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74편(197.1)
 73편에서 중심을 잃고

 “미끄러질 뻔한” 시인에게

   악의 결국을 보여 줌으로써

   궁지를 헤어 나오게 한

   공의의 마지막 보루인 하나님의 성소가

   74편에서 어이없이 악에 짓밟히고 불살라져

   땅에 뒤엎어지고 만다. (197.2)
 태산 너머 태산—깊어지는 의인의 궁지
 제1차 대전의 끔찍한 비극을 치른 독일의 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은 “1차 세계대전 때 죽었다.”고 고백하였다. 제2차 대전이 한창일 무렵 사랑 받던 목사 크레인(Henry Crane)은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시편의 바로 앞의 책인 욥기에서, 탈진(脫盡)한 욥은 자신이 겪는 까닭 모르는 고난을 항의하고 있다. 의인은 형통하고 악인은 망한다는 시편(1편)의 보증과는 달리 의인은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현실에 부딪쳐 “거의 실족(失足)할 뻔하였”(시편 73편 2절)던 경건한 시인은 마침내 선과 악을 결판(決判)내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16, 17절)다고 가까스로 털어 놓았다. (197.3)
 그러나 의인의 궁지(窮地)는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73편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윗 당시의 성전 음악가요 선견자였던 아삽의 자손(에스라 2장 41절)에게 돌려지고 있는 74편에서 시인은 태산 너머의 태산을 만난다. 갈수록 태산인 것이다. (198.1)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생각하소서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

   우리의 표적(標的)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시편 74편 1~3, 6~10절). (198.2)
 73편에서 중심(中心)을 잃고 “미끄러질 뻔한” 시인에게 악의 결국(結局)을 보여줌으로써 궁지를 헤어 나오게 한 공의(公儀)의 마지막 보루(쪼#)인 하나님의 성소[성전]가 74편에서 어이없이 악에 짓밟히고 불살라져 땅에 뒤엎어지고 만다. 참으로 이젠 세상이 심판관 없는 경기장이 되고 말 것인가? (200.1)
 표적도 없고, 선지자도 없고
 이러한 상황은 실제로 기원전 6세기 대제국 신바빌로니아가 유대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불사르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을 때를 묘사하고 있다. 당시의 애통(哀痛)을 장례(葬禮)의 비가 운율(qinah)에 맞춰 지은 예레미야 애가(哀歌)에 역력히 묘사되고 있어 74편의 해설이 되고 있다. (200.2)
 “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

   성막(聖幕)을 동산의 초막 같이 헐어 버리시며

   공히 처소를 훼파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 가운데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들을 멸시하셨도다 ∙∙∙

   왕과 방백들이 율법 없는 열방 가운데 있으며

   그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 도다”

   (예레미야애가 2장 5, 6, 9절). (200.3)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된 성전은 철이 지난 원두막처럼 헐렸으며, 불타 버린 성전 터에는 이교(異敎)의 표적(標的)인 깃발이 나부끼는데,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73편 9절) 다고 시인은 탄식한다. 이곳의 “표적”은 히브리어의 “오트”(òth)인데 주로 표징(標徵:sign)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 곳의 “표적”“표징”은 무엇인가? 구약의 할례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확인하는 “언약의 표징”(오트:창세기 17장 11절)이었으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민족적 장벽과 함께 폐지되었다. (갈라디아서 5장 2절; 사도행전 15장). (200.4)
 하나님 백성의 또 다른 표징은,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 (오트:표적)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출애굽기 31장 13절)는 말씀에 명시되어 있다. 그것은 포로 시대 동안 다시 확인되었고(에스겔 20장 12절) 같은 내용의 해설인 예레미야 애가에서, 시온 가운데서 “ ∙∙∙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예레미야애가 2:6)셨다고 애도하고 있어 그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주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마가복음 2장 28절)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창조와 구속의 기념일인 안식일의 고유한 기능은 주님처럼 변치 않음을 더욱 분명히 하셨다. (201.1)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된 성전은 철이 지난 원두막처럼 헐렸으며, 불타버린 성전 터에는 이교의 표적이 나부끼는데,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73편 9절)다고 시인은 탄식한다.
(201.2)
 “선지자도 다시 없다”는 시편의 의미는 예레미야의 애가에서 “선지자들은 묵시를 받지 못”(2장 9절)한다는 뜻으로 설명되어, 그 당시 참으로 암담했던 영적 현실을 탄식하고 있다. (201.3)
 어찌하여 이런 일이 ∙∙∙
 어찌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된 성전마저 이 지경이 되어야 하는가? 시인은 74편에서 히브리어의 “어찌하여”(why)인 “라마”(lamah)를 연발하고 있다. 참으로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땅 위의 성소는 죄 가운데 버려진 인간을 찾아 용서를 베푸시고 구원을 약속하러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임시 거처였다(출애굽기 25장 8절). 시간이 지나면서 성소 제도가 강화되고 성전은 화려해졌지만, 인격적인 만남을 그리워하신 하나님은 잊혀지고 버려졌다. 제도(制度)가 만남을 대신하고, 건물이 임재(臨在)를 대신했다. 성전을 빙자한 거듭된 불순종에 시달리신 하나님은(이사야 11장 22~25절). 우상의 신전처럼 되어 버린 당신의 성전을 끝내 버리고(예레미야 7장) 떠나셨다(에스겔 11장 22~25절). (202.1)
 예루살렘은 졸지에 대적에게 짓밟혔고 성전은 불탔으며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 예루살렘을 빼앗겼을 때에야 그들은 애타게 예루살렘을 찾았고, 성전이 불탔을 때에야 그들은 성전에 계셨던 하나님께 가슴에 사무친 탄원을 드렸다.(시편 137편). 화려한 성전에 서 있는 동안 사람의 마음에 머물 곳이 없으셨던 하나님은 성전이 무너진 뒤에야 참 성전이 된 인간의 가난해진 마음을 차지할 수 있으셨다. 기도는 응답되고(다니엘 9장) 소원은 이루어져 포로된 백성은 돌아왔으며 성전은 복구되었다. 그러나 성전이 재건되었을 때 인간은 또다시 하나님 대신 제도(Institution)를 의지했고 하나님은 성전에서 거처를 상실하셨다. (203.1)
 마침내 때가 차서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 “만국의 보배”(학개 2장 6~9절)로 당신의 거처에 임하셨을 때, 당신보다 더 위대해져 있는 성전을 보셨다. 그리고 호령하셨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태복음 12장 6절). 그리고 슬프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태복음 24장 2절). (203.2)
 말씀대로 서기 70년 예루살렘은 다시 무너졌으며 성전은 다시 불탔고, 백성은 다 흩어졌고 버려졌다. (203.3)
 그들은 시편의 “어찌하여”를 반복하며 예루살렘의 폐허인 “통곡의 벽”에서 아직도 하릴없는 통곡을 계속하고 있다. (2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