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다니엘 1장 하나님과 바벨론의 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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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다니엘는 하나의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다. 팔레스틴에서 붙잡혀 온 유대의 한 청년이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고관이 되는 흥미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다니엘 1장은 단순한 하나의 이야기만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장은 다니엘와 요한계시록 전체의 기본이 되는 기별을 요약하고 있다. (15.1)
 느부갓네살은 기원전, 605년 여름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는데, 이 방문은 우호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 유대 왕국은 이집트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해 6월 1일쯤에, 느부갓네살은 유프라테스 강 북방 수마일 지점에 위치한 이집트의 전초 요새인 카르케미쉬(Carchemish)를 함락시켰다. 이 요새의 함락으로, 이집트는 사실상 시리아와 팔레스틴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다. 느부갓네살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남진(南進)을 계속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그는 기원전 601년에 이집트본토까지 공략했으나 쌍방이 막대한 피해만 입은 채 성공하지 못하였다). (15.1)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에서 유대 왕 여호야김에게 이집트와의 동맹을 파기하게 하고 신 바빌로니아와 새로운 군사 동맹을 수립하게 하였다. 그 후, 유대 왕의 충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니엘을 위시한 상류층 청년들 다수를 볼모로 취하였다. 그는 또 하나님에 대한 바벨론 신(神)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거룩한 금은 기명들의 일부를 바벨론으로 옮겨가기 위하여 골라 놓았다. (15.2)
 느부갓네살이 이러한 조처들을 완수했을때, 본국으로부터 사자가 달려와 8월 15일에 그의 아버지 바벨론 왕 나보폴랏사르(Nabopolassar)가 사망하였다는 기별을 전하였다. 사자가 이 곳까지 도착하는 데 벌써 10 일이 경과하였다. 바벨론에서는 이미 왕권 탈취의 음모가 진행 중인지도 모를 일이다. 느부갓네살은 즉각 전군에 회군령을 내리고, 자신은 먼저 소수의 호위대만을 지휘하여 사막을 가로지르는 위험한 지름길을 택하여 바벨론으로 향하였다. (15.1)
 예루살렘과 바벨론 사이의 일상 무역로는 1,500 km(1,000 마일)가 넘는 길이다. 아마도 다니엘은 회군하는 군대를 따라 이 머나먼 길을 보행으로 행군해야 했을 것이다. (15.2)
 오후의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바빌로니아의 군대들은 첫닭이 우는 새벽 미명에 기상하여 행진 준비를 서둘러, 일출과 더불어 여행을 시작했을 것이다. 이 행진은 사마리아와 갈릴리와 레바논 산맥을 차례로 지나갔다. (15.1)
 저 유명한 6월 전역(戰役)의 곳 카르케미쉬 근처에서, 바빌로니아의 군대는 오른쪽으로 행로를 바꾸어 남동향으로 내리 뻗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남진하였다. 유프라테스 강의 연안은 뛰어나게 비옥한 땅이지만 단조로운 평지였다. 이 땅의 표면 밑으로 수많은 관개용 수로들이 파헤쳐져 있었다. (15.2)


 

 (16.1)
 정부 관리들이 수시로 제방의 관리 상태를 점검하고, 수로의 권리를 둘러싼 분쟁을 수습하곤 하였다. 군대가 다니엘이 포함된 무리를 이끌고 이 지역을 통과하여 철수할 때 농민들이 밭이나 집에서 잠시 일손을 멈추고 그들의 행진 광경과 잡혀가는 포로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16.2)
 느부갓네살은 하루에 80 km를 달리는 거의 믿기 어려운 속도로 여행을 계속하여, 9월 7일에 수도 바벨론에 도착하였다. 도착해 보니, 충성스러운 조신(朝臣)들이 그를 위하여 보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의 주력 부대는 하루 평균 25 km를 행군하였다. 드디어 2 개월 후에, 다니엘은 남쪽 지평선 끝에 바벨탑이라고도 하며 에테메난키(Etemenanki) 탑이라고도 하는 그 유명한 지구랏을 중심으로 한 바벨론 도성의 윤곽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후로도 하루를 더 행군하여, 다니엘은 바벨론 도성의 거대한 성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는 유대의 다른 포로들과 함께 갇힌 신세로 다음 조처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16.3)
 그 후에 전개되는 사태들에 대하여는 다니엘 1장에 간략하게 기록되었다. 정열적이며 영매한 전제 군주였던 느부갓네살은 그가 붙잡아 온 볼모들이 바빌로니아의 “학문과 방언”에 능통할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의 여부를 테스트시켰다(4절). 그는 볼모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정부의 관리로 양성시키고자 하였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뛰어난 유자격자로 판명되어 왕립 한림원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16.4)
 각자에게 새 이름이 하사되었다.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바빌로니아의 신 벨(Bel)을 높인다는 뜻이 들어 있었다. (16.5)
 대학(한림원)에 들어간 유대의 청년들은 왕이 그들을 위해 매일 내려 보내는 “진미”가 그들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의 호의로 내려지는 음식이었지만,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신명기 14장에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규정에 어긋나는 이롭지 못한 음식물이었다. 그 식물의 대부분은 의심할 나위 없이 바벨론 신전의 우상들에게 바쳐졌던 제물들이었다. 그것을 먹는 행위는 거짓 신의 성찬에 참가하는 행위였다(출 34:15; 고전 8:7; 10:14-22 참조). (17.1)
 십대의 청년들은 대부분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것을 크게 꺼려 한다. 그러나, 청년 다니엘은 그런 감정을 극복하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결심했다(단 1:8). 그의 세 친구도 그의 이 같은 결심에 호응하였다. (17.2)
 그렇다고 해서 이 소년들이 그러한 결의 때문에 무례하게 행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대단히 예절 바른 태도로 환관장에게 단순한 채식만을 먹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환관장 아스부나스(Ashpenaz)는 이 소년들을 기꺼이 돕고 싶었으나 그 결과로 나타날 일들을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열흘 말미로 자신들을 시험해 보라고 요청하였다. 환관장은 허락하였고, 드디어 10 일후, 네 소년들의 얼굴은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들보다 더욱 윤택하게 보였다. 이 소년들은 그들이 원하는 채식을 계속 먹게 되었다. (17.3)
 다니엘과 그의 학우들이 소정의 학업을 마치게 되자,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직접 시험하였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무리 가운데서 가장 출중하였다. 그 날로, 그들은 정부의 요직을 얻어 “왕 앞에 모시어 서게” 되었다.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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