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9 장  제칠일 안식일의 합일 사상
 안식일과 할례와 성만찬
 최초의 안식일은 하나님이 시간과 사람을 그 사랑의 품에 안으신 합일의 시간이다. 사람에게 남겨진 안식일의 기억은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사랑의 자취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그의 깊은 품과 그의 깊은 숨의 자취가 곧 사람에게 남겨진 안식일의 기억이다. 사람을 거룩한 안수로 거룩하게 하신 여호와(겔 20:12)의 자취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마음을 열어 자신의 영혼 안으로 영접해 모신 하나님의 자취가 사람에게 남겨진 안식일의 기억이다. 이처럼 합일의 정신은 안식일 사상의 핵심이다. (225.1)
 안식일의 합일사상은 하나님과 사람이 창조주와 피조물로서 서로 하나이고 아버지와 자식으로서 하나이고, 신랑과 신부,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 하나라는 사상이다. 이 하나됨의 언약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고 그리스도와 그 교회 사이에 이루어진 언약이다. 믿는 자와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조물이고 자식이고 신부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아내와 신부로서의 신자와 교회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그리스도를 섬기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아내가 되는 언약이다. (225.2)
 따라서 안식의 합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할례 사상과 성만찬 사상을 함께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안식일의 언약과 할례의 언약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와 몸의 언약은 모두 하나님과 하나되는 합일의 언약으로 공통의 이해 기반을 가지고 있다. (225.3)
 할례는 이스라엘의 신앙 공동체에 속한 남자는 누구나 난지 8일만에 받아야 했다(창 17:10-12). 이 할례 행위의 근본 취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통하여 “자신의 살,” 즉 할례를 치르는 신체의 부분에 “하나님의 언약을” “영원히 간직하자”는 것이다(창 17:13). 신부가 신혼 첫 날 밤에 신랑과의 동침을 통하여 자신의 신체에 언약의 표시를 간직하듯이, 이스라엘은 할례로써 신체에 하나님의 언약을 간직하였다. 그리고 이 할례의 자취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는 표였던 것이다. 반면에 할례를 받지 아니하는 남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고 하나님에 의하여 거룩하게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창 17:14). (226.1)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밑에 던지며 가로되 참으로 당신은 나에게 피 남편이로다”할 때,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두고 말함”이었던 것이다(출 4:24-26).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게 “당신은 참으로 나에게 피 남편”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행위였다. (226.2)
 할례의 표가 이스라엘의 육체에 새겨진 하나님의 언약의 표시이듯이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람을 거룩하게 구별하신 언약의 날이다. 사람의 시간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언약의 자취이다. 안식일은 사람이 자신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언약을 영원히 간직한 날이다. 그리고 안식일은 하나님의 가슴속에 각인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 날이며, 사람의 마음속에 각인된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난 날이다. 안식일은 할례와 같이 이스라엘의 영혼에 찍힌 하나님의 도장을 반영하는 날일뿐 아니라 “땅이 변하여 진흙에 하나님의 형상을 인친 것 같은”(욥 38:14) 이 사람이 제 스스로 그 자애하신 하나님을 “인 같이 마음에 두고 도장같이 마음에 둔”(아 8:6) 날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한 육체로 합일을 이루어 낸 날이며, 하나님과 사람이 각기 제 심령에 그 언약과 그 사랑과 그 호흡을 간직한 날이다. 사람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하나님의 언약의 기억과 하나님의 마음에 새겨진 사람의 언약의 기억이 사람의 시간 안에서 서로 교호하는 날이다. 그 교호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첫 제칠일에 나누었던 그 안식의 숨결이 솟아나는 날이다. (226.3)
 이처럼 안식일의 준수는 영적 이스라엘의 거룩한 할례이다. 곧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이요 육적인 죄의 몸을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골 2:11)이다. “마음의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는” 할례이다(렘 4:4). (227.1)
 성만찬의 언약도 안식일의 언약처럼 그리스도와 그 믿는 자의 합일을 나타내는 언약이다.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언약이다”(고전 11:25). 우리는 성만찬의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실 때” 마다 이 언약을 기념하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에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요 6:56, 57)는 합일의 신앙을 성만찬의 떡과 잔을 통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의 준수를 통해 나타내려는 신앙 고백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킴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인하여 사시는 것같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우리도 하나님을 인하여 살리라”는 신앙이 안식일 준수를 통하여 고백되고 있는 것이다. (227.2)
 새벽 별들이 노래한 첫 안식일의 거룩한 합일
 제칠일의 거룩은 합일의 거룩이다. 하나님이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너를 취하였고. . .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신”(사 62:4) 거룩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환난 날에 동참하사 그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고 안으신”(사 63:9) 거룩이다. (228.1)
 제칠일이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입는 차원이 제칠일이 거룩함을 입는 차원이다. 사람은 제칠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입는 차원, 즉 사람이 하나님을 임마누엘로 경험하는 차원에서 제칠일에 안식하고 거룩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되는 그 거룩한 합일의 차원에서 사람이 다시 자기 자신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세계와 화목한다. 이 세계가 거룩한 안식일의 세계이다. (228.2)
 따라서 제칠일의 안식과 거룩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엡 3:9)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상에 밝혀진 경륜이다. 안식일 경륜의 깊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륜의 깊이다. 성육신의 경륜의 깊이며 십자가 경륜의 깊이다. 안식일의 경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어 우리가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고 기반을 다져 모든 성도들과 함께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폭과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알게 하는”(엡 3:17) 경륜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 오직 한 분이신 만유의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엡 4:6)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성령의 줄로 하나되는”(엡 4:1) 경륜이다. (228.3)
 이 경륜이 성취되는 날이 제칠일이다. 그리스도의 기도가 성취되는 날이 제칠일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를 하나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보고 알게 하옵소서”(요 17:11-23). (228.4)
 안식일은 예수님의 이같은 경륜과 기도가 성취되고 그 성취가 기념되고 재현되는 날이다. 우리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그리스도를 알고”(요 17:3) 그와 더 불어 하나가 되는 날이다. 그리고 그 앎과 그 하나됨을 통하여 “영생”(요 17:2)에 들어가는 날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칠일의 사람, 곧 제칠일 안식일의 신자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 보내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합일의 삶으로써 영생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이러한 삶이 안식일 신앙의 삶이다. (229.1)
 따라서 안식일은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태어나고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된”(엡 4:22, 23, 24) 그리스도의 신부로 다시 태어나는 날이다. 만유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새 가족으로 태어나는 이 거룩한 합일의 날, 만유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평안의 매는 줄로 통일되던” 날,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 만유의 아버지 되심이 만유에 선포되던 최초의 안식일,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다”(욥 38:7). (229.2)
 이 노래가 다시 만유에 울려 퍼진 것은 파괴된 만유의 합일을 재건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사명을 지고 사람의 아기 예수로 베들레헴에 탄생되던 새벽의 일이었다: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오늘날 다윗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13, 14). (229.3)
 안식일: 나의 왕, 나의 신랑이 나를 이끌어 들이시는 푸른 침궁
 합일의 정신에서 보면 거룩한 안식일의 세계는 솔로몬의 아가서 같은 세계이다. 안식일의 세계는 사랑하는 자들의 내밀한 사랑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가서가 히브리어 성경의 가장 깊은 중앙에 위치해 있듯이 거룩한 안식일의 세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의 경험에서 가장 깊은 중심에 위치한다. 제칠일의 여인이요 하나님의 피 아내인 안식일의 사람이 안식일의 문턱에서 외치는 노래는 “나의 사랑 나의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아 1:4)이다. 거룩한 안식일은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나를 이끌어 들이시는 침궁이다.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의 집에 마련된 푸른 침상”(1:17)이다. 안식일은 “그 그늘에 내가 앉아서 내가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가 내 입에 심히 달았던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이다”(2:3). 제칠일 안에 있는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 내 영혼이 여호와의 침전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다”(시 84:1, 2). (230.1)
 그러나 주의 장막이 그토록 내게 사랑스러운 것은 나의 사랑 주님 때문이다. “왕이 침상에 앉았기” 때문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고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 품 가운데서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1:13, 14)인 것이다. 내게 어여쁘고 어여쁜 것은 “내 사랑 너”이다. 비둘기도 아니고 장막도 아니고 장미꽃 정원도 아니다. 푸른 빛 침궁이 사랑스러운 것은 “나의 왕이 나를 이끌어 들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 사랑 네 눈이 내게 비둘기 같은 경험이 안식일의 경험이지 비둘기가 내 사랑 같이 경험되는 세계가 안식일의 세계인 것이 아니다.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