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부록〉안식일예배가 일요일 예배로 교체된 경위
 스트랜드의 주장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첫째로 14일 교도들과 부활절 일요일 준수자들 사이의 명백한 “성실한 관계”가 반(反) 유대 감정의 존재를 배제시키지는 못한다. 그 일례로서 순교자 유스티노스는 남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도록 강요하지 않는 안식일 준수 그리스도인들에 말하기를 “나는 우리가 그들의 안식일 준수 활동에 가담해야 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친척과 형제처럼 그들과 친교를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라”115고 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유스티노스는 안식일을 유대인의 타락의 표지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것은 “성실한 관계와 반(反) 유대 감정이” 반드시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둘째로 “반(反)유대적 감정이 안식일과 일요일의 논쟁에서는 나타났으나 14일 주의와 일요일 유월절의 논쟁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스트랜드의 주장은 정확성이 거의 없다. 우리에게 전해진 최초의 유월절 설교(170년 경에 사데의 멜리토에 의해 마련된)는 유대인에 의한 그리스도의 “특별한 살해”라는 관점에 서서 유월절을 해석하고 있다. (215.4)
너희는 이 사람을 큰절기의 때에 죽였다.
하나님이 살해되었다.
이스라엘의 왕이 이스라엘의 오른손에 죽임을 당했다.
오 무서운 살인이여!
이 유래없는 불의여!116
(216.1)
 A. T. 크라벨(Krabel)은 모든 세대의 학자들이 이 14일 주의의 문서를 읽으면서도 “이스라엘에 대해 오래 계속되어 온 혹독하고 인신공격적인 비난에117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피력하였다. 이와 비슷한 “반(反) 유대적 감정”은 소위 12사도의 교훈(제3세기 초반)에도 나타나 있다. 이 책은 권고 하기를 “우리 형제들(유대인)의 불순종 때문에 ∙∙∙ 그 백성들이 그날에 우리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자살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 금요일과 토요일에 금식해야 한다”118고 하였다. 이 문서들과 그밖의 다른 문서들은 14일 절기 주의와 일요일 유월절의 준수에 다같이 반(反)유대적 감정이 개제 되어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실상 처음부터 이 두 전통 사이에는 별다른 신학적 차이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이 두 전통 모두에서 유월절 준수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리는 절기에 이어지는 금식일로 구성되었다. 당시의 논쟁은 유월절의 신학적 의미를 둘러 싼 것이 아니라 금식 기간의 길이와 그 절기의 날짜에 관한 것이었다.120 이 두 전통은 모두 반(反) 유대적 감정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 점이야말로 같지 않은 관습을 지키면서도 초기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던 까닭을 설명하 는 유력한 단서가 된다. 유대인의 유월절 다음날인 일요일에 유월절을 준수한 그리스도인들이 14일 절기를 지키는 자들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유대인들과의 분리를 나타낼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 곧 보게 되겠지만 이 요인 이야말로 부활절 일요일 신앙의 광범위한 수용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예측됐던 사태의 진행이 제2세기 후반에 전개되면서 이 두 전통 사이의 원만했던 관계가 끝나게 되었다. 14일 주의자들은 유대인의 날짜를 옹호하였기 때문에 유월절을 지키는 방식에 있어서도 유대적인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이하였다. 이 일은 정확히 160년 대에 일어 났는데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약 170) 아폴리나리스(Apolinaris)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떤 14일 주의자들이 “무지(無知)의 소치로 주님이 니산월 14일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양을 먹었고, 그 큰 무교절의 날에(니산15) 수난을 당했다고 주장하여 분란을 일으켰다”121는 것이다. 이 급진적인 14일 절기주의자들은 유대인들과 똑같은 시간에 꼭 같은 방법으로 즉 니산월 14일에 유월절 양을 먹음으로써 구약의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14일 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의 유월절 만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2 (216.2)
 이 논쟁은 시간과 장소 양면에서 확장되어 갔다. 제3세기 초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로마의 히폴리투스는 그들의 공동체 안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급전적인 14일 주의자들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123 로마에서는 180년경 이 교회의 장로 블라스투스(Blastus)가 한 독립 교회의 지도자가 됨으로써 이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124 테르툴리아누스는 블라스투스가 “부활절을 모세의 율법에 분부된 제 14일 외의 다른 날에 지켜서는 안된다고 하여 유대주의를 숨겨 들여오려 하였다”125고 보고하고 있다. 로마의 감독 빅토르(189—198)는 로마에 있는 14일 주의자들을 성공적으로 근절시키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교회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14일 주의 전통 전체에 대하여 정면으로 공격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217.1)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빅토르는 아시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여러 지방의 감독들을 향하여 종교회의들을 소집해서 자신들의 관구 내에서 부활절 일요일을 하나 같이 채택하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촉구하였다. 빅토르의 호소는 효과를 거두어 여러 곳에 종교회의들이 개최되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로마의 부활절을 지지하는 결정들을 하였다. 이 때에 로마의 부활절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이도록 공헌한 요소들로서는 감독으로서의 빅토르의 위망 외에도 최소 한 두 가지의 요소들이 있다.126 첫째는 유대인의 절기 일자(日字)만이 아니라 유대인의 방식을 쫓아 그 날에 유월절 양을 잡아 먹음으로써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고집하는 급진적인 14일주의파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당파는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안에서 까지도 상당한 분란을 야기시킨 것으로 보인다.127 여러 감독들이 볼 때는 유대인의 절기일인 니산 14일에서부터 그 다음날인 일요일로 유월절 기념을 옮기는 일은 그들의 교회에서 유대화 경향의 재발을 방지하는 효과적인 조치의 하나였던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관된 신학적 중요성의 증대가 부활절 일요일의 채택을 장려한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후자는 실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발생되었던 바로 그 날에 그 사건들을 기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당시 대량으로 나타난 반(反) 유대(Against the Jews) 문학에 의해 입증되었듯이 교회와 회당 사이의 넓어져 가는 균열 현상이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과 또 그들의 특징적인 절기인 안식일과 유월절에서부터 갈라서도록 박차를 가했다129는 점이다. 안식일에 관해서는 로마교회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 준수를 버리고 대신에 일요일을 지키도록 장려하기 위해 취했던 조치들을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유월절에 대해서는 로마교회가 만월일(滿月日)이 항상 춘분 이후에 떨어지도록 하고(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이 일에 무지했다) 부활절 일요일이 유대인의 유월절과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된 독자적인 달력 계산법을 도입하였다.130 새 계산법의 반유대적 동기는 일반적으로 243년 키푸리아누스(Cyprianus)가 이미 220년 경에 히폴리투스(Hippolytus)에 의해 만들어진 로마의 부활절 일람표들 속에 나타난 착오들을 시정하기 위하여 마련한 것으로 알려진 유월절의 계산법(on the Conputation of Passover)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 계산법의 작성자는 허두에서부터 말하기를 “우리는 신령한 학문을 사랑하며, 그것을 위해 열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한 때라도 마치 어떤 날이 유월절인지를 모르고 있는듯이 유대인들을 쫓아 맹목과 어리석음 가운데서 행하거나 진리로부터 떠나 방황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저 한다”131고 하였다. 14일 유월절의 거부를 위한 반(反) 유대적동기는 그때로부터 거의 1세기가 지난 콘스탄티누스의 니케아 종교회의 서한에서도 뚜렷이 표현되었다. 그 편지에서 황제는 “입쌀스러운 유대인들과 공통적인 것이 하나도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모두가 하나 같이 단결하여 유대인들의 위증적 범죄 행동에 참가하는 일을 전적으로 피하기 위하여”132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교회가 옹호하고 있는 부활절 일요일을 만장일치로 채택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217.2)
 필자는 이 간략한 부기(附記)로 말미암아 14 유월절이나 일요일 유월절의 신학적 해석 모두에 반(反)유대적 감정이 참으로 존재했으며 이러한 요소들은 부활절 일요일의 채택과 광범위한 준수에 크게 공헌했다는 사실이 충분히 밝혀졌기를 희망한다. 부활절 일요일과 매주의 일요일 사이에 존재하는 긴밀한 연관성은 동일한 반(反)유대적 동기가 안식일 준수 대신에 일요일 예배의 동시적인 채택에 공헌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218.1)
 유대적인 안식일과 유월절로 오해될 수 있는 날 대신에 매주의 일요일과 부활절의 일요일을 장려하기 위하여 로마 교회가 취한 조치와 동기의 유사성에서 우리는 이 결론에 대한 뒷받침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218.2)
 로마교회의 수위(首位). A. D. 2세기의 로마교회는 주일이나 부활절 같은 새로운 절기등을 기독교 교회들에게 도입하고 장려할 만한 충분한 권위를 행사 했는가?133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은 당시 로마교회가 행사한 엄청난 권위와 영향에 대해서 추호의 의심도 남기고 있지 않다.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몇가지의 예를 들기로 하자. 익나티우스(Ignatius)는 로마인에게 보내는 서한의 허두에서 대단한 경의의 표현을 장황히 늘어 놓으면서 문안하고 있는 데 이는 그가 다른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 경의의 수식어들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다.134 그는 기록하기를 로마교회는 “로마 영토의 수부(首府)에 위치하며 하나님께 귀중한 교회며 명예와 축하와 찬양과 성공과 성화의 가치가 있고 사랑 속에 거하며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키며 아버지의 이름을 지닌 교회”135라고 하였다. (218.3)
 “사랑 안에 거한다”는 문구는 상당히 학구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사랑” 즉 아가페라는 단어는 익나티우스에 의하여 그러한 사랑이 나타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인격화의 표현으로서 반복하여 사용되었다.136 그 한 예로서 익나티우스는 트랄인(Tralians)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서머나인과 에베소인의 사랑이 너희들에게 문안한다.”(113:1)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익나티우스는 로마교회가 율법의 직책이 아니라 사랑의 직책 곧 다른 교회들의 복지에 대한 주도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137 시초에는 사랑의 직책이었던 것이 조만간에 율법의 수위(首位) 즉 법률적인 권리 주장에 기초를 둔 직책으로 달라진 것은 불행한 일이다.138 익나티우스가 로마의 사랑의 직책을 인정한 사실은 고아와 같은 그의 교회를 위하여 로마 교회에 간청하는 호소편지의 끝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호소하기를 “여러분들의 기도에서 시리아교회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 교회는 소생(小生) 대신에 하나님을 그들의 목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들의 사랑과 합하여 그 교회를 감찰하실 것입니다”(9:1)라고 하였다. 익나티우스가 그의 안디옥 교회를 아시아에 있는 가깝고도 잘 아는 교회에게 보다는 멀리 떨어져 있고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로마 교회의 사랑스러운 관심에 위탁한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익나티우스가 로마 교회에게 목회적 지도자의 역할을 기대했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219.1)
 리용의 감독 이레내우스(Irenaens)는 그의 저서 이단 반박론(175—189년경)에서 이단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저 가장 영광스러운 두 사도 곧 베드로와, 바울에 의하여 설립되고 조직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오래되었으며 전 세계에 알려진”로 교회에 의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보전되어 내려온 사도적 전통에 호소하였다. “왜냐하면 사도적 전통이 각처에 있는 저들로 말미암아 계속적으로 보존되어 왔기 때문에 대저 모든 교회는 즉 각처의 모든 신자들은 이 교회의 월등한 우월성(Potentior Principalitas)으로 인하여 이 교회와 일치하여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140 이 인용문 속에 있는 여러가지 부정확한 사실들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로마 교회는 예루살렘의 교회보다 늦게 설립되었으므로 분명히 “가장 오래된”(antiguis sima) 교회가 아니었다. 또 로마 교회는 바울에 의하여 창립되지도 않았다. 바울은 로마인에게 보내는 서한(로마서)에서 자신이 그 교회의 창설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15:20-24) 그런데도 이러한 전설적인 주장들이 로마 교회에 의해 행사된 월등한 우월성을 정당화 하기 위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 교회의 권위에 대한 현저한 본보기는 감독, 빅토르가 부활절 일요일의 채택을 강요하기 위해 취한 조치들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로마 감독은 부활절 일요일의 준수를 이행시키기 위하여 여러 지방에서 종교회의 들을 소집토록 요구하였다(196년경). 로마의 부활절을 반대했던 감독들까지라도 빅토르의 요구를 수락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예를 들어 에베소의 감독인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빅토르의 요청에 의해 그가 소집한 “수 많은” 감독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141 이것이 케네드 A. 스트란드(Kenneth A. Strand)의 주장처럼142 단지 “빅토르에 대한 예우”의 문제였는가? 폴리크라테스의 도전적인 어조(“나는 무서운 말에 겁을 먹지 않는다”)는 오히려 빅토르가 감독들에게 로마의 관습을 지지하도록 강요했다는 암시를 준다.143 이것은 아시아의 감독들이 부활절 일요일의 채택을 거부한다는 소식을 듣고 빅토르가 취한 단호한 조처에 의해서 잘 입증되고 있다. 즉 “그는(빅토르) 편지들을 보내어 그곳의 모든 형제들에게 전면적인 파문을 선포했다.”144 장 콜손(Jean Colson)은 논평하기를 “로마 감독이 주장한 파문의 보편적인 권력을 주목하자, 이것은 모든 감독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행해진 것처럼 아시아 교회들을 빅토르 자신의 친교로부터 분리시키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로마 교회〕의 친교로부터의 분리는 그의 편지를 통하여 그의 선고를 통지받은 전 세계의 모든 교회들로부터의 분리로 귀결되었던 것이다.”145 (219.2)
 빅토르의 정책의 의의는 하바드 신학 리뷰지에 게재된 죠지 라 파이아나(George La Piana)의 날카로운 논문에 의해 설득력 있게 분석되었다. 라 파이아나는 설명하기를 “그 〔빅토르〕가 그 기원이 사도들의 시대로 올라 가지만 이제는 그의 공동체의 연합과 평화 그리고 감독 수장권 승리에 거침돌이 되고 있는 하나의 전통을 담대히 파문해야 했을 때 빅토르는 전통이 하나의 살아 있는 제도의 목에 메인 연자맷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기본정책을 암암리에 공식화했다. 이것은 이윽고 로마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그 교회의 교리 및 조직과 동일시 하도록 만든 저 역사적 과정의 시초였다”146고 했다. 로마 교회가 자신의 관습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하기 위하여 취한 징계조치들의 중요성을 파악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라 파이아나가 설득력 있게 밝혀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조치들은 “신학적 토론과 철학적 사고”에 보다는 로마 교회의 힘의 증가와 강화에 훨씬 더 기여했다.147 라 파이아나는 “로마의 영향력의 이같은 팽창과정이 뚜렷한 형태를 띠기 시작하고 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이행하도록 운명 지어진 전통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빅토르 통치기간의 일이었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148 (220.1)
 위에서 말한 역사적 증거들은 로마교회가 이미 제2세기에 기독교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에 부활절 일요일과 매주의 일요일과 같은 새로운 관습을 받아 들이도록 영향을 끼칠 정도의 충분한 권위를 행사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149 우리가 알아낸 바 이 새로운 절기들이 채택된 이유들은 첫째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과의 유대를 쉽게 단절토록 해준 제국의 반(反) 유대적, 군사적, 정치적, 문학적 정책이며, 둘째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게재했던 투쟁 자체였다. 유대인들과의 분리의 경험을 동방의 교인들 보다 일찍 경험한 교인들을 가지고 있었던 로마교회가 폭넓은 권위를 행사하고 있던 일부 교회로부터 도전을 받기는 했지만 일요일과 부활절 일요일 준수의 채택을 유도하는 일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새 절기들은 제 2세기 초반에 처음으로 도입된 것 같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드리아누스(135 경)의 반유대적인 압박 통치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의 특징적인 절기인 유월절이나 안식일을 포기함으로서 유대인들과 용이하게 달라질 수가 있었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로마교회는 신학적, 실제적 방법들을 모두 사용하였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의 불충성의 표징으로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모세의 율법이라고 재해석 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유대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안식일에 금식하고, 종교적 집회는 갖지 말도록 촉구하였다. (220.2)
 5. 태양 숭배와 일요일의 기원
 앞에서 간략하게 조사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조건들은 왜 새로운 예배의 날이 안식일을 대신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지만 왜 다른 날들 중에서도(금요일은 그리스도의 수난 일인데도) 유독 일요일이 새로운 예배일로 선택 되었는지는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태양신(神) 숭배가 보급되고 그 결과 일요일이 주간의 두번째의 날에서부터 첫번째의 날로 그 위치가 격상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그럴듯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221.1)
 태양 숭배의 파급. 최근의 연구 결과로 “제2 세기 초부터 무적(無敵)의 태양신(神) 숭배가 로마와 제국의 다른 지역들에 만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50 주후 1세기 말경까지 로마인들은 로마의 여러 고전(古典)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인 그들의 “고향 땅의 태양 곧 솔 인디게스(sol indiges)”를 숭배하였다.151 그러나 제2세기에 이르러 동방 종교인 “무적의 태양신”(sol Invic ctus) 숭배가 두가지의 다른 양상으로 로마 사회에 침투해 들어왔는데 즉 사사 로이는 솔 인빅투스 미트라(sol Invictus mithra)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공공연히는 솔 인빅투스 엘라가발(sol Invictus Elagabal)의 명칭을 통한 것이었다.152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록하기를 그가 살던 당시(150~230년 경) 로마의 대 경기장(Circus Maximus)은 “주로 태양 신에게 바쳐진 것이었고 그 신전은 그 도시의 복판에 서 있었으며 그 신상(神像)은 신전의 지붕 꼭대기에 빛을 발하며 서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창공에 위치하는 물체를 지붕 아래 두어 거룩한 존경을 표하는 것이 부적합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153고 했다. 황제 하드리아누스(117—138)는 자신의 주화(貨)에서 자신을 태양과 동일시 하였으며 태양에게 콜로수스 네로니스(Collosus Neronis)를 바쳤는데 이것은 네로 황제가 자신을 머리 둘레에 일곱 가닥의 긴 빛 줄기를 두른 태양신으로 표상하여 건립한 것이었다.155 하드리아누스가 큰 신상에서 네로의 형체를 뜯어 내 버린 것은 물론이다. (221.2)
 태양 신 숭배의 보급에 공헌한 요인들은 여럿이다.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왕은 곧 태양” 이라는 부활절(Easter) 신학과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고무되어 황제를 태양 신과 동일시하여 숭배하게 된 사실이다.156 부활절의 솔 인빅투스 엘라가발 및 미트라 종교에 접촉이 있었던 로마의 군단들도 태양 종교를 서방 세계에 전파하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다른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그 당시의 종교 혼합주의적 기후였었다. 마르셀 사이몬 Marcel Simon)은 그의 깊은 통찰력이 나타난 연구에서 어떻게 주도적 위치의 신(神)들이 태양 신에게 동화되었는지를 밝혀 주고 있다.157 이 동화과정의 한 뚜렷한 본보기는 카라칼라(211—217)의 공공욕장(公共浴場:mlthraeum of the thermae)의 원주 . 的柱)에 새겨져 있는 두 명문(銘文)에 나타나 있다. 첫번째 명문은 “유일하다 제우스, 세라피스, 헬리오스(즉 태양 신), 우주의 무적(無敵)의 주재 이시다”158 라고 선포하고 있다. 이집트 신들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카라칼라 황제가 사망한 다음에는 세라피스 신(神)의 이름을 뜯어내 버리고 대신에 “미트라”의 이름이 새겨졌다.159 두번째 명문에는 “제우스, 헬리오스, 위대한 세라피스, 부(富)를 주시며 은혜롭게 들으시는 구세주, 부적의 미트라”에 바치는 봉헌문이 포함되어 있다.160 미트라가 세라피스, 헬리우스, 제우스 등과 함께 나란히 열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분명히 이 모든 신들의 구현을 뜻하여 그 이름이 제일 끝에 언급되고 있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사항이다.161 마르셀 사이몬은 설명하기를 태양 신(神) 헬리오스야말로 “그 근원이 각기 다른 여러 신들을 나로 묶고 그 신들이 태양신을 흡수하는 힘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신들을 흡수하는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요소”162라고 하였다. (222.1)
 태양 숭배의 파급과 인망은 주간의 요일 순서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7일 주간 제도는 주후 1세기에 처음으로 로마에서 채택되었다. 당시에 요일들의 명칭은 혹성의 이름을 따라 불리워졌다(지금도 그렇다). 토성(土星)의 날(토요일)은 원래 첫째 날이었다. 태양의 날(일요일)은 원래 둘째 날이었다.163 그러나 태양신 숭배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제2세기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났으니 곧 태양의 날 일요일이 주간의 제2일의 위치에서 제 1일의 위치로 부상된 것이다(다른 요일들도 모두 하루씩 앞당겨졌고 따라서 토요일은 제7일 이 되었다).164 언제 토성의 날의 수위(首位)와 위신이 태양의 날에 의하여 밀려나고 말았는지 그 정확한 때를 결정하기는 어렵다. 제2세기 중엽에 이같은 변화가 이미 발생했거나 또는 발생중이었다는 사실은 유명한 천문학자 베티우스 발렌스(Vettius Valens)에 의해서 명백히 밝혀졌다. A. D. 154년과 174년—사이에 편집된 것으로 보이는 그의 문집에서 이를 확실히 밝혀 말하기를 “이것은 요일들과 관련된 흑성의 배열 순서이다. 그 순서는 해(日), 달(月), 화성(火星), 수성(水星), 목성(木星), 금성(金星), 토성(土星)”165이라 했다. 이와 똑같은 형태의 요일 순서는 1633년 바덴 가까운 웨팅겐에서 하드리아누스로부터 콘스탄티누스 2세(d, 340)에 이르는 연대가 밝혀져 있는 주화들과 함께 발견 된 하나의 술잔에도 나타났다.166 요일의 순서에서 태양의 날이 차지한 우세한 위치에 대한 부가적 확인은 순교자 유스티노스, 테르툴리아누스, 여러명의 미트라교 신도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의 두 법령 321년 3월 3일과 7월 3일)의 진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167 (222.2)
 

육체는 안식일에 정신이 쉽을 얼음으로 비로서 안식을 취할 수 있으며 정신은 하나님안에 쉬기 때문에 쉼을 얻을 수 있다.
(223.1)
 태양의 날이 토성의 날을 밀어낸 일이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 준수를 채택한 2세기 초에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했을 터이므로 혹자는 태양의 날이 주간의 첫번째의 날로 위치가 높아진 사건이 유대인의 안식일을 버리고 꼭같은 태양의 날을 매주의 예배일로 삼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없었는가를 궁금히 생각할 것이다. (224.1)
 이 논문에서는 단지 그 명칭들만을 열거할 수 밖에 없는 여러가지 사항들이 위의 가설을 뒷바침하고 있다. 간접적인 뒷바침 사항들로는 그리스도인의 태양 숭배에 대한 교부들의 빈번한 정죄, 초기 기독교 미술과 문학이 그리스도를 표시하기 위하여 태양의 상징을 채택한 일, 기도의 방위(方位)를 예루살렘 쪽으로 부터 동방으로 이동시킨 일, 그리고 이교의 축제일인 무적의 신(神)의 탄신일이 그리스도교의 크리스마스로 채택된 것 등을 들 수가 있다.168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