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110편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왕
 시편 110편 (385.1)
 「다윗의 시」 (385.2)
 이 시편은 일반적으로 바벨론 포로 귀환 이전의 왕의 시로 분류된다. 이 시는 한 이스라엘 사람을 예루살렘의 신정 통치자로 임명하는 하나의 신탁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에게 모든 원수들을 무찌르는 승리를 약속하는데, 이는 야훼 하나님께서 그의 전쟁을 대신 싸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3, 5, 6절). 그 때, 이 왕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게 된다(대하 29:23; 대하 9:8 참조). 이와 같은 관점에서 시편 110편은 다윗을 한 영감받은 선지자로 지적해 주는 전형적인 왕의 시이다. 그런 경우 시는 하나의 간접적인 메시아적 예언이 된다. (386.1)
 그러나 이 시에는 우리가 여기서 직접적인메시아적 예언의 독특한 현상을 대면하게 되는 표면적이면서도 이면적인 증거가 상당히 있다. 가장 확실한 징표는 다윗의 주님(David’s Lord)에 관해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4절)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이다. 이것은 결코 다윗 계통의 어느 왕에게도 적용된 바가 없다. 다윗은 결코 제사장으로 불리어지지 않았었다. 정규적인 제사장직이 오직 레위 지파로부터 세습되고 있었던 반면 다윗 왕조는 유다 지파에서 나왔다. 이 두 직분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결코 통합되지 않았고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민 8:19; 대하 26:16~20; 삼상 13:9,14). 그러므로 시편 104편 4절의 약속은 오직 메시아만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 시의 제목이 천명하는 바인데, 그것은 그 시 전편에 다윗을 저자로, 그리고 중요한 예식의 증인으로 지정하고 있다. 우리는 이 명료한 사실에 어떤 유대 주석가들의 증언을 첨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의 선언이다. 시편 110편의 메시아적 이해가 일반적으로 고려되지 않았다면 예수께서 하신 시편 110편 1절의 인용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하나님임을 증거하는(막 12: 35~37)은 그를 듣는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시편 110편 4절에 대한 한 오래된 유대의 해석(Targum)은 예수님 당시 몇몇 랍비들이 시편 110편을 미래의 다윗 또는 메시아에 적용시켰다는 결론을 지지해 주고 있다(documentation in D. M. Hay, Glory at the Right Hand:Psalm 110 in Early Christanity, Soc. of Bib. Lit. Mon. 18[Nashiville, Tenn.:Abingdon Press, 1973), Ch. 1). (387.1)
 대법원 산헤드린 앞에서 서약하실 때, 그 사실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시키기 시작한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였다. (388.1)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 63, 64; 막 14:61, 62; 눅 22: 67~70과 비교).
(388.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국가 정치적 구세주—당시 유대의 소망이었던—임을 부인하며, 자신의 구세주 되심을 다니 엘서 7장의 인자, 그리고 시편 110편에 나오는 다윗의 주님이라는 말로 설명하셨다. 그리스도의 예지로 볼 때 이 두 예언적 구절은 메시아적이었다. 이 두 구절은 구세주를 하나님의 보좌와 그분의 이 땅에 대한 통치권에 연관시켰다. 예수께서는 이 두 그림을 하나의 투시도로 혼합시키시고, 그것을 당신의 지상 사업이 완성된 후 세상의 재판장으로 나타날 당신 자신의 미래의 신분에다 적용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시편 110편이 다윗 자신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전제 하에 당신의 해석의 바탕을 두었다. 이것은 다윗 왕이 자신 위에 두 거룩하신 야훼 하나님과 그의 주님, 메시아(‘Adoni, “나의 주님”)가 계심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근대의 해석은 이 구절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것은 나의 주권자 주님께 주시는 야훼 하나님의 신탁이다”(The Psalms by B. Zerr, O. S. B., Paulist Press, 1979). (388.3)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마 22:43) 였느냐고 꾸짖으실 때 다시 한 번 자신의 확신을 표명하셨다. 시편 110편 1절에 관한 그리스도의 언급은(마 22:43. 26:64) 이 시편 이 메시아 직분에 관한 당신 자신의 이해를 돕는 기본적인 기둥이 됨을 보여 준다. 영원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의 소망은 유대인들의 국가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소망과 불꽃 튀는 대조를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오순절 당시 시편 110편의 메시아적인 성취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다. 베드로는 의도적으로 다윗이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고, 그러므로 “주님”으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지 못하였다고 강조했다(행 2:34).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 주심을,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오른손으로∙∙∙높이”(행 2:33) 신 중 거로 설명하였다. (389.1)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389.2)
 그리하여 베드로는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봉사를 시편 110편에 나오는 예언된 제사장—왕으로 설명하였다. 기독교 첫 순교자인 스데반은 이상 가운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인자”(행 7:55.56)로 보았음을 증거하였다. 그리하여 스데반은 시편 110편의 하나님을 다니엘 7장에 나오는 메시아적인 인자와 동일시하였다. 바울 역시 시편 110편의 예언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에서(롬 8:24), 또는 당신의 대적들을 점진적으로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의 통치에서 성취된 것으로 언급하였다(고전 15:25; 엡 1:20~22). (390.1)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신조, 또는 고백은 간결하지만 그 뜻이 깊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Kurios)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이것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겠다고 한 히브리의 약속(욜 2:32; 롬 10:13)이 미리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순교자들은 주 예수님을 향한 이 실존적인 헌신을 위해 그들의 생명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머나의 폴리갑(Polycap)이 로마 관리로부터 ‘가이사가 주님이요’(Kurios Kaiser)라고 말하고 그에게 헌신하는 것이 무슨 그리 어려운 일인가?” 하는 힐책을 받았을 때, 그 노 감독은 예수님을 자기 생애의 최고의 주님으로 믿는 믿음을 고백했다. 폴리갑은 한 승리자의 순교를 당하였다. (390.2)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으로서 회개한 죄인을 구원하는 사명과 그들을 하나님께로 화해시키시는 사명을 보다 더 정교하게 다루고 있다(히 1:3; 8:1; 10:12~13; 12:2). 히브리서는 시편 110편 4절을 열 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거기에서는 시편 110편을 통틀어 33 회나 인용하며 은유하고 있다(D. M. Hay, Gloly at the Right Hand의 부록 참조). 이는 시편 110편을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으며, 주 예수님의 교회를 위한 이 시편의 뛰어난 중요성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실로 이 시편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의 영적 왕국과 의(義)에 관한 믿음의 기록을 가장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며 확증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Luther’s Preface to Psalm 110). (390.3)
 다윗의 주님께 주신 하나님의 첫 명령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 110:1)
(391.1)
 다윗 왕은 자신에게가 아니라 자신의 위대한 주님(Adoni)에게 주시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함으로써 이 예언적 시편을 시작하고 있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다윗이 자신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메시아는 다윗보다 위대하심이 틀림없다. 그분의 분명한 혈통은 다윗으로부터 올 수 없는 일이며, 오직 다윗보다 더 높으신 누군가로부터 와야만 한다”(The Christo logy of the New Testament(The Westminster Press, 1963), p. 131). 후기 유대주의는 고대하는 메시아의 국가 정치적 왕권에만 편협하게 강조함으로써 이 진리를 잊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메시아 직분에 관한 이같은 곡해를 반대하며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 36)고 주장하셨다. 예수께서는 예언적 예고 이면에 감추어진 거룩한 차원과 영적 가치를 “메시아”“다윗의 자손” 이라는 현세적 개념으로 회복시키고자 하셨다. 그러나 시편 110편은 여전히 다윗이 야훼 하나님 이외의 그가 섬기는 다른 하나님, 다시 말해서 두 거룩한 인격체를 깨닫게 되었던 하나의 놀랍고도 특이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여호수아가 여리고 가까이에서 이스라엘 군의 최고 사령관을 만나게 되었던 경험과 비교될 수 있다.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Adoni)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수 5:14). 여호수아는 그때 자신이 거룩한 땅에 서 있음을 인식하였다. 다윗 또한 그가 장차 다가올 메시아의 통치에 관한 야훼 하나님의 예고를 들었을 때 자신의 위대한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391.2)
 시편 110편“내 우편에 앉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왕의 시에 있는 언어를 초월하여 다니엘 7장 13, 14절에 나오는 “인자”의 거룩한 취임식에 버금가는 말씀이다. 행스턴버그(E. W. Hengstenberg) 조차도 다니엘 7장 13, 14 절은 ‘와서 우편에 앉으라’는 말씀에 대한 가장 오래된 주석이 된다”고 말한다(Commentary on the Psalms, Vol. 3, p. 332). “내 우편에”라는 관용적인 표현은 영광과 전능의 자리를 의미한다(시 45:9; 왕상 2:19). 메시아는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과 영광을 나누어 갖기 위해 야훼 하나님 곁에 발 아래가 아니라 앉는 가능한 한 최고의 영예를 얻는다(계 3:21과 비교). 신약은 시편 110편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천사들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올림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유추하고 있다(히 1: 13; 엡 1:20, 21; 벧전 3:22). 루터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지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천사들 저 너머 높은 곳에 앉아 계신 분은 분명히 그 본성과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 그 자신임에 틀림이 없다”(Luther’s Work, Vol. 13 [St. Louis: Concordia, 1956], p. 23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주님으로서의 하늘 취임을 당신의 자발적인 겸손과 구원을 위한 자아 희생에 연관시키고 있다. (392.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393.1)
 시편 110편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리가 지금 제사장—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굳게 붙잡고 또한 그 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어 주실 때 비로소 완전하게 될 것이다. 그분을 믿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은 은혜의 선물과 성령의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엡 4:7, 8). 그분께로 나아오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393.2)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394.1)
 이와 같은 믿음은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 또는 우리가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왕 같은 제사장직을 믿는 우리의 믿음의 질(quality)을 강조해 왔다. (3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