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10세(Leo X, 1513-1521 A.D.)는 전(前)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 A.D. 1503-1513)가 착공하여 미완성인 채로 남겨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기금 조성을 위해, 이미 1506년부터 발매되고 있던 소위 “면죄부” 판매를 더 널리 대대적으로 확산 촉진시키기로 했다. (437.1)
교황 레오 10세. 재위 1513-21년. 메디치 가(家)의 출신. 양쪽에 있는 인물은 다같이 추기경. 라파엘로 작.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437.2)
독일 내에서 “면죄부” 판매권을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은 도미니쿠스 탁발 승려인 웅변가 테첼(The Dominican monk, Johann Tetzel, A.D. 1465-1519)은 이렇게 얘기했다: (438.1)
“지금 맬수도 풀수도 있는 권세를 받은 교회가 천당과 지옥의 문을 열어놓았다. 이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곧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해 이 표를 사면, 그 은화가 돈궤에 쨍그랑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즉시 천당에 올라갈 것이다.”1)
(438.2)
1517년 10월 31일 루터(Martin Luther, A.D. 1483-1546)는 독일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의 게시판으로 사용되었던 성당 대문짝에다 라틴어로 아래와 같이 “면죄부”의 효력을 밝히기 위한 토론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438.3)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나는 다음 항에 관해 토론하기를 요청한다. 여기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은 서면으로 논해주기를 바란다.”2)
(438.4)
이런 서두로 시작된 95개 항목에 달하는 공개 토론 요구서는 루터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438.5)
면죄부 판매 수익금이 갑자가 현저하게 떨어지자 이에 화가 치밀어 오른 테첼은 즉각 항의했고, 교황청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테첼보다 더 만만찮은 적수는 잉골스타트(Ingolstadt) 대학 신학교수 엑크(Johann Maier von Eck, A.D. 1486-1543)였다. 그는 “오벨리스키”(Obelisci, 방첨탑, 인쇄 부표로 단검-†)라는 주제로 한 반박문을 통해 도전했다: (438.6)
“교회의 모든 관습은 교황의 권위와 동일하며, 그 관습에 관한 어떠한 질의도 이단이다.”3)
(438.7)
루터는 우선 테첼의 항의에 대해서는 1518년 3월에 “속죄와 은혜”라는 주제의 설교로 답했고, 엑크가 보낸 논박서에 대해서는 “아스테리스키”(Asterisci, 작은 별들, 인쇄에 부표로 사용되는 ‘별표’-*)라는 주제의 저술을 통해 반증했다. (439.1)
1518년 6월에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로마로 오라는 소환장을 보내는 동시에 도미니크 교단의 프리에리오(Silvestro Mazzolini von Prierio)에게 루터의 저술들을 검열해서 의견서를 내라고 명했다. 교황의 소환장에 프리에리오의 의견서가 첨부된 것이 그해 8월에 루터에게 전달됐다. 그 내용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439.2)
“로마교회는 추기경단을 대표하는 교회이며, 더 나아가서는 교황을 지상으로 여기는 교회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로마교회가 집행하고 있는 존중한 이 속죄권을 부정하는 자는 이단이다.”
(439.3)
1518년에 엑크의 반박서에 나타난 논쟁점에 대해, 루터의 뷔텐베르크 대학 동료인 칼 슈타트(Kalstadt, A.D. 1480-1541)가 “온 교회의 권위보다 성경 말씀이 더 중요하다.”라고 공박했다. (439.4)
엑크가 이에 대하여 공개 변론을 요구하자 칼 슈타트가 응했다. 이에 루터도 자연히 휩쓸렸다. 그리하여 1519년 6월 27일부터 라이프치히에서 18일간이나 계속되는 대 공개 변론이 전개됐다. 처음 5일간은 칼 슈타트가 엑크와 대쟁변했고, 6일째부터 루터가 나섰다. 주 논제들은 성만찬, 고해성사, 면죄부, 교권 등등이었다. 여기에 엑크와 루터가 펼친 교회 권위와 성경 권위의 우월성에 대한 불꽃튀긴 논쟁을 소개하고자 한다: (4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