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1 장  안식일, 그 숨돌림으로의 초청
 안식일 이야기를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가?
 안식일은 인간과 세계의 광범위한 현상에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만물의 창조와 구원과 영속에 연관되어 있고, 역사의 시작과 진행과 종결에 결부되어 있다. (18.1)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우리의 안식일 이야기를 시작해야 좋은가? 아무래도 구원을 기다리는 현재적 삶의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삶을 상실한 현재의 나에게 안식일이 무엇이냐 하는 관심이 나의 기원과 종말이 안식일에 어떻게 얽혀 있는가 하는 물음보다 더 절실하고 급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18.2)
 그런데도 필자가 안식일을 배운 코스는 창조의 안식일(출 20:8-11)과 종말론적 안식일(계 14장)로 시작하였으며, 현재적 삶의 구원으로써 안식일을 갈망하고 경험하기 시작한 것은 상당한 세월을 보내고 나서이다. 지금도 안식일 신앙에 첫 열심을 내던 시절에 창조의 기념일이나 종말론적 의미로서의 안식일 계명에 열중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어딘가 성에 차지 못해 하던 그 막연한 아쉬움과 허전함의 경험을 회상할 수 있다. 삶의 현재가 등한시된다 싶은 신앙 인식 때문이었는지, 삶의 짐에 또 하나의 무게를 추가하는 듯한 안식일 주장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필자가 거쳐온 안식일 이해의 과정을 되돌아다보는 뜻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몇 개의 안식일 구절을 찾아보고자 한다. (18.3)
 출애굽기 20장 8-11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 . 제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 .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우리들 대부분은 이 성경절과 더불어 안식일 신앙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성경절이 우리의 안식일 신앙을 성격화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성경절의 하나일 것이다. (19.1)
 그런데 그 구절에는 안식일 준수 이유가 간단 명료하게 하나님이 창조 작업을 마치고 쉬셨기 때문이라고 언명되어 있다. 인간과 육축이 제칠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 목적이 사람과 육축을 쉬게 하려는데 있다는 언급이 없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쉼이 방해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과 육축에게 일을 하지 말라, 부산떨지 말라, 소란 피우지 말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식일의 쉼은 인간보다도 하나님을 위주로 하여 선포되고 있다. 6일을 살아온 피조물들의 고된 삶에 대한 배려가 뚜렷하게 눈에 띠지 않는다. (19.2)
 이 성경절에 나타난 세계와 세월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 세상이지,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롬 8:22) 세상이 아니다. 나귀나 종이나 나그네 같은 수고의 주체들이 언급되고 있기는 하지만, 어쩐지 이 구절에서는 그들이 수고의 주체들이란 느낌보다는 하나님의 “좋은” 세상에 참여하여 살아가는 열락의 주체들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19.3)
 이 성경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좋은 세상”의 창조주이시지, “무거운 짐진 자들”의 어버이가 아니시다. 이 성경절의 나날들은 거룩하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경쾌한 날들이지, 수고롭게 삶의 짐을 나르는 어둡고 힘들고 심각하고 치열한 나날들이 아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세계관과 인간관으로는 사람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갈망할 수 없다. (19.4)
 물론 우리는 이 세계가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좋은 세계”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에 동참하고 찬미하고 감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며 큰 특권인지도 깊이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계와 삶을 창세기 1장 25절의 말씀대로 간단히 “좋구나” 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창세기 1장 25절“좋구나”에 덩달아 간단히 “얼씨구” 할 수가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가 세상사를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주장을 들으면 우리 삶의 고통과 비애와 낙담과 혼란이 조롱 받는 기분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20.1)
 이 세상에는 외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그 생명과 삶이 마모되고 탕진되며 소진되어 더 이상 세상을 좋다고 찬양할 수 없어 그 찬양을 포기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가 만약 이 엄연한 현실을 외면한 채 종교를 이야기하고 안식일을 이야기한다면 이는 정녕 위선이 될 것이다. (20.2)
 종말론적 안식일론에서도 인간의 현재적 고통이 간과되었다고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20.3)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라”(계 14:9). (20.4)
 짐승과 그의 우상의 표를 거부하여 지옥의 고난을 피하라는 것이 안식일의 기별이다. 그러나 그 지옥에 가기까지의 지상 생활은 지옥이 아닌 낙원의 생활이란 말인가? 그리고 안식일은 이러한 삶에 도대체 무엇이라 하는가? (20.5)
 현대인의 진정한 고뇌는 사람이면 모두 죽는다든지 못되게 살면 죽어서 지옥 간다든지 하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삶의 현재에 경험되는 지옥 같은 삶이 문제일 것이며, 죽기까지의 삶도 정녕 살았노라고 할 수 없는 세월이라는 사실이 문제일 것이다. 살았다 하는 우리의 삶이 실상인즉 죽음과 진배없는 삶이라는 사실이 문제일 것이다. 한 걸음 물러나 사람의 생존하는 모습을 삶의 가면을 쓴 죽음이라고 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해도 삶의 현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삶이요, 허무한데 굴복하고 죽음에 종노릇하는 세월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엄존해 있다는 사실이 문제일 것이다. 종교적 논의에서 가장 분명한 사실은 이 현재적 삶이 먼저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안식일의 논의에서 가장 분명해야 할 사실은 우리의 현재적 삶이 먼저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21.1)
 제칠일은 쉬어라, 계집 종의 자식까지
 안식일을 에덴의 동쪽에서 영위되는 피조물의 수고로운 삶에 깊이 관여시키고 있는 성경절은 신명기 5장 14, 15절이다. (21.2)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제칠일은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 . 아무 일도 하지 말고. . . 네 남종이나 여종이나 네 모든 육축이나. . . 객이라도. . .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이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21.3)
 여기서는 안식일의 무대가 하나님의 티없는 창조주간이 아니라 삶을 빼앗긴 그리고 그 삶을 다시 찾은 이스라엘의 굴절된 역사이다. 제칠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명령은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의 쉼을 방해받지 않으려는데 있지 않고, 삶에 지친 이스라엘로 하여금 안식케 하려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좋은 세상에 창조된 선한 피조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 능한 팔로 해방시킨 해방 노예이다. (21.4)
 이 성경절에 나타난 6일은 하나님이 공허와 혼돈에서 세상을 창조하고 피조물들이 그 선하신 창조에 동참하는 날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의 바로와 투쟁한 날이며, 이스라엘 자손이 바로의 압제에서 신음하고 구로하던 날들이다. 제칠일은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고 쉬신 날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해방을 완성하고 쉬신 날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노동을 중지한 날일 뿐 아니라, 애굽의 압제를 벗어난 날이다. 창조를 구가하고 감사하는 날일 뿐 아니라, 구원과 자유를 구가하고 감사하는 날이다. (22.1)
 그러나 고통하는 인생과 육축의 삶을 가장 깊은 데서 파악하고 배려하는 안식일 성경절은 출애굽기 23장 12절이다. “너는 6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이 성경절에는 “쉼”이란 표현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는 것도 특징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성경절의 특징은 그 무엇보다도 안식일 쉼의 배경을 이루는 생존의 수고가 그 어떤 안식일 구절에서보다도 더 깊고 짙게 채색되어 있는데 있다 할 것이다.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