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부록〉안식일예배가 일요일 예배로 교체된 경위
 비록 이같은 야고보의 주장이 여러개의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방인, 그리스도인, 유대계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의 바리새당)에게 적용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야고보가 자신의 제안과 그 설명을 통하여 재확인한 사항은 회당에서 매 안식일에 습관적으로 전파되고 읽혀지고 있던 모세 율법의 구속력 있는 특성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210.1)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에 관한 진술(행 21 — A. D. 58~60) 즉 바울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간”(행 20:16)것 그리고 그들이 “무교절”빌립보에서 지낸 데 대한 누가의 보고는 유대인의 제사 절기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규범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실지로 일어났던 사건은 특별히 시사적(示俊的)이다.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에게 수천의 개종한 유대인들이 “모두 율법에 열심이 있는”(행 21:26) 자들임을 알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압력을 가하여 바울 자신이 “율법을 준수한다”(행 21:24)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결례(缺禮)를 행하도록 하였다. 율법의 준수를 위한 이같이 깊은 공약(公約)을 미루어 생각할 때 예루살렘 교회가 가장 주요한 계명의 하나인 안식일 준수를 폐지하고 그 대신에 일요일 준수를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M. M. B 터너(Turner)는 말하기를 “그 유대교적 경건으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던 야고보와 제사장및 바리새인 출신의 보수적인 지도자들의 지도력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그 위성 교회들에서의 안식일 준수는 확고하게 되었을 것이다”66라고 하였다. (210.2)
 A.D. 70년 이후의 예루살렘 교회. AD 70년에 로마에 의하여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도 상황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역사가 에우세 비우스(Eusebius, 약 260-340)와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약 315-403)는 하드리아누스(135)의 예루살렘 포위(135) 때까지 예루살렘 교회는 계속 개종한 유대인들에 의해 구성되고 운되었으며 “율법의 문자적 준수를 고집하는 열심”으로 특징되었다고 전하였다. 사실상 팔레스타인의 전통은 유대계 기독교도들인 나사렛당을 일반적으로 예루살렘 “원시 공동사회의 직계 후손들로”68 간주했는데 에피파니우스에 의하면 제4세기까지도 “할례나 안식일과 그밖의”69 구약의 습관이 계속 준수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나타난 함축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안식일 준수의 습관은 성전파괴 이후에도 오래동안 존속했다는 것이다. (210.3)
 이것은 유대인 회당 예배에 몰래 참석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을 방지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의 랍비 단체(약 80—90)가 마련한 “그리스도인들의 저주”(Birkath-ha-Minim)라는 기도에 의해서 확증되고 있다.70 팔레스타인의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이 새로운 예배일(日)을 제정했다는 암시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역사적 자료는 예루살렘 교회를 일요일예배 의 도입을 주도한 혁신의 투사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들을 의심스럽게 만들고 있다.71 그리스도교 교회 중에서도 이 교회는 인종적으로나 전통적으로나 유대교의 종교적 전통에 가장 깊이 뿌리박힌 교회였다. (210.4)
 하드리아누스(Hatianus)의 정책. A. D. 135년 이후 유대인 세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이해에 로마 황제 하드라우누스는 바르코케바(Barkokeb, 132—135)가 시도한 제2차 유대반란을 진압하였다. 예루살렘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곳에서부터 유대인들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추방당하였다. 이때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전체에 유대적 종교의 신앙을 금지시키고 특별히 안식일 준수를 금지하였다.72 이 탄압적인 반 유대 정책은 유대인과의 분리와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을 내세우는 반(反)유대적 기독교 문학활동을 조장하였다.73 할례나 안식일 준수와 같은 유대교의 특징적인 습관은 특별히 정죄를 받았다. 이때에 일요일 준수가 로마당국에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별을 확실하게 해 주려는 시도의 하나로서 부활절 일요일(Easter Sunday)로 연관되어 도입되었다는 주장은 정황적이기는 하지만 인상적인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지적들에 대하여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겠다. (211.1)
 4. 로마와 일요일의 기원
 일요일 준수와 같은 새로운 종교적 제전(祭典)은 아마도 일찍부터 유대교와의 관계를 끊고 광범위한 인정을 받고 있었던 교회에 의해서만이 채택되고 장려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A. D. 135년 이전의 예루살렘 교회는 이러한 기준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다. 135년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그 종교적 위신을 잃었고 거의 잊혀진 바 되었다. 따라서 그 교회는 그같이 중요한 변화를 거의 주도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역할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교회는 로마제국의 수도(首都) 교회였다. 왜냐하면 로마교회에 존재하였던 중요한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조건들이 안식일을 버리고 그 대신 일요일을 채택하는 일을 허용하고 장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11.2)
 로마교회의 특성들. 대부분의 동방 교회와는 반대로 로마 교회는 이방인의 개종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교회였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롬 11:13)고 명백하게 확언하고 있다. 레오나르드 코펠트(Leonard Goppelt)가 말했듯이 그 결과는 동방교회에는 알려지지 않은, 교회와 회당 사이의 균열이 곳곳에서 발견되게 되었다는 것이다.75 교인 구성에 있 어서 이방인들이 숫자적으로 우세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일찍부터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구별시킨 중요한 요소였다. 예컨데 A. D. 64년에 네로가 방화 책임을 전부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의 구별을 명확히 하였다.76 유대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구별해 내는 과정이 팔레스틴에서 보다는 로마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유대교로부터 그리스도교를 구별시키는 과정의 일환으로서, 로마에서 새로운 예배일이 처음으로 도입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의 가능한 이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로마 제국과 유대인 사이의 관계를 간단히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211.3)
 로마에 대한 제1차 유대인 반란(66—70) 때부터 로마 당국은 유대민족에 대하여 군사, 정치, 경제상의 여러가지 탄압적인 조치들을 부과하였다. 이는 유대 민족주의의 부활로 인한 것이었는데 유대 민족주의의 부활은 메소포타미아, 사이어러 나이카, 팔레스틴, 이집트, 키프러스 등지에서의 맹렬한 봉기로 폭발되었었다. 군사적으로는, 그 당시의 역사가들에 의하면 양차의 유대전쟁(70년, 135년)으로 팔레스틴에서만 백만명이상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77 정치적으로는 베스파시아누스(69—79)가 산헤드린과 대제사장직을 폐지시켰다. 후에 하드리아누스(약 135)는 유대교의 관습 특히 안식일 준수를 불법화 시켰다.78 경제적으로는 유대인들이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시작되어 도미티아누스(81—96)와 하드리아누스(117—135)에 의해 더욱 가중된 차별세(差別稅 the fiscus judaicus) 아래서 신음해야 하였다.79 (212.1)
 이러한 억압적인 조치의 고통이 로마에서 특히 심했다는 사실을 세네카(ⓓ. 65), 페르시우스(34—62), 페트로니우스(약 66), 퀸틸리안(약 35—100), 말티엘 풀루타쿠스(46—119), 유베날(약 125), 타키투스(약 55—120) 등 자신들의 직업적인 생활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낸 작가들의 경멸적인 반 유대적인 문학적 논평에서 지적되고 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인종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모욕했고 안식일준수와 할례를 유대교의 비열한 미신들의 본보기로 조롱했다.80 (212.2)
 유대인들에 대한 로마인들의 점증하는 적개심 때문에 티투스(Titus)는 “내키지는 않았지만”(invitus) 자신이 결혼하고자 했던 유대인 여인인, 소(小) 헤롯의 누이 베레니체(Berenice)에게 로마를 떠나도록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81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유대인의 문제는 하드리아누스가 유대종교에 대해서 급진적인 탄압정책을 쓰게 됨으로써 더욱 날카로운 양상을 떠게 되었다. (212.3)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대립은 물론 탈(脫) 유대교와 유대인 경멸의 “기독교” 신학을 발전시킨 반(反)유대 문학 활동이 활발하게 되었다.82 이러한 발전의 실재적 결과는 유대인의 특징적 절기인 유월절과 안식일이 부활절 일요일과 칠일마다의 일요일로 교체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212.4)
 로마와 안식일. 이러한 발달의 진원지(震原地)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고 오직 일요일 예배만을 존중토록 하기 위하여 신학적, 사회적, 전례적(典礼的) 조치를 취한 로마교회였다고 보여진다. 신학적으로는 안식일이 보편적인 것에서 부터 일시적인 모세의 율례로 변하였다. 순교자 유스티노스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만 “그들의 저지른 배신에 합당한 처벌을 주시기 위해 그들을 분리시키는 표로 부과하신 것이라” 하였다.83 사회적으로는 안식일이 전통적인 축제와 희락의 날에서부터 금식과 우울의 날로 변형되었다. 로마 교회가 안식일 금식의 시작과 추진에서 담당한 역할은 감독 칼리스투스(Calistus, 217-222),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6), 감독 실베스터(Syvester, 314-335), 교황 인노센트 I세(40-417), 아우그스티누스(354-430), 요한 카시안(John Cassian, 360-435) 등의 역사적 언급에 의해 잘 입증되고 있다.84 토요일 금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표시로서만이 아니라 감독 실베스터에 의해서 확인되었듯이 “유태인에 대한 경멸—exsecrati one Judaeorum”과 그들의 안식일 축제에 대한 경멸—“destructiones ciborum”의 표시로서 행하여졌다.85 금식으로 야기되는 슬픔과 배고픔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과 함께 안식일을 지키러 나아가는 일”이 방지될 수 있었으며86 대신에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 준수에 더 열심히, 더 기쁘게 참여케 되었다. 전례(典礼)상으로는 안식일에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금식을 깨는 일로 간주되어 안식일은 성찬식의 거행이 금지된 비종교일로 전락했다.87 (212.5)
 모르긴 하거니와 매주일의 안식일 금식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금식했던, 연례적인 부활절성(聖)토요일의 확장이나 혹은 그 부본(副本)으로 발전 된 듯하다.88 사실상 후자는 전자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살인범 즉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을 표하는 것으로 고안되었다.89 더우기 연례적인 토요일 금식과 매주 일요일 및 부활절 일요일이 교부들에 의해 그들의 의미와 기능에 있어 상호관련이 있는 것으로 자주 제시되었던 것90을 미루어 생각해 볼 때 필시 이 모든 관습들은 어느정도 거의 같은 때에 부활절 일요일 경축의 한 부분으로 시작됐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절 일요일의 기원에 관한 때와 장소와 원인들을 확인해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일요일의 근원을 잘 밝혀 줄 것이기 때문이다. (213.1)
 로마와 부활절 일요일. 문서의 빈곤과 이 자료들이 제공하는 정보의 논쟁적 성질 때문에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하여 부활절 일요일이 처음으로 도입했는 지를 절대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단정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역사가 에우세비우스(약 260—340)는 주후 2세기에 부활절 일요일을 내세우는 로마 교회와 14일 교도의 전통으로 알려진 니산월 14일의 유월절 기념을 내세우는 아시아 교회 사이의 제 논쟁에 관해 주요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91 니케아 종교회의(325)에서 공식화된 부활절 일요일 경축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에우세비우스는 이것의 기원을 사도들에게 돌리기를 서슴치 않았다. 사실 논쟁에 대한 그의 보고를 시작하면서 그는 명백히 부활절 일요일이 “사도적 전통으로서 시작하여 현재 까지 이르러 왔다”고 확언하고 결론에 이르러서는 부활절 일요일이 “사도들로부터” 전수된 것이라는 견해의 출처를 팔레스틴 종교회의(로마의 감독 빅토르의 요구에 의해 198에 개최됨)로 밝혔다.92 (213.2)
 이와 같은 단언적 주장에 의하여 에우세비우스는 일부 학자들로 하여금 부활절 일요일의 사도적 기원을 쉽사리 받아들이도록 오도하는데 성공한 것이다.93 그러나 에우세비우스의 설명을 자세히 읽는다면 그의 진술의 편견과 부정확성을 의심할 수가 없다. 마르셀 리차드(marcel Richard)가 말했듯이 “우리는 그의 설명의 첫머리부터 그 〔에우세비우스〕가 자신이 서슴없이 ‘주의 부활의 날’이라고 부르는 부활절 일요일의 사도적 전통을 유보하면서 14일 유월절을 옛 전통이라고 규정한 것은 대단한 시대착오였다는 사실을 파악 하였다.”94 그것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이다. 왜냐하면 에우세비우스는 비록 날은 다르다 할지라도 14일 교도들까지도 기념하고 있는 유월절을 “부활의 신비”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에우세비우스가 감독 빅토르(Victor)의 요구로 소집되었던 종교회의(약 198 년)의 교령(敎令)을 요약하면서 밝힌 것이다. 이 교령(敎令)은 “주님의 부활의 신비”가 다른날에 말고 오직 주일에 경축되어야 한다고 명령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96 분명한 함축은 “부활의 신비”가 이전에는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들에 경축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진실치 못한 추론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부활절 일요일과 14일교도의 전통에 대한 최초의 언급들은 모두 유월절이 주로 주님의 부활보다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97 예컨데 테르툴리아누스(약 160—225)는 주님의 유월절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98 이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이해였다는 것은 오리게네스(Origenes)가 유월절의 뜻을 “수난”으로 잘못 해석되고 있는 현상을 논박하기 위하여 “건너다”란 뜻의 히브리어 단어 페사의 어원학적 의미에 호소한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99 (213.3)
 에우세비우스의 편견은 14일 교도의 유월절 기원을 다룰 때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그는 폴리카르포스(Polycarpos)와 이레내우스의 중요한 두편지를 소개하면서 매번 14일 교도(Quartodeciman)의 전통이 “사도적 전통”이 아니라 낡은 전통이며 “고대의 전통”이라고 말했다.100 “사도적 전통”은 오직 부활절 일요일을 지칭하기 위해 유보 되었다.101 그러나 에우세비우스가 두번이나 인용한 그 문서들 자체가 부활절 일요일의 사도적 기원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면서 14일 교도의 유월절의 사도적인 기원을 단호히 주장하고 있다.102 부활절 일요일의 사도적 기원을 옹호하는 일에 골몰했던 에우세비우스로서는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문서가 있기만 한다면 어느것 하나라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였다.103 에우세비우스가 인용했던 이레내우스의 편지의 부분은 오히려 부활절 일요일이 2세기 초에 시작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로마의 감독 빅토르를 향하여 부활절 일요일을 지키면서도 니산 14일을 지키는 자들과 화목하게 지냈던 선임자들 즉 “아니세투스(Anicetus), 피우스(Pius), 히기누스(Hyginus), 텔레포루스(Telephorus), 식스투스(Sixtus)”104 를 본받으라고 촉구한 이레내우스의 호소에서 나타나고 있다. 최초로 14일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식스투스 감독(약116—126)에 대한 이래내우스의 언급은 부활절 일요일이 그 때 즈음에 로마에서 기념되기 시작했다는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105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이같은 결론이 내려지고 있다. 예를 들어 헨리 레클 러크(Henri Leclercg)는 이레내우스의 증언에 근거하여 부활절 일요일의 기원을 로마의 식스투스 1세 치세하의 약 120년 경인 2세기 초엽으로 정하고 있다.106 칼 바우스(Karl Baus)도 기록하기를 “언제, 누가 일요일 유월절을 로마에 도입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레내우스가 로마 감독 식스투스 시대에 이 절기가 존재했다고 명백히 추정하고 있으므로 제2세 기초에 로마에서 이 제도가 성립 되었음이 틀림없다”107고 하였다. J. 제레마 이아(Jeremiah)는 말하기를 “이레내우스는 부활절이 로마에 들어온 정확한 시기를 전하고 있지는 않으나 로마의 부활절 일요일을 식스투스(C. 120)까지 소급하고 있다”108고 하였다. (214.1)
 식스투스 시대에 즈음해서 로마의 부활절 일요일이 기원했다는 가정은 부활절 논쟁이 “할례받은 감독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당한 후에 일어 났다.”고 한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의 진술에 의해서도 간접적으로 뒷바침되고 있다.109 이같은 추방령은 A D. 135년 하드리아누스가 제2차 유대 반란을 진압하고서 내린 명령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황제는 유대의 의식과 관습에 대해 과격한 압제정책을 채택했다. 그같은 압제 조치를 피하기 위하여 감독 식스투스가 매주의 안식일과 매년의 유월절과 같은 특징적인 유대교 절기를 매주의 일요일과 부활절 일요일로 대체시키는 절차를 밟았을 가능성은 높은 것이다. 몇년 후 유대계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을 대신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하게 된 새로운 헬라인 감독들에 의하여 부활절 일요일이 도입되자 그러한 변화를 수용 할 준비가 없었던 사람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215.1)
 부활절 일요일의 엄밀한 기원 년대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로마가 그 발생지라는 사실만은 학자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 실제로 어떤 학자들은 그것에 “로마의 부활절”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110 이점은 새로운 풍속을 강행시키는 일을 담당했던 로마교회의 역할 뿐만 아니라 그 후의 역사적 자료들에 의해서도 시사되는 사항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두개의 문서 즉 니케아 종교회의(325)의 공한(公翰)과 또 모든 감독들 앞으로 보낸 콘스탄티누스의 개인 서한에서 로마교회는 의심할 여지없이 일요일 준수를 옹호해 온 자신의 역사적 위치와 역할 때문에 부활절 일요일의 문제를 관철시켜야 할 첫번째의 본보기로 제시되고 있다.111 (215.2)
 부활절 일요일의 파급. 무엇이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14일 유월절을 버리고 대신에 부활절 일요일을 채택하게 했는가? 안식일의 포기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종교적 관습으로부터의 분리를 위해 정말로 필요한 조처였는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반(反) 유대 주의를 중요한 요인으로 인정한다. J. 제레마이야는 “유대주의자로부터 갈라 서려는 경향” 이야말로 로마의 교회들로 하여금 절기의 기념일을 유대인의 유월절 날로부터 그 다음날인 일요일로 변경토록 만든 주요 요인으로 보았다.112 J. B. 라이트푸트(Lightfoot)도 로마와 알렉산드리아가 “유대주의의 모양까지라도” 피하려는 의도로 부활절 일요일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113 그러나 케넷 A. 스트랜드(Kenneth AStrand)는 이러한 설명을 배척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반(反)유대 감정이 매주의 안식일과 일요일에 대한 최초의 제2 세기 언급들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14일 주의와 부활절 일요일에 관한 경우는 정반대이다. 참으로, 빅토르에게 보낸 이레내우스의 편지의 요지는 식스투스부터 아니세투스(Anicetus)에 이르는 로마 감독들이 14일 교도들(Quartodecimans)과 성의 어린 관계를 가졌다는 것”114이라고 하였다. (2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