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빅토르는 아시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여러 지방의 감독들을 향하여 종교회의들을 소집해서 자신들의 관구 내에서 부활절 일요일을 하나 같이 채택하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촉구하였다. 빅토르의 호소는 효과를 거두어 여러 곳에 종교회의들이 개최되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로마의 부활절을 지지하는 결정들을 하였다. 이 때에 로마의 부활절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이도록 공헌한 요소들로서는 감독으로서의 빅토르의 위망 외에도 최소 한 두 가지의 요소들이 있다.
126 첫째는
유대인의 절기 일자(日字)만이 아니라
유대인의 방식을 쫓아 그 날에 유월절 양을 잡아 먹음으로써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고집하는 급진적인 14일주의파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당파는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안에서 까지도 상당한 분란을 야기시킨 것으로 보인다.
127 여러 감독들이 볼 때는 유대인의 절기일인 니산 14일에서부터 그 다음날인 일요일로 유월절 기념을 옮기는 일은 그들의 교회에서 유대화 경향의 재발을 방지하는 효과적인 조치의 하나였던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관된 신학적 중요성의 증대가 부활절 일요일의 채택을 장려한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후자는 실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발생되었던 바로 그 날에 그 사건들을 기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당시 대량으로 나타난
반(反) 유대(Against the Jews) 문학에 의해 입증되었듯이 교회와 회당 사이의 넓어져 가는 균열 현상이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과 또 그들의 특징적인 절기인 안식일과 유월절에서부터 갈라서도록 박차를 가했다
129는 점이다. 안식일에 관해서는 로마교회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 준수를 버리고 대신에 일요일을 지키도록 장려하기 위해 취했던 조치들을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유월절에 대해서는 로마교회가 만월일(滿月日)이 항상 춘분 이후에 떨어지도록 하고(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이 일에 무지했다) 부활절 일요일이 유대인의 유월절과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된 독자적인 달력 계산법을 도입하였다.
130 새 계산법의 반유대적 동기는 일반적으로 243년 키푸리아누스(Cyprianus)가 이미 220년 경에 히폴리투스(Hippolytus)에 의해 만들어진 로마의 부활절 일람표들 속에 나타난 착오들을 시정하기 위하여 마련한 것으로 알려진
유월절의 계산법(on the Conputation of Passover)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 계산법의 작성자는 허두에서부터 말하기를
“우리는 신령한 학문을 사랑하며, 그것을 위해 열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한 때라도 마치 어떤 날이 유월절인지를 모르고 있는듯이 유대인들을 쫓아 맹목과 어리석음 가운데서 행하거나 진리로부터 떠나 방황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저 한다”131고 하였다. 14일 유월절의 거부를 위한 반(反) 유대적동기는 그때로부터 거의 1세기가 지난 콘스탄티누스의 니케아 종교회의 서한에서도 뚜렷이 표현되었다. 그 편지에서 황제는
“입쌀스러운 유대인들과 공통적인 것이 하나도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모두가 하나 같이 단결하여 유대인들의 위증적 범죄 행동에 참가하는 일을 전적으로 피하기 위하여”132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교회가 옹호하고 있는 부활절 일요일을 만장일치로 채택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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