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11 장  안식일의 언약과 개인의 신앙 양심
 언약의 문제는 진실로 내가 네게 무엇이며 네가 나에게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다. 언약의 양심은 내가 네게 무엇이며 네가 나에게 무엇이냐의 양심이다. 언약의 양심 문제는 네가 나에게 하나님으로 부모로 자식으로 남편과 아내로 있느냐 있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내게 하나님이 계시고 부모가 계시고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없는” 존재이다. 양심 없는 존재이다. 언약의 양심의 문제는 내가 어버인가, 내가 자식인가, 그가 내게 하나님인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아니라면 우리는 “아직 아니다”의 존재이다. 덜된 존재이다. 덜된 사람이다. 막된 사람이다. “아닌” 사람이다. 양심적인 존재가 “아닌” 사람이다. 존재랄 수 없는 존재이다. 신앙 양심은 언약이 있는 사람의 양심이며 언약으로 무엇이 된 사람의 양심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언약이 있고 관계가 있으면 우리는 무엇 “이다”의 사람이고 양심이 “있는” 사람이며,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이다. 언약이 참되면 참된 사람이고 언약이 순결하면 순결한 사람이다. 언약이 흔들리면 흔들리는 사람이며 언약이 연약하면 연약한 사람이다. 언약이 더러우면 더러운 사람이다. (258.1)
 그리스도인의 개인 신앙 양심과 안식일
 그리고 언약을 자기밖에 둔 사람은 바깥 사람이다. 외면적인 사람이다. 겉치례의 사람이다. 외모로 사는 사람이다. 언약을 단체로만 존중하는 사람은 개체를 상실한 사람이다. 제 목숨으로 한평생을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헛사는 사람이다. 자신의 속마음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때문에 언약을 지키는 사람이다. 체면 때문에, 남의 눈 때문에 언약을 지키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돌로 칠까봐 두려워 언약을 지키는 사람이다. (258.2)
 그리고 언약을 육체에 새기는 삶에 대해서 앞에서 적극적인 뜻으로 말했지만 어떤 면에서 할례는 소극적인 삶, 곧 육체의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할례는 일종의 문신이다. 할례는 문신 같은 매질 자국으로 이어지는 육신의 언약을 상징한다. 마음의 결심으로 언약에 헌신한 삶이 아니라 매질로 몽둥이로 언약을 지키는 삶, 짐승같이 굶고, 배부르고, 놀고, 처벌받는 따위의 육체적 방식에 의해 언약을 지키는 삶을 상징한다. (259.1)
 남의 눈이 무서워, 남의 손가락이 무서워, 매가 무서워, 굶고 헐벗기가 두려워, 죽음이 무서워 언약을 섬기는 삶이 죄의 법이다. 죄된 본성에 알맞는 법, 육체를 다스릴 때 사용하는 법, 사악한 육신에 적합한 법이다. 곧 육체의 법이요 죄의 법이다. 바울이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비통해하는 법이다. 옛 언약의 부정적인 기능으로 지적된 법이기도 하다. (259.2)
 그리스도인의 개인 신앙 양심은 이러한 양심이 아니다. 돌에 기록한 언약의 양심도 아니고, 신체에 기록한 언약의 양심도 아니다. 문신을 새기었기 때문에 지키는 언약의 양심이 아니다. 집단, 곧 여러분의 한사람으로 여러분의 하나님과 맺은 단체 언약의 양심도 아니다.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밖에 없는 나 한 사람이 일대 일로 맺은 단독 언약의 양심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다른 한 쪽이 됨으로써 한없이 유한하고 죄 많은 육신인 내가 언약의 유일 절대의 주체가 되고 유일 절대의 인격이 된 언약의 양심이다. (259.3)
 돌판이나 신체의 한 구석에 새긴 언약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마음에”(히 8:13) 기록한 언약의 양심이다. 하나님을 내 영혼의 깊은 곳으로 모신 양심이다. 내 영혼의 가장 은밀한 깊이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 개인에게 하나님이 되고 나 개인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언약”(렘 30:22)이다. 언약의 표징으로 육체를 베지 않고 “마음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한”(렘 4:4)양심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십계명을 “사람의 마음판에 새긴”(렘 31:33) 양심이다. 이제 십계명의 법궤는 내 양심의 지성소에 있다. 내 양심의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260.1)
 따라서 남이 나에게 “주를 알라” 할 필요가 없다(히 8:14). 여러분이 나를 압박할 필요가 없다.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고 나의 어버이시고 나의 지아비인 것을 내 신체에 할례 같은 문신 자국을 남긴 매질이나 입질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돌비의 돌팔매질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피를 토하고 쏟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내가 내 “생각과 마음으로” 받아들인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260.2)
 이제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생각과 마음에서 나의 하나님이며 나의 어버이이시다. 나의 생각과 마음에서 나는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의 지어미가 되었다. 나의 언약의 삶은 남의 이목이나 남의 손가락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노릇하는 삶이 아니다. 내 생각과 마음에 있는 사랑의 동기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삶이다. 그 언약의 날에 내가 하나님을 “내 남편이라 일컬은” 이후로 그를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는” 삶이다(호 2:16). 나의 양심에서 하나님은 나의 사랑의 주체요 대상이다. 십장같이 내게 억지를 부리고 위세로 억압하는 자가 아니다. “나를 영원히 아내로 삼아 신의와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진실로 나를 맞이하는”(호 2:19) 남편 여호와이시다. (260.3)
 이것이 이른바 새 언약의 삶이다. 이것이 새 언약의 양심으로 사는 삶이다. 그리하여 새 언약의 신앙 양심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이제 아직까지 우리를 얽매었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롬 7:6).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은 영이라는 새로운 원리로, 그리고 사랑이란 새로운 원리로 하나님을 섬기는 양심이다. 의문의 묵은 것, 즉 낡은 성문률이나 규정들에 의한 타율적인 양심이 아니다. (261.1)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롬 7:23)라고 하면서 몸서리 쳤을 때 이 죄의 법은 바로 나를 얽메는 타율적인 법을 뜻했다. 의문의 묵은 법, 처벌과 두려움의 질서에 속한 육체의 법을 뜻했다.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삶에서 건져내랴” 했을 때, 그는 이 육체의 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한탄했다. 그는 진정한 언약의 관계와 자율적인 양심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눈이나 마음을 속이거나 조작하는 삶, 대가를 위해 뛰는 삶, 월급과 칭찬과 비난에 영향을 받고 있는 자신의 삶에 절망하고 있다. “오호라 한심하구나. 나는 고작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는 말인가, 이것이 어쩔 수 없는 내 본성의 한계라는 말인가”라고 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261.2)
 로마서 8장 15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양자의 영으로 살라고 말한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으로 살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개인 양심은 “무서워하는 종의 양심”이 아니라 양자의 양심, 아들의 양심, 사랑의 양심이다. 자발적인 양심이다. 그리스도인 개인 신앙 양심은 새 언약의 양심, 곧 아들의 양심이다. 신부의 양심이다. 언약의 당당한 주체의 양심이다. 사랑이 동기가 되는 적극적인 양심이다. 새 언약의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요 13:34)이다. 오직 자발적이고 내면적인 사랑만이 동기가 되는 순종의 계명이다. 안식일은 새 언약의 새 계명을 대표한다. 새 언약의 새 양심을 대표한다. 옛 언약에서 안식일은 몸의 깊은 곳에 언약을 새긴 할례 같은 양심이라고 한다면 새 언약에서 안식일은 마음의 살을 벤 양심, 개인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한 사랑의 양심이다. 옛 언약에서 안식일은 송아지나 염소의 피로 뿌려 맺은 양심(히 9:20)을 상징한다면 새 언약에서 안식일은 예수님의 “내피로 세운”(눅 22:20) 사랑의 양심을 상징한다. 새 언약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세운 언약이며, 우리가 침례로 수용한 개인적인 언약이다. 성만찬은 이 언약을 기념하고 새롭게 하는 예전이다. 안식일은 성만찬과 같다. 예수님의 피로 세운 이 사랑의 언약, 개인적인 언약을 새롭게 하는 날이다. 언약의 말씀, 언약의 천명을 새롭게 하는 날이다. 기명유신(其命維新)의 날이다. 우리의 피로써 사랑의 언약을 다짐하는 날이다. 6일 동안 때묻은 나의 신앙 양심을 어린양의 피로 다시 눈같이 순결하게 하는 날이다. (2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