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11 장  안식일의 언약과 개인의 신앙 양심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신앙 양심
 양심은 도덕적 인간의 원초적 생명력이라 말한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신앙 양심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생명력의 바탕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무서워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죄로 말미암아 자신의 신앙적 생명력인 “신앙 양심이 약해지고 더러워질까”(고전 8:7) 두렵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약한 심령이 상하게 되고”(고전 8:12) 병들어 악하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신앙 양심이 악하게 됨으로 신앙인의 심판은 확정되는 것이다. (251.1)
 사람의 신앙 양심이 더러워지고 상하여 병들게 되면 사람의 신체적 생명력도 따라서 약하고 병들게 된다. 에덴 동산에서 사람이 선악과를 유린하자 사람은 더 이상 생명나무에게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처럼 양심과 신체적 생명력은 서로 따로 따로가 아니다. (251.2)
 진실로 사람의 신앙적인 생명력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그 양심의 온전함에 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딤전 1:5), “믿음과 착한 양심”(딤전 1:19), 곧 “깨끗한 양심과 믿음의 비밀”(3:9)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생명력의 원천이다. (251.3)
 그래서 종교는 무엇보다도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있어야”(히 9:9) 한다. 종교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그 밖의 갖가지 예물과 제사의 제도를 사람들에게 마련한다해도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한다면”(히 9:14), 그 제도들은 고작 사람을 고달프게 하는 “육체의 예법”만 될 뿐이다(히 9:10). 이런 제도, 이런 제사, 이런 종교는 마땅히 “때가 되어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히 10:10). 양심의 종교, 사람을 양심상으로 온전하게 하는 종교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251.4)
 신앙하는 사람의 최대의 바램은 사도 바울처럼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행 23:1)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없는”(행 23:6) 삶을 사는 것이다(23:16). 그리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시인 윤동주의 양심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사무엘상 24장 25절에 보면 “사울의 옷자락을 벤 일로 인하여 다윗의 양심이 다윗을 때렸다”[다윗의 마음이 찔렸다]고 하였다. 종교는 “나의 양심이 나를 때리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르우벤 시냇가에서 양심을 크게 살피게”(삿 5:16)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의 악을 깨닫게”(히 10:22) 하고, “우리에게 선한 양심을 있게 해야한다”(히 13:18). 오직 신자의 “마음에 피를 뿌리는”(히 10:22) 종교만이, 구세주가 그의 피로 신자의 마음에 붓는 종교만이 신자로 하여금 “양심의 악을 깨닫고. . .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히 10:22)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 이러한 신앙만이 사람의 양심을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괴롭게” 할 수 있다. (252.1)
 나쁜 종교, 나쁜 신앙은 우리의 양심이 우리의 마음을 때리게 하지 못하는 종교이다. “마음을 강퍅케 하는 종교이다.” 강퍅한 마음을 방치하는 종교이다. 강퍅한 마음에 무력한 종교이다. 언제나 신자의 멸망은 강퍅해진 마음, 강퍅해진 양심과 함께 온다. “광야에서 유혹을 받고 반역하던 때,” 그 때 그들은 강퍅한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히 3:8).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했던 것이다”(히 4:5). “악심을 품어 하나님에게서 떨어졌던 것이다”(히 3:12). 강퍅한 양심, 나를 때리지 못하는 양심, 잎새에 이는 바람은커녕, 산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뉘우치지 못하는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진 양심”이다. 병들고 “화인 맞은 양심이다” (딤전 4:2).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양심이다. 성경이 가장 크게 경계하는 마음이요 양심이다. 그러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신앙 양심,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다짐하는 신앙 양심의 기초는 무엇인가. (252.2)
 신앙 양심의 기초와 안식일 언약
 그리스도인 신앙 양심의 기초는 하나님의 “가라사대”이다. 하나님의 단순한 “가라사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가라사대”이다. 하나님이 이 언약의 말씀이 우리에게 영혼이 되는 양심의 기초이다. 사람이 단순히 하나의 생물로서가 아니라 영적인 생명으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적인 문제가 되는 분은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그런 단순한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에게 지극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약의 주체가 되는 그런 하나님이다. 그분의 말씀, 즉 하나님이 우리의 언약의 주체가 되어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의 양심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어버이가 되고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언약의 말씀이 우리의 양심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우리의 어버이로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의 양심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253.1)
 성경에서 “가라사대” 네가 “있으라” 하신 하나님이 이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곧 언약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있게”된 것이다. 이 하나님이 창조를 끝마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창 2:2) 것이다. 우리와의 언약을 위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신” 것이었다(창 2:3). 안식일을 “하나님과 사람사이”“대대의 표징”으로 삼아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신(창 31:13)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와의 거룩한 언약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엿새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으므로” (출 20:8) 하나님이 안식일을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영원한 표징으로 삼으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일을 지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의 표로 삼게 하셨다(창 31:16-17). (253.2)
 창세기 5장 16절에서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다. 이 말씀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되는” 언약의 말씀이다. 이 언약의 말씀이 우리의 양심의 기초이다. (254.1)
 사람의 영적 생명은 이 언약의 법, 이 언약의 양심을 버릴 때 죽는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고 안식일을 범하면 죽는 생명이 모두 언약으로 탄생한 영적 생명이다. 물론 영적 생명과 육체적 생명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에덴의 사람이 선악과를 유린했을 때 사람은 더 이상 생명의 나무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254.2)
 이 언약의 법은 모세 때 십계명으로 돌판에 기록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양심은 이 십계명에 기초하였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어버이가 되고 이스라엘이 그 백성이 되는 언약의 계명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지아비가 되고 이스라엘이 그 지어미가 되는 언약의 법이었다. 서로에게 서로가 되는 지식의 법이었다. 곧 con(함께)-sience(앎)의 법이었다. 양심의 법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아는 지식의 법, 서로가 둘만의 공동지식에 이르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이 언약을 돌판에 기록하여 명심하였고 또 할례를 통하여 그 품속에 간직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신앙양심이다. (254.3)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의 양심의 기초는 언약이다. 안식일 언약이다. 선악과 언약이다. 십계명 언약이다. 할례 언약이다. 이리하여 안식일과 선악과와 십계명과 할례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심을 나타낸다. 모두 하나님의 언약의 “가라사대”이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새긴 글씨이다. 시간 속에, 음식 속에, 돌판에, 또 사람의 살에 새긴 하나님과 사람의 언약의 말이요 글씨이다. 서로가 서로를 어비이와 자녀로, 지아비와 지어미로 함께 알게 된 공동지식의 “가라사대”이다. 언약의 이 말씀과 이 글씨로, 양심의 이 말씀과 이 글씨로 “여호와 하나님은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렘 30:22). “이 언약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장가들며”(호 2:19) 이 언약으로 하나님이 “백성 아니었던 자를 향하여 너는 내 백성이라 하며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호 2:23)로 하게 되었다. (255.1)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의 양심은 무엇이 “되는” 양심이다. 즉, 양심의 문제는 to be or not to be의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이 되느냐 하는 문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이 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양심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과연 저희의 하나님이냐 아니냐의 문제이며, 저희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이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과연 하나님의 양심적인 자녀이면 그들이 진실로 살아있는 것이고, 자녀가 아니면 그들은 진실로 죽은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하나님의 자녀로 사느냐 죽는냐 하는 문제는 그들의 양심에 달린 문제였다. 그래서 선악과, 안식일, 할례 등에 관련된 처벌은 전부 죽음이었다. (255.2)
 우리는 안식일 교인이다. 안식일 교인이라는 그 이름으로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써 안식일 교인이며 신앙 양심의 백성으로써 안식일 교인이다. 안식일의 문제는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 되며,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이 되느냐 하는 언약의 문제이며 우리의 신앙 양심의 문제이다. (256.1)
 안식일 교인에게 안식일 신앙의 양심은 할례 같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신부가 결혼 초야에 신랑과 한 몸을 이루어 신체의 깊은 곳에 한 남자의 여자가 되는 언약을 간직하듯,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여자가 되는 언약을 신체의 깊은 곳에 새겼다(창 17:13). 언약의 표를 몸에 간직한 여인은 남편의 현존을 간직한 여인이며, 남편의 현존을 나타내는 여인이다. 할례를 치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간직한 백성이며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백성이다. 언약을 간직하는 것이 현존도 간직하는 것이다. 언약의 주체만이 영적으로 살아있는 존재이며, 언약이 살아있는 한 언약의 쌍방은 살아있는 것이다. 언약을 통하여 살아 있는 자가 영적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언약을 통해 자기를 나타내고 언약을 통해 상대방을 증거하는 존재가 영적 존재이다. (256.2)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약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이 계시된 하나님이다. 하나님도 언약 이외에 달리 자기 계시의 영적 수단이 없으시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뿐이다. 이 하나님이 현존하는 하나님,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즉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의 언약의 하나님이다. 언약의 주체이시다. 이 분이 야훼 또는 여호와라 이름하는 하나님이시다. 야훼 또는 여호와라는 이름은 힘을 뜻하는 엘로힘과 다른 모습의 하나님을 나타낸다. 야훼는 우리에게 어버이로, 지아비로, 구세주로 자신을 드러낸 하나님의 이름이다. 야훼는 언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래서 우리의 고백은 “엘리야”이다. 곧 “야훼가 엘로힘”이라 하는 것이 우리의 고백이다. 야훼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양심이다. (256.3)
 이점에 있어서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영적 모습은 오직 언약의 다른 표현인 인륜과 천륜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남자는 아버지로, 아들로, 남편으로, 형제로, 동생으로, 친구로, 이웃으로, 신자로 자기를 계시한다. 이 밖에는 남자의 영적 모습이 없다. 여자는 어머니로, 딸로, 아내로, 형제로, 친구와 이웃과 신자로서 자기를 계시한다. 이 밖에는 여자의 영적 모습이 없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존재 밖에 다른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지어미에게 남편은 남편으로써가 전부이다. 남편 이외의 남자를 지어미는 모른다. 진실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마 11:27)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 남편 외에 아내를 아는 자 없고, 아내 외에 남편을 아는 자 없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만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며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안다. 언약의 주체만이 언약의 상대방을 안다. 그래서 양심이다. conscience이다. 서로를 함께 아는 지식이다. (257.1)
 그리고 우리는 언약을 통해서만 언약의 상대방을 간직한다. 언약에 하나님이 계시고 언약에 어버이와 자식이 있고 남편과 아내가 있다. 언약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도 어버이도 남편도 아내도 없다. 아내가 있는 곳에 남편이 있고 아들이 있는 곳에 아버지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들을 보았으면 아버지도 본 것이라 하였다(요 14:9).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현존을 나타내는 참 아들이셨다. 아들이 되어 그 아비의 현존을 나타내지 못하는 자식은 호로 자식이다. 아비 없는 자식 같은 자식이다. 아내가 되어 그 지아비의 현존을 나타내지 못하는 여인은 부덕한 여자이다. 어버이와 자식은 하나이고 부부도 하나이다. 한쪽을 알면 나머지 한쪽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의 존재는 엄숙한 존재이며 존엄한 존재이다. (2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