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7 장. 안식일:쉼이 없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안식의 기쁜 소식
 

안식일은 우리의 생산력에 잠정적으로 제한을 가함으로써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할 것이 아니라 사귐을 나누라고 가르친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동료 이웃들 을 양(量)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질(質)적인 관점에서 보도록, 즉 그들의 수입을 가기고서가 아니라 그들의 인간적인 가치를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197.1)
 안식일은 우리들의 생산활동을 잠재적으로 한정시킴으로써 우리들에게 이웃과 서로 경쟁하지 말고 친교를 나눌 것을 가르치고 있다. 안식일은 우리들에게 우리의 동료 인간들을 양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으로 생각하도록, 즉 그들의 수입의 액수를 가지고서가 아니라 그들의 인간적 가치를 가지고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만약 김(金)씨가 실업 보험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그의 변변치 못한 수입과 연관하여 생각하려는 유혹을 받을지 모르겠다. (198.1)
 그러나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고 김씨와 사귐을 나눌 때 우리는 그가 벌어 들이는 몇 푼 안되는 수입보다는 그의 기독교인다운 증거와 모범을 통하여 교회와 공동사회에 끼치는 많은 기여를 고맙게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이 안식일은 우리를 경쟁과 생산의 압력으로부터 해방시켜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의 인간적인 가치들과 사물들의 아름다움을 좀더 충분히 인식하도록 해 준다.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들과 사물들의 진가를 자유롭게 좀 더 충분히 인식하게 됨으로써 우리 생활에 기쁨과 조화와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198.2)
 4. 소속의 안식
 진정한 안식일 준수가 우리 생활에 그리스도의 안식을 가져다 주는 네번째 방법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확신시켜 줌으로써이다. 인간의 불안은 대부분 그 밑 바닥에 소외감이 작용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아무 것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은 사람으로 하여금 쓰라린 느낌과 불안의 느낌을 갖게 한다. 반면에 인간은 피차 소속된 느낌을 가질 때 사랑과 주체성과 안정과 안식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과의 소속관계를 경험하고 이 경험을 개념화하도록 해 주기 위하여 무지개, 할례, 유월절 어린양, 피, 빵과 술 같은 상징이나 표상들을 그 경험의 개념화를 돕는 도구로 주셨다. (198.3)
 앞의 4장(章)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같은, 계약의 여러가지 상징들과 표징들 가운데서도 안식일이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백성의 사명에 대한 가장 탁월한 상징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소유권의 상징으로서 이 날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에게 그가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시켜 준다. 처크 스크리븐(Chuck Scriven)은 말하기를 “안식일은 신앙인의 표지(標識) 즉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성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충성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요구로 붙인 일종의 벗지 같은 것이다 ∙∙∙ 이것은 우리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누구를 섬기고 있는지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하여 들고 다니는 플래카드이다”3라고 하였다. (198.4)
 한 주일을 사는 동안에 사람들은 자신이 무명(無名)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좌절하는 경험을 치른다. 그는 군중 속에 움직이며 살면서 “내가 누구냐”고 자문해 본다. 이 때마다 반사되어 나오는 대답은 “너는 기계의 한 톱니 바퀴요, 컴퓨터의 한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안식일에 이르게 되면 그 답은 달라진다.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은 “너는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알지어다”(출 31:13)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소유권과 성화의 상징이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선택과 성화를 확신시킨다. 뿐만 아니라 앞의 4장(章)에서 보았듯이 안식일은 단순히 하나님께 소속된 확증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포기와 소생의 침례 언약을 재다짐 함으로써 그 같은 서약을 표시할 수 있는, 일주 일회의 구체적인 기회까지 제공해 주고 있다. 안식일은 우리의 창조주 되시며 구세주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소속감을 새롭게 해 줌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 의식과 평화와 안식을 우리의 생활에 회복시켜 주고 있다. (198.5)
 5. 사회적 긴장으로부터의 안식
 참된 안식일 준수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안식을 끼치는 다섯번째 방법은 사회적, 인종적, 문화적 장벽을 허물어 뜨림으로써이다. 다른 사람의 피부 색이나 문화나 언어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인정할 수 없다거나, 않으려는 것은 우리의 현 사회가 안고 있는 불안과 긴장과 미움의 주요 요인의 하나다. 5장(章)에서 보았지만 대 홍수 이후에 안식일의 주요 기능의 하나는 인간 사회의 각 구성원에 대한 평등과 존경을 가르치는 일이 되어 왔다. 매 칠일마다, 매 칠년마다(안식년), 그리고 해의 49주년(희년)마다 모든 사람과 짐승과 부동산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되어야 했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는 평등 지향적이다. (199.1)
 히브리 사회의 균일치 못한 구분은 안식일이 시작되면서 허물어 진다. 사무엘 H. 드레스너(Samuel H. Dresner)는 안식일의 이같은 평등 기능이 거의 무시되고 있다고 불평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어떤 유대인이 양파를 소매(小賣)하고 다른 유대인은 거대한 삼림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안식일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모든 사람들이 왕이다. 모든 사람들이 안식일이라는 여왕을 환영하고 모든 사람이 키두쉬(Kiddush)를 영창(泳唱)하며 모든 사람이 안식일의 영광 속에서 몸을 녹이는 것이다 ∙∙∙ . 안식일에는 은행가도 사무원도 농부도 고용살이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다. 단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유대인들이 있을 뿐이다”4라고 하였다. (199.2)
 이사야가 이스라엘 가운데 버림받은 자들 특히 앗시리아 전쟁과 바벨론 전쟁의 결과로 생겨난 수 많은 환관(宦官)과 고자들과 외국인들에게 “내 집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므로 그들도 안식일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의 축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보장한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사 56:1~7). (199.3)
 만약에 안식일과 그 자매 제도들에 의하여 표명된 인권 사항이 항상 이해되고 실천되었던들 고대와 현대 사회의 사회적 불의는 상당 부분이 방지되었을 것이다. 안식일은 우리의 자녀로부터 우리의 하인들에게 이르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인도적 관심에 관한 중요 문제들을 우리에게 부과시키고 있다(출 20:10; 23:12; 신 5:14). (199.4)
 안식일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장 진실해지는 순간인 예배의 시간에 우리 앞에 그와 같은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사회적 불의의 고통에 대해서 냉담하지 못하도록 해 주고 있다.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자들을 미워하면서 창조와 구속을 경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진정으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류의 형제됨을 인정하고 강화시킴으로써 하나님이 아버지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안식일이 안식일 예배와 사귐과 인도주의적인 봉사를 통하여 세우고 있는 형제애의 유대는 그 반사 작용에 의하여 주일의 평일 동안에 이루어지는 우리의 사회적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199.5)
 우리가 안식일에 인종적 소수 집단에 속하는 사람이나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주일의 평일들에도 그 사람들을 형제나 자매로 여기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에 안식일의 가르침에 의하여 마땅히 하나님의 피조물로 사랑과 존경을 보여 주어야 할 대상들을 주일의 평일 동안에 착취하거나 미워한다면 이는 분명히 인간의 가치와 안식일의 경험에 대한 거부이다. 안식일은 부자이건 가난뱅이건, 피부가 희든 검든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존경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침으로써 이 사회의 긴장과 불안의 주요 요인이 되고 있는 사회적, 인종적, 문화적 장애를 허물어 평등화시키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거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199.6)
 6. 구속의 안식
 진정한 안식일 준수가 우리의 생활에 그리스도의 안식을 끼쳐 주는 여섯 번째의 방법은 육체적인 쉼을 통하여 하나님의 안식과 구원의 평화라는 더 큰 축복들을 경험케 해줌으로써이다. 우리는 이미 5장(章)에서 안식일의 안식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안식의 관계를 검토하였다. 거기에서 우리는 당초 하나님이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실 것을 상징했던 안식일이 대 홍수 이후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여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약속의 상징이 된 것을 확인하였다. (200.1)
 안식일과 안식년마다 히브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허락되는 노동의 고됨과 사회적 불평등으로부터의 안식과 해방은 단지 과거에 있었던 출애굽의 구원(신 5:15)의 기념으로서만이 아니라 장차 메시야에 의하여 이루어질 구속적 안식의 예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구속적인 기별과 일치시킴으로써 안식일에 의하여 상징된(눅 4:21) 구약의 메시야적 기대를 성취시켰다. 이로써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안식을 경험하기에 적합한 기구가 되었다. (200.2)
 누가에 의하면(눅 4:16~21), 그리스도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리고 그 인용 구절 속에 선포된 안식년의 해방이 자신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명확하게 강조하면서 자신의 공공 봉사를 시작했던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다고 한다. 이에 뒷따른 봉사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안식일 치료봉사와 가르침의 봉사를 통하여 자신의 구속적 사명을 밝힘으로써 이같은 주장을 실체화하였다(눅 13:16; 마 12:5~6; 요 5:17; 7:22, 23).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쉬심으로써(눅 23:54~56) 자신의 구속의 사명을 다 마치신 것(“다루었다”요 19:30)도 저 역사적인 안식일 날이 있다(눅 23:54-56). (200.3)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안식일의 안식을 취하신 사실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창조의 때에 인간의 시간의 유한성을 기꺼이 담당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성육신이 되어 인간의 육신에 있는 고통과 고뇌와 죽음까지라도 담당하려 했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안식일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의 기쁜 소식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벽한 구속의 기쁜 소식까지 경축하는 시간이다. 즉 그 날은 해방된 백성들이 매주마다 행하는 기쁨의 경축일이며 우리가 우리의 일을 중지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 속에서 활동케 하고 우리의 생활에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안식을 가져다 주도록 하는 날이다. (200.4)
 7. 봉사의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