제국 판도 내에서 그 제국의 한 분봉왕으로서(단 6:6) 기원전 539년 가을부터 538년 가을까지 다스렸다고 결론짓는 것이 매우 사리에 합당하다고 본다. (105.5)
 참고

 1. Robert Dick Wilson, Studies in the Book of Daniel :A Discussion of the Historical Questions (New York:G.P. Putnam's Sons, The Knickerbocker Press, 1917) pp. 316,

 2. Contenau, Everyday Life, p. 62

 3. See C.F. Keil and F. Delitzsch, Biblic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27 vols. (Grand Rapids, Mich.:Wm. B. Eerdmans Publishing Co.,1959), C.F. Keil, Biblical Commentary on the Book Daniel, trans. M.G. Easton, 25:216.

 4. Pritchard, Texts, p.306. 그 연대기에 “구바루”“우그바루”로 철자되었는데 첫 두 문자의 전치(轉置) 때문인 것 같다.

 5. Xenophon, Cyropaedia, 7.5.

 6. Ibid., 4.6.£

 7. William H. Shea, “An Unrecognized Vassal King of Babylon in the Early Achaemenid Period,” 4 parts,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9, 10(January 1971 to July 1972). See also William H. Shea, “Darius the Mede and Daniel His Governor”(research paper, Andrews University, 1978).

 


다니엘이 본 짐승들(7장)은 느부갓네살의 신상(2장)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제패하는 나라들을 예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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