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부록〉안식일예배가 일요일 예배로 교체된 경위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어떠한 경로를 거쳐 성서적으로 규정된 제칠일 안식일 대신에 주일 중 첫날인 일요일을 안식과 예배의 날로 지키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오래토록 논의 되어온 문제이다. 특별히 최근 몇년 동안에는 다수의 박사학위 논문을 포함한 상당 수의 연구 논문에서 이 문제가 재 검토 되었다.2 일요일 준수에 관한 성서적 근거와 역사적 근원을 확인하려는 이 새로운 노력은 사회적 경제적 압력에 의하여 일요일 준수의 존속이 위협을 받고 있는 임시에 그 준수의 타당성과 시의성(時宜性)을 재 평가하려는 요구를 잘 반영하고 있다 하겠다. (203.1)
 1. 일요일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주장들
 전통적으로 제칠일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 준수가 채택된 것은 성서의 가르침이나 그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기 보다는 교회의 권위에 기인했던 것이다. 예컨데 토마스 아퀴나스(d1274)는 이 점에 대해서 단언적으로 말하기를 “새 법에서는 주일(生日) 준수가 안식일 준수를 대신하는데, 그것은 네째 계명의 교훈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회법에 의한 것이었다”3고 했다. 이와 같은 견해가 그로부터 3세기가 지나간 때인 트렌트 종교회의 교리문답(Catechism of the Council of trent, 1566)에서 반복되었는데 거기에서는 “안식일의 종교적 의식이 주일로 옮겨진 것은 하나님의 교회에 기쁨이 되었다”4고 기술되었다. 신학적 논쟁의 시대였던 16세기의 기간에 가톨릭의 신학자들은 새로운 법과 의식(儀式)들을 도입할 수 있는 교회의 권한을 입증하기 위하여 자주 일요일 준수의 교권적 기원에 호소하였다.5 이같은 논쟁의 그 반향(反響)은 루터 교회의 역사적인 저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1530)에까지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 고백서는 밝히기를 “그들〔카톨릭〕은 안식일이 주일로 변경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십계명에 어긋난 현상이다. 그들이 저지른 일로서 안식일을 변경시킨 것보다 더 큰 일이 없다. 그들은 말하기를 십계명의 하나를 없애고 말았으니 교회의 권력이 크도다!”6 한다. (203.2)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일요일 준수가 성서시대 이후의 교권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인정하고 일요일 준수와 같은 교회법을 도입할 수 있는 교회의 권능을 용인 했으나 교회가 그 권능으로 어떤 성일(聖日)의 준수를 “구원에 필요한” 사항으로 만들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박하였다.7 칼빈도 일요일을 하나님의 제도라기 보다는 인간의 제도로 보았다.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칼빈은 이렇게 진술한다. “미신을 뒤집어 엎는 것은 마땅한 일이므로 유대인의 성일은 폐지되었다. 교회 안에 품위와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한 조처의 하나로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이른바 주일(主日)이라고 하는 날로 대체시켰다.”8 종교개혁 이후 수세기를 걸쳐 일요일의 기원과 성질에 관한 두개의 주요 주장이 서로 대립하여 열떤 논쟁을 전개해 왔다. 한쪽의 주장에 의하면 일요일은 기독교의 발생 초기에 주일의 첫날에 일어난 주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주일로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주일을 제칠일 안식일의 합법적인 대체물이라고 옹호하였는데 이렇게 되면 주일도 제칠일 안식일처럼 네째 계명에 의존하는 입장이 된다. 이같은 주장을 지지하는 신학자들과 신앙고백서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신학자들과 신앙문서들을 소개한다면:에라스무스(Erasmus, ⓓ. 1536)9, 데 오드르 베자(Theodore Besa, ⓓ. 1605)10, 제2차 스위스 신앙고백(Secon Hevet ⓓ. Confession, 1566)11, 니콜라우스 보운데(Nicolas Bownde, ⓓ. 1607)12, 안토니 우스 왈라에우스(Antonius Walaeus, ⓓ. 1639)13, 하몬 레뜨랑쥬(Hamon Lestra nge, ⓓ. 1641)14, 토르트의 종교회의(Synod of Dort, 1619)1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1647),16 지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 ⓓ. 1676)17, 존 오웬(John Owen, ⓓ. 1683)18, 헨리 윌킨슨(Henry Wilkin son, ⓓ. 1690)19, 죠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 1758)20, 윌리암 팔리(Wiliam Paley, ⓓ. 1805)21, 제임스 아우구스투스 헤세이(James Augustus Hes sey, 1860)22, 등이다. 두번째 주장은 일요일이 네째 계명과는 관계 없고 단지 교회가 제정한 법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이 견해의 옹호자들중에 어떤 이들은 일요일 기원을 사도시대로 잡고 있으나 다른 이들은 그 이후로 잡고 있다.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주로 실용적인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즉 공중예배를 위한 자유시간과 노동자들을 위한 휴식을 제공해 주기 위함이었다. 대체로 이 같은 견해에 의하여 노동과 운동과 오락을 허용하는 좀 더 자유스러운 형태의 일요일 준수 태도가 조장되었다. 이 견해의 중요한 대표자들로는 가톨릭 교회23, 루터(Luther, ⓓ. 1546)24, 칼빈(부분적으로만)(Calvin, ⓓ. 1564)25, 윌리암 틴데일(Wiliam Tyndale, ⓓ. 1536)26,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 1556)27, 존 프리도우(John Prideaux, ⓓ. 1650)28, 유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 1645)29,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 ⓓ. 1641)30, 피터 헤일린(Peter Heylyn, ⓓ. 1662)31, 존 콕세우스(John Cocceus, ⓓ. 1669)32, 존 밀톤(John Milton, ⓓ. 1674)33, 존 사무엘 스타익(John Samuel Stayk. ⓓ. 1710)34, 에드워드 에반슨(Edward Evanson, ⓓ, 1805)35, 리챠드 훼이트리(Richard Whately, ⓓ.1830)36, C. C. L. 프랭크(Franke, 1826)37, 윌리암 돔빌(Wiliam Domwille, 1850)38, 그리고 E. W. 헹슈텐베르그(Hengstenberg, ⓓ. 1869)39, 등이다. (203.3)
 일요일의 기원과 성격에 관한 토론은 아직도 끝날 줄을 모른다. 근래에 와서 대서양 양안에서 주요한 역작들이 나타나 일요일 준수의 역사적 기원과 신학적 근거에 대한 두개의 주요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설명들은 근본적으로 상술(上述)한 두 개의 역사적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J. 프랑케(Franke), F. N. 리(Lee), S. C. 모스나(mosna), 폴 K. 지위트(Paul. K. Jewett), R. T. 위드(Beckwith), W. 스콧(Scott)40 같은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일요일은 주일중 첫날에 발생한 주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제칠일 안식일을 합법적으로 대체한 성서적인 제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요일은 제 4 계명에 맞추어 준수되어야 할 그리스도인 안식일인 것이다. 둘째 견해는 일요일 준수의 성서적 근거를 최소화시키고, 일요일과 제4계명 사이의 연결을 부정하는 점에서 첫번째 견해와 다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일요일은 안식일과는 달리 안식의 날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노동 시간들의 전후에 있었던 짧막한 예배 시간으로 시작된 것이라는 것이다. 일요일이 321년에 나온 콘스탄티누스 법령의 결과로 휴식의 날이 된 것은 4세기의 일이다. 이 견해의 대표자들은 일요일의 역사적 기원을 다른 데서 찾고 있다. 비근한 예로서 윌리 로르도르프(Willy Rordorf)는 일요일 예배의 기원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출현과 관련되었고 필시 이것이 매 주일마다 정규적으로 행하는 성만찬 예식의 원형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41 (205.1)
 영국 캠브리지의 틴데일 성서연구소(Tyndale Fellowship for Biblical Research)의 후원을 받아 D. A. 카슨(Carson), 하롤드 H. P. 드레슬러(Harold H. P. Dressler), C. 로우랜드(Rowalnd), M. M. B. 터너(Turner), D. R. 드레시(Delacey), A. T. 링컨(Lincoln) R. J. 바우캄(Bauckham) 등 여러 교수들에 의하여 약 700면에 달하는 보고서로 정리된 저 기념비적인 심포지움은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제 1일 안식일 준수가 예루살렘 총회(A. D. 49) 이전부터 ∙∙∙ 시작 되었다는 주장은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주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제1일 안식일 준수가 전혀 사도 시대나 사도적 권위의 현상으로는 쉽게 이해될 수 없다는 주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42고 하였다 힐레이 H. 와드(Hiley H. Ward)의 우주시대의 일요일(Space-Age Sunday)에 의하면 일요일의 기원 연대가 다소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그는 제1차 유대전쟁(A. D. 70)과 제2차 유대전쟁(A. D. 135) 사이의 어느 시기에 일요일이 안식일의 “근 사치”로서가 아니라 “안식일의 반정립(反定立)”으로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제 1일 예배 발단의 주된 요인은 “편의성” 즉 로마 정부가 번번히 반란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억압하기 위하여 강압적인 조치를 취했을때에 그리스도인 자신들을 유대인들과 구별시켜야 했던 실제적인 필요였던 것이다. (205.2)
 지금까지의 토의 내용을 미루어 보건데 이 연구는 일요일 예배의 기원에 대한 시간과 장소와 원인의 문제를 좀 더 명백히 하려는 새로운 노력을 의미한다. 일요일 예배는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의 생존기간에 사도들의 권위에 의하여 주의 만찬예식을 빌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되었는가? 아니면 그 보다 늦게 다른 곳에서 다른 요인에 의해 시작되었는가? 이렇듯 일요일 준수의 역사적 기원을 규명하고 확인하는 노력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같은 노력에 의하여 그 기원의 원인들 뿐만 아니라 그 적용의 문제까지도 밝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5.3)
 2. 부활의 일요일과 기원
 일반적으로 부활할 즉 주일 중 첫째날에 발생한 그리스도의 사건들이 일반적으로 일찍 안식일 준수를 포기하고 대신에 일요일 예배를 제도화하게 된 기본 적인 요인으로 간주된다.44 그러면 최초의 문헌적 자료들은 이 통속적인 주장을 뒷받침 해 주고 있는가? 필자가 이 자료들을 분석해 본 바로는 이 주장은 사실보다 환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 사건 이 일어난 그날에 기념하라고 하는 명령이나 암시를 찾아볼 수 없다. 사실상 신약에서 일요일이 “부활의 날”이라고 불리웠던 일은 한번도 없고 일관하여 “주일 중 첫날”이라고 불리웠다. 신약의 어느 곳에서도 주의 만찬이 일요일에 거행되었거나 또는 주의 만찬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란 암시가 없다. ‘주께 받은 것’(고전 11:23)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바울도 그 의식은 불확정의 날이나 시간(“너희가 함께 모일때” 고전 11:18, 20, 33, 34)45에 거행되었다는 암시를 반복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떡과 포도주에 참여함으로 “주의 복음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파하는”(고전 11:26) 것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명백히 강조하고 있는 바는 주님의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이라46는 점이다. (206.1)
 그리스도가 일요일에 부활하셨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중 첫날에 안식과 예배로 그 사건을 경축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부활의 사건은 원래 안식 보다는 노동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첫째 이유는 부활이 그리스도의 지상사업의 완성을 나타내는 사건이 아니라(그리스도의 지상사업은 그리스도께서 금요일 오후에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시고 안식일에는 무덤에서 쉬심으로 끝났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새로운 봉사의 시작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창조의 첫날이 그러했듯이 그리스도의 새로운 봉사의 첫날도 안식보다는 일을 전제로 하고 있다. 둘째 이유는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말씀 자체가 “와서 나의 부활을 축하하라”는 명이 아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하라(마 28:10 ; cf 막 16:7);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침례를 주고 ∙∙∙ ”(마 28:19; cf 막 16:15); “내 형제들에게 가서”(요 20:17); “내 양을 먹이라”(요 21:17)는 분부이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들 중에 어느 하나도 일요일에 쉬거나 예배 함으로 부활을 경축하라는 암시를 주고 있지 않다. (206.2)
 신약의 시대에도 그리스도의 부활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식으로 유월절 경축일에 기념되었는가? 좀체로 그렇게 생각하기가 어렵다. 바울은 고린도인에게 “우리의 유월절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으니” 그 명절(유월절)을 지키라(고전 5:7~8)고 촉구 하였다. 유월절과 명백히 관련을 갖는 사건은 그의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건이다. 유월절과 동일한 의미가 이 절기의 경축 문제를 논의한 초창기의 동방및 서방교회의 문서들 속에서 발견되고 있다. 사도들의 서간(약 150)이라는 경외서에는 “나의 죽음 곧 유월절의 기억을 기념하라”는 권고가 나타나고 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멜리토(Melito)의 유월절에 관한 설교에 자주 언급되는 주제이기도 한데 이 설교에는 “유월”(pass over)이란 이름 자체가 “고통을 당하다”토우 파다인 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잘못 설명되고 있다.48 이레네우스(Irenaeus, ⓓ. 175 년경)는 모세가 “유월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 그리스도의 수난의 날을” 알았으며 “예언했다”고 기록했다.49 감독 갈리스투스(Calistus, ⓓ. 약 222)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개연성이 가장 높은 로마의 유월절 설교(Passover Homily)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유월절을 참 유월절 양의 희생에 대한 기념으로 해석하여 말하기를 “여기〔유대교의 유월절〕에서는 한 마리의 양이 양폐 가운데서 취해진 바 되었고 거기〔기독교의 유월절〕에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양이 취해진 바 되었다. 전자에서는 피의 표상이 있고 후자에서는 피와 영으로 가득 채워진 잔이 있다”50고 하였다. (206.3)
 마르셀 리챠드(Marcel Richard)는 이 문서들을 분석하고 나서 부활의 기억이 멜리토의 설교에서보다 로마의 유월절 설교에서 더 미미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했다.5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 약 220)와 히폴리투스(Hi ppolytus, ⓓ 약 236)도 아시아 뿐 아니라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도 A.D. 2세기 기간에는 유월절이(니산월 14일에든지 혹은 일요일에 거행되는) 주로 그리스도의 고통과 희생의 기념으로 거행되었다고 확인하고 있다.52 (207.1)
 그리스도인이 일요일을 준수했다는 최초의 명확한 언급은 바나바스(Barnabas, ⓓ 약 135)와 순교자 유스티노스(Justinos martyr, ⓓ 약 150)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다. 두 저자는 일요일 준수의 근거로 부활을 거론하고 있지만 이들은 이 이유를 일요일 준수를 위한 두개의 이유중 두번째의, 중요하지만, 가장 유력하지는 않은 이유로 취급하고 있다.53 그렇다고 해서 조만간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요일 예배의 주된 신학적 동인(動因)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54 이러한 논증들과 또 다른 논의들에서 밝혀진 사실들을 종합해서 볼때 일요일의 기원이 “안식일 다음날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에서만 발견된다”55는 주장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207.2)
 3. 예루살렘 교회와 일요일의 기원.
 예루살렘 교회의 선구자들이 제칠일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 준수를 채택했는가? 이러한 통속적인 명제는 여러가지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 그 비근한 예의 하나가 부활과 그리스도의 현출의 일부가 예루살렘에서 일요일에 이루어졌으니 아마도 일요일 예배도 이러한 사건들을 뚜렷하게 기독교적인 날과 예배로 기념코자 하는 사도들의 권위에 의하여 바로 그 도시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또 예배들의 변경은 특별한 권위를 행사하는 교회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니 그리스도교의 모(母)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그러한 변경의 유일하고도 논리적인 발생지라는 추측도 그 하나다. 뿐만 아니라 바울과 유대당(黨) 사이에 안식일과 일요일에 대한 논쟁의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 예루살렘 교회에 거하는 사도적 권위에 의해 초장기에 제1일 예배가 성립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바울은 새로운 예배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하다는 증거로 해석되고 있다.56 예루살렘 교회에 관한 초창기의 역사적 사실들은 이러한 추측들의 타당성을 입증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증거들의 객관적 분석만이 우리에게 확실한 답을 줄 것이다. (207.3)
 인종적 구성과 신학적 방향의 설정:사도행전과 그밖의 여러 유대—그리스도 교적 문서들을 미루어 보건데 예루살렘 교회의 인종적 구성과 신학적 정위(定位)는 다분히 유대적이었다고 단언할 수가 있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반복적으로 유대인들의 집단개종을 보고하고 있다(2:41; 4:4; 5:14; 6:1, 7; 9:42; 12:24; 13:43; 14:1; 17:10; 21:20). 이 개종자들 중에는 “신실한 유대인”(행 2:5, 41) “많은 제사장들”(행 6:7) 그리고 “수천명의 율법에 열심이 있는 자들”(행 21:20)이 포함 되어있다. 제이곱 제르벨(Jacob Jervel)은 이러한 언급들을 분석한 후 누가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을 위한 봉사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였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수천명씩 개종한 유대인들은 새로운 이스라엘로 생각 되지를 않고 구약시대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회복된, 옛 이스라엘의 부분으로 간주되었다(행 15:16-18; 1:6; 3:11-26).58 제르벨은 주장하기를 “유대출신 그리스도인들은 회복된 이스라엘이므로 할례와 율법은 그들의 신분에 적절한 표시가 되었다”고 했다. 개종한 유대인들은 회복된 이스라엘을 대표하며(행 15:16-15) 그들을 통하여 구원이 이방에 미친다는 누가의 교회론을 제르벨은 재 구성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나치게 단편적인 느낌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교훈과 봉사의 결정적인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60 그러나 “누가는 모세의 율법과 원시교회와 또 율법에 열심이 있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성을 부가하고 있다”61고한 제르벨의 주장은 거의 논박할 여지가 없다. 누가는 성전에 드나들며(행 2:46; 3:1; 5:12) 할례의 필요를 알고 행하며(행 11:2; 15:1, 5, 23; 16:3; 21:22; cf. 갈 2:12; 3:1; 5:12; 6:12) “매 안식일 회당에서”(행 15:21; cf 13:17) 성경의 교훈을 받는 경건한 유대인들을 토대로 하여 예루살렘 교인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참석하는 관습은 예루살렘 너머로 파급되었다. 누가는 바울이 “유대인과 헬라인과”(행 15:4, 19; cf 13:5, 14, 42, 44) 더불어 정기적으로 안식일에 회당에 모였으며 바울에게는 그같은 행위가 자신의 규례(행 17:2)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아볼로도 에베소에 갔을 때 신자들과 함께 회당에서 모였다.(행 15:24-26) (208.1)
 야고보의 역할. 초창기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교적 전통과 예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율법을 옹호하려던 야고보의 역할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행 15:1, 24; cf 갈 2:12). 예루살렘 교회에 그가 지도자로 선택된 것은 율법에 대한 그의 전설적인 고수(固守)로 말미암아 자연적으로 제사장 및 바리새인 출신의 개종자들(행 6:7; 15:5)의 명백한 지지를 받을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209.1)
 야고보가 지지를 받은 사실은 “혈연”을 강조하는 여러 유대—그리스도교적문서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62 “주님의 형제”(갈 1:19)인 야고보는 그리스도와의 혈연을 주장할 수 있었고 그래서 예루살렘 기독교 “대제사장” 역할을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가 있었다.63 이것은 유대 지향적인 새로운 기독교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의 실지가 어떠했는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예루살렘에서의 일요일 준수의 가능한 기원에 대한 질문은 구약의 법적 의무에 대한 야고보와 그 일파의 기본적 태도에 더 관련이 깊다. (209.2)
 예루살렘에서 개최된(약 49~50) 그리스도교의 첫번째 총회에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로 “많은 변론”(15:7)이 있었다. 베드로, 바울, 바나바(7, 12절) 등이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했지만 결국 최종 결정은 야고보의 말이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면제하자는 주장을 지지했으나 동시에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메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예로부터 각 성에서부터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었기”(20, 21) 때문이다. 총회에 의해 채택되고 실시된(행 15:20, 29; 21:25) 야고보의 제안의 중요성은 명백히 의식(儀 式)적인(우상의 더러운 것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로부터의 금지 8-20절) 규정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이방인들로 하여금 음식물, 그리고 종교 의식상의 부정(不淨) 문제에 대한 유대인의 조심성을 존중하게 하려는 야고보와 사도들의(행 15:20) 지나친 관심을 고려한다면 안식일 준수와 같은 더 비중있는 문제를 이들이 만장일치로 폐지할 수가 있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할례는 오직 “이방인이었던 형제들”에게만 면제 되었다.(행 15:23) 할례를 계속 실천해 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형태의 양보도 생각되지 않았다.(행 21:24; 갈 2:12; 5:12; 6:12) (209.3)
 사도들의 율령의 권위는 이 율령이 선지자(행 15:15-18)와 모세(21절)의 주장에 조화를 이룸으로써 가능해 졌다는 주장은 주목할 만한 사항이다. 이 율령의 네 규정은 레위기 17-18장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는 ‘나그네’들에게 요구했던 사항들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64 이 경우에 있어서 사도들의 율령은 모세의 율법에 기초하여 나그네들을 위해 마련된 이방인에 관한 율법의 폐지가 아니라 그 적용을 뜻하고 있다.”65 자신의 제안 설명을 위해 행한 야고보의 진술은 이 점에서 역시 중요하다. 그는 말하기를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행 15:21)고 하였다. (20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