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다니엘 6장 하나님과 사자굴
  • 1
 서론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의 이야기는 성경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야기의 하나이다. 이 장에서는 사자굴에서 다니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아직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역경에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해 제목을 “하나님과 사자굴”이라고 붙였다. (93.1)
 이 이야기의 끝에 나오는 다리오 왕의 포고는 전체적으로 다니엘의 기별을 요약하고 있다. (93.2)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 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단 6:26, 27).
(93.3)
 우리들의 현대적인 필요성과 이 이야기의 관련성은 베드로의 경고에 그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오늘도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였다(벧전 5:8).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을 고착시키는 사람은 다니엘이 사자들에게서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사단의 유혹에서 구조될 것이다. 이는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아직도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영원히 변치”아니 하신다. (93.4)
 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좇아 나가려고 마음이 급하겠지만, 그 앞서 이 이야기의 이해를 위해 몇 가지 주의 사항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93.5)
 다니엘 6장은 바벨론 땅을 지배하게 된 새 군주 다리우스가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해 120명의 총독들과, 다니엘을 의장으로하는 세 총리들을 임명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120 명의 총독들과 두 총리들이 다니엘의 기도를 염탐했으며 이들 122명이 모두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짐을 당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어떤 이들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연루되고 있는 사실에 당혹해 한다. 그러나,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이이야기 속에 모든 총독들과 총리들이 직접적으로 이 사건에 연루되 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부분은 없다. 이들 모두가 음모에 관련되었다고 한 것은 음모자들의 주장이었을 뿐이다(다니엘 6장 7절을 보라). 결국, 사자굴에 가족들과 함께 던짐을 당한 자들은 “다니엘을 고소한 사람들”(단 6:24)뿐이었고 122명 전체는 아니었다. (93.6)
 그 음모자들은 받을 벌을 받았다. 우리는 벨사살이 느부갓네살의 일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같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가 정죄받아 마땅했다는 사실을 앞에서 다루었다(다니엘 5장 22절을 보라). 다니엘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은, 그의 무죄함과 또 70여 년에 걸친 그의 탁월한 봉사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와같이 몹쓸 행위를 저질렀다. (93.7)
 


노인 다니엘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굶주린 사자의 입에서 구원받는다.
(94.1)
 벨사살과같이, 그리고 우리의 시대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같이, 그들은 “진리를 거부”했던 것이다(데살로니가후서 2장 10절을 보라). (95.1)
 그들의 가족들이 당한 운명은 애석하다. 그렇지만 엄격히 생각하면, 그들의 행위라고 해서 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만큼 별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음모자들이 가정에서 다니엘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그 처자들도 그들의 증오심에 맞장구치면서 그들을 부추겼을 것이다. 이와같이, 가족들도 그 가장의 죄에 동참했다. 하만의 아내 세레스(Zeresh)도 이런 식으로, 모르드개를 죽이 려는 남편의 음모에 관여했다(에스더 5장 14절을 보라). 오늘날의 많은 가족들도, 한담이나 남의 험담을 서로 맞장구를 치면서 즐기고 있다면 이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95.2)
 신약에서는 한담하는 사람의 혀를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에 관해서 평을 하는 것을 해롭지 않은 실내 스포츠 정도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2:36, 37)고 하셨다. (95.3)
 왕이 모든 사람에게 30 일 동안 왕 자신에게만 기도하도록 포고한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고대에는 왕들이 자주 신(神)처럼 대우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 특별 포고령을 새로운 지도자의 영도하에 온 국민을 연합시키기 위한 충성의 시험으로 해석하고, 이 조치를 일리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다니엘 3장에 기술된 느부갓네살의 금신상 낙성식을 회상하게 된다. (95.4)
 그러나, 우리는 다리우스의 포고령이 메대 페르시아 제국의 모든 지역에 미쳤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다리우스는 바벨론 지역만을 다스리는 왕이었다. 다리우스가 “온땅”(단 6:25)이라고 부른 바벨론은 분국(分國)에 불과했다. 천하의 왕 고레스 대왕이 전체 메대一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자였다. (95.5)
 야생 동물의 수집은 예나 지금이나 재미있는 일이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사자들이 많았다. 앗시리아의 한 왕은 한 번의 사냥에 970 마리의 사자를 죽였다고 주장했다.1 성경에는 사자들이 백 번 이상이나 언급되었다(특히 사사기 14장열왕기상 13장을 보라). 동물들을 산 채로 포획하는 기술이 보급되어 있었다. 물론, 현대의 진정제 같은 약물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살촉이 없는 화살을 동물들에게 쏘아서 그들을 약하게 만들거나 감각을 잃게 한 후에 용기 있는 사람들을 시켜 그것들을 밧줄로 묶게 하였다.2 또 깊은 구덩이에 빠뜨려 잡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바대로, 사로잡힌 사자들은 번식력이 강하다. 따라서, 울안에 갇혀 굶주려 있는 사자들을 상상해 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95.6)
 그러나, 사자굴이라는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바벨론에는 철(鐵)이 희귀했기 때문에 사자를 가둘 철장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동물들이 뛰어나 올 수 없도록 깊이 판 구덩이라면 오늘날 스위스의 베른에 있는 곰 구덩이처럼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이다. (95.7)
 아직까지는 이러한 사자굴이 바벨론에서 발굴된 사실이 없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위(水位)가 수세기에 거치면서 상당히 높아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깊은구덩이가 있었다 해도 오래 전에 물에 잠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로코에서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은 굴이 19세기에 한 여행자에 의해서 목격되었다.3 땅을 판 구덩이는 넓은 정사각형이었으며, 그 주위에 방어벽이 낮게 둘레를 싸고 있다. 문이 달린 간막이가 그 구덩이를 둘로 분할하고 있었다. 한쪽 칸을 청소할 때는 사자들을 다른 칸으로 몰아 넣었다. 한 쪽 칸 청소가 끝나면, 사육사들이 나와 그쪽 칸에 먹이를 던진 다음 굴 위에 서서 문을 열어 모든 사자들이 먹이를 먹기 위해서 그 칸에 이동할 때까지 기다린다. (95.8)
 그 다음에 문을 닫고, 다시 구덩이의 다른 칸으로 내려가 청소를 했다. (96.1)
 이러한 설명은 “하나님과 사자굴”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인 다니엘 6장의 상세한 부분들에 완전히 부합한다. (96.2)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