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요한계시록 제24장 회복된 땅
 이제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관찰하도록 초청을 받는다. 천사는 새 예루살렘 성을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계 21:9)라고 일컫고,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2)고 했다. 구약에서 지상의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위해 화려하게 단장한 신부라고 칭해졌다(참고 사 49:18; 62:5), 요한계시록 19:7-8에는 그 동일한 은유(隱喩)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되었다. 새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백성은 동일시된다. (318.1)
 새 예루살렘은 실제적인 사람들이 거주하는 실제적인 장소이다. 그 도성과 그 안에서의 삶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고,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전 2:9)고 우리에게 알려 준다. 어떠한 상상의 언어도 하늘의 실제를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하고 불충분하다. 그래서 히늘은 상징적 언어로 묘사되었다. 새 예루살렘 성은 당시의 요새화된 도성들처럼, 구약 시대의 성전처럼, 에스겔 40-48장에서는 회복된 성전으로, 그리고 회복된 에덴동산처럼(창 2-3) 묘사되었다. (318.2)
 도성의 외부 (21:9-21a)
 새 예루살렘은 “크고 높은 산”(계 21:10) 위에 위치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크고 높은 산은, 상징적으로 말해서, 바벨론의 폐허 위에 만들어진 둔덕(mound)이라고 한다. 전에 파괴된 도성의 둔덕 위에다 도성을 재건하는 것은 고대에 잘 알려진 행습이었다(참고 수 11:13; 렘 30:18). 새 예루살렘이 그 화려한 영광과 함께 솟아오르는 곳은, 말하자면, 마지막 때의 바벨론이 멸망하고 난후의 폐허 위이다.1 이 장면이 나타나는 목적은 마지막 때의 배도한 체제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319.1)
 요한은 먼저 원거리에서 그 도성을 바라보았다. 그 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하고, 그에게는 수정(crystal)같이 반짝이는 벽옥(jasper)처럼 보였다(계 21:11). 구약 시대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임재를 의미했다(출 40:54-35; 겔 43:1-5). 새 예루살렘은 열두 개의 문—사방으로 각각 세 개의 문—이 있는 높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고, 문에는 열두 천사가 있었다(계 21:12-13). 이것은 에스겔의 이상 가운데서 본 성전에 대한 기술과 흡사하다(겔 40:5; 48:30-35). 각 방향에 문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어느 방향에서든지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것은 그 도성의 우주적 범위[또는 보편적 성격]를 말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동서남북에서 와서 하나님의 나라의 식탁에 앉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3:27). 이 예언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에 제한 없이 가까이 갈수 있는 새 예루살렘에서 성취된다. (319.2)
 요한이 좀 더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성곽은 벽옥(jasper)으로 쌓였고, 도성은 정금으로 만들어졌고 투명하였는데(계 21:18), 이것은 그 도성의 광휘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묘사는 요세푸스(Josephus)가 기록한 예루살렘 성전을 연상시킨다. 이 유대인 역사가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은 금판(金版)들로 덮여 있었고, “아침에 해가 떠오를 때, 그 불과 같은 광휘를 반사하였으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마치 태양 광선 자체를 바라볼 때처럼, 그들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였다.”2 (319.3)
 새 예루살렘의 성문들은 거대한 진주들로 만들어졌다(계 21:21). 그 위에는 에스겔의 이상에서와 같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계 21:12; 겔 48:30-35). 새 예루살렘에는 보석들로 장식된 열두 개의 기초석이 있었고, 그 위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계 21:19-20). 이 기초석의 보석들은,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를 장식하던 열두 보석과 평행을 이루는데, 거기에도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출 28:17-20). 요한계시록에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고, 열두 사도는 신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를 다 합치는 것은 그 도성이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거하는 곳임을 의미한다. (320.1)
 새 예루살렘의 측정치는 하나의 완전한 정육면체를 보여 준다. 그 성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똑같이 12,000스다디온[=약 1, 500마일=약 2, 400킬로미터]이다(계 21:16). 정육면체는 12개의 변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 변의 길이가 12,000스다디온[1스다디온=약 200미터, 그러므로 12,000스다디온=약 2, 400킬로미터]이므로, 12변의 길이를 합치면 144,000스다디온이 된다. 요한계시록 7:4은 144,000이 하나님의 [인 침을 받은] 백성 전체의 수라고 한다. 새 예루살렘은 거대한 도성으로, 일찍이 지상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수용하기에 충분한 크기로 되어 있다.3 (320.2)
 새 예루살렘이 정육면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구약 성전의 지성소가 완전한 정육면체였다는 데 있다(왕상 6:20).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성전뿐만 아니라 또한 지성소의 역할을 한다. 지상 성전에서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보좌를 대표하는 언약궤가 놓여 있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는 새 예루살렘에 위치해 있다(계 22:3). 예레미야는 메시아 시대에는 사람들이 언약궤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것인데, 이 까닭은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고 일컬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렘 3:16-17). 지상 성전에서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어 있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이런 특권이 모든 구속받은 자들에게 주어진다(계 22:3-4).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7:15). (320.3)
 도성의 내부 (21:21b-27)
 요한이 그 도성의 내부로 들어갔을 때, 그가 본 것은 성의 길이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계 21:21b). 그리고 그는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21:23)고 기록하였다(참고 22:5). 이와 같이 그 성에는 밤이 없다(21:25). 이것은 바로 영광스럽게 된 시온(glorified Zion)에 대하여 이사야가 한 예언들 가운데 또 하나를 성취한 것이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주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될 ∙∙∙ 것임이라”(사 60:19-20). (321.1)
 나라들이 그 성의 빛 가운데로 다니고, 왕들이 자기의 영광을 가지고 그 성으로 들어갈 것이다(계 21:24-26). 이것 또한 이사야의 예언을 반향(反響)하는 것이다. “나라들은 네 빛으로 오고, 왕들은 비치는 네 영광으로 나오리라”(사 60:3). 회복된 땅의 나라들과 왕들은 구속받은 사람들이다(참고 계 1:6; 5:9; 7:9). 이 성의 문들은 결코 닫히지 않을 것이다(21:25).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사 60:11). 열려 있는 문들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올 수 있게 한다. (321.2)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한 단 한 가지 조건은 그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다(계 21:27). 부정한 자들과 가증한 일들을 행하고 거짓말하는 자들은 그 성에 들어갈 수 없다(참고 계 22:15). 이들은 짐승에게 경배하고(13:8) 가증한 것들과 부정한 것들로 가득한 바벨론의 잔을 마신 자들이다(17:4). 이러한 자들은 불못에서 그들의 궁극적인 끝 맞이한다(20:15; 21:8). (321.3)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함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을 우리 생애의 주인으로 삼아야 하며, 아무것도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도록 허락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예언한 바와 같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을”(사 4:3)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우리가 미래의 본향[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게 하기 위함이다. (322.1)
 강둑에서 (22:1-5)
 거룩한 도성에 관한 이상(異象)의 끝 부분에서, 요한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도성의 중심 거리로 흐르는 생명강을 보았다(계 22:1). 이것은 에덴에서 흘러나와 그 동산을 적시고 그곳을 비옥하게 만들던 강을 연상시킨다(창 2:10). 구약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의 회복된 성전에서 흘러나와 만물에게 생명을 주는 생수의 강에 대하여 자주 말한다(겔 47:1-12; 욜 3:18:슥 14:8). 이러한 예언들이 이제 성취된다. (322.2)
 새 예루살렘에 흐르는 생명강은 마지막 때의 바벨론이 있는 유프라테스 강물과 대조를 이룬다(계 17:1). 유프라테스 강은 고대 바벨론 도성을 통해서 흘렀다. 이 강변에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 되어 살면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했다(시 137). 이제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더 이상 있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의 포로 생활도 다 지나갔다. 이 생명강 가에서 세상에서 방황하던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 (322.3)
 이 생명강의 강둑에는 생명나무가 있다(계 22:2). 생명나무는 영생을 상징한다(참고 창 3:22). 죄로 인한 저주 때문에 인간은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잃어버렸으며, 그 결과로 죽음에 처하게 되었다(창 3:22-24). 이제 새 예루살렘에서 그 저주는 제거되었으며, 구속받은 자들은 이제 다시 한번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특권을 얻고,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이 누리던 영생의 선물을 받게 된다(계 22:3). (322.4)
 생명나무는 달마다 열매를 맞으며,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계 22:2) 있었다. 에스겔은 이상 가운데서 이와 동일한 나무를 보았다. “강 좌우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겔 47:12). (323.1)
 요한계시록을 읽는 많은 독자들은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이 육신의 아픔과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효력이 있는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로, 요한계시록은 죄와 악이 근절됨으로써 회복된 땅에는 질병과 사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계 21:4). 이로 인하여 육신의 치료는 전혀 필요 없게 되었다. (3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