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7 장. 안식일:쉼이 없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안식의 기쁜 소식
 우리들은 터질 듯한 긴장과 고뇌와 억눌린 생활을 살면서 안식을 갈망하여 마지 않는다. 심장병 전문의들이나 고혈압의 전문의(專門路)들은 우리들에게 충고하여 말하기를 “매사에 속도를 줄이고 안식을 취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긴장을 없애고 불안을 잠재운다는 것이 오죽이나 어려운 일인가! 어떤 자들은 헬스 클럽을 찾고 또 어떤 사람들은 명상 클럽에 끼어 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긴장으로부터 헤어나오기 위하여 휴가를 얻거나 진정제나 약품들 또는 알콜에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다. (193.1)
 그러나 우리가 경험을 통하여 깨달은 것은 호화로운 휴가도, 마법의 약품들도 기껏해야 임시적인 도피를 제공해 줄뿐 내적 긴장과 불안의 영구적인 안정은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식을 모르는 우리의 생활은 어떻게 해야 완전한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그의 자서전인 고백록(Confession)에서 인간의 불안이라는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말하기를 “주님은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으며 우리의 불안한 심령은 주님 안에서 비로소 평안을 찾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93.2)
 참된 안식은 어떤 공간 속에서나 약품 등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과의 옳바른 관계 속에 얻어지는 것이다. 이 인격은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마 11:28)고 하신 주님이시다. 완전한 쉼과 평화는 인간의 어떤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한 선물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생활을 조화시켜주도록 우리 생활을 그분에게 맡길 때 체험케 되는 경험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쉽(안식)을 주겠다”고 하셨다(마 11:28). 어째서 우리 생활 속에서 진정한 안식과 평화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되는가? (193.3)
 이에 대한 대답은 완전한 안식이 우연히 이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육체적, 지적 영적 요소들의 조화로운 일치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사실 속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가지 요소들을 조화시킬 수가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피곤한 육신을 침상위에 뉘이고 휴식을 취할 수 있으나 만약 우리의 정신과 심령이 계속 근심 속에 있다면 쉼은 고사하고 오히려 심적 동요와 긴장, 심지어는 악몽에 까지 시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93.4)
 오케스트라의 여러 악기들이 훌륭한 화음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노련한 지휘자의 지휘가 필요되는 것처럼 우리가 조화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체적, 지적, 영적 요소들이 우리의 대 지휘자이신 그리스도의 지휘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1 (193.5)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쉼없는 생활을 조화시키고 안정시키도록 할 수 있을까? 앞의 논의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속적인 관심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 안에서 값없이 안식을 누리도록(히 4:9-10) 하시기 위하여 대 홍수 전(前)과 후에 안식일이라는 매우 중요한 제도를 인간에게 제정해 주셨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의 이 제도는 역사를 통하여 자주 소홀히 취급되고 무시되었으며 심지어는 곡해되기까지 하였다. 이같은 일은 구약 시대에도 일어났으며 물질 중심적인 오늘의 사회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안식일을 하나님의 능력임재를 구하는 날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이득쾌락을 구하는 날로 생각하고 있다. (194.1)
 어떤 목사가 여러 주일 동안 교회 예배에 불참한 한 교인을 방문하였다. 목사가 그 교인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교회에 나오시지 못했습니까?”하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교회에 앉아서 나의 침상을 생각하느니보다는 일요일 아침에 침상에 누어 교회를 생각하는 편이 낫습니다. 최소한 나의 마음만은 바른 자리에 있거든요.”라는 것이다. 실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주일”에 가야할 마땅한 장소는 하나님의 성전 안(內)이 아니라 침상과 보우트와 자동차와 식당과 축구장과 영화관과 상점가이다. 심지어 “주일” 아침에 교회 예배에 출석했다가도 오후에는 사업 장소나 유흥 장소로 되돌아 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쉼 없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안식을 경험토록 하기 위하여 구별해 놓은 성경적인 안식일 준수의 개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194.2)
 이같은 풍조는 다음과 같은 매우 심각한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문제란 곧 안식일 제도는 우주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걸맞지 않은 폐지된 종교 전통인가, 아니면 아직도 그리스도인의 성장과 존속에 기본적인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제도인가 하는 것이다. 사물의 압제로 많은 생명들이 노예화되고 있는 바로 이 때에 인간을 물질주의의 멍에로 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의 평안과 안식을 경험토록 해주는 기능을 가진 안식일이 이제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됐다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다. (194.3)
 우리는 앞의 논의에서 안식일은 인간에게 하나님과 그 이웃들과의 관계를 증진시키는 데에 필요한 시간과 기회를 공급해 주는 하나님의 중요한 제도임을 확인하였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날의 경축에 의하여 당신의 평화와 안식을 쉼없는 생명들에게 나누어 줄 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안식일의 이같은 기능을 좀 더 확실히 파악하기 위하여 결론적으로 앞에서 논의한 바 있는 안식일 기별의 중요한 내용을 결론적으로 일곱 개의 사항으로 간략히 정리할까 한다. (194.4)
 1. 창조의 안식
 안식일은 첫째로 우리의 생명이 창조로부터 영원까지 하나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의미와 가치와 회망을 갖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 줌으로써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안식을 가져다 주고 있다. 안식일의 이같은 기별에 대해서는 특별히 첫 두 장(章)에서 취급했다. 우리는 이 기별을 인간의 영혼을 위한 “그리스도의 창조 안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기별은 그들의 조상적 뿌리 안에서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 있는 지각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들의 생존과 우주 만상의 존재는 우연의 결과인지 아니면 자비로운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인지를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안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을 통하여 이러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조상 대대의 뿌리가 선한 것은 하나님 자신 안에 뿌리를 내린 것이기 때문이며(창 1:26~27) 그들의 존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와 구원의 결과이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이라는 평안의 확증을 주고 있다. (195.1)
 우리는 안식일의 이와 같은 기별을 창조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고 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7이란 숫자와 단호한 용어들과 하나님의 안식의 비유적 표현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나의 완전하고 완벽한 방식으로 이 세계와 우주 만상을 창조하셨다는 기쁜 소식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완전하신 창조주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기뻐함으로써 안식일에 이 기쁜 소식을 경축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창조의 안식을 경험한다. (195.2)
 안식일에 이같은 안식을 경험한다는 것은 비록 인간 생존이 외형적으로 허망하고 비극적인 것으로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이 생존이 하나님으로부터 연유되었으며 영화롭고 거룩한 운명을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에 가치있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확증을 즐긴다는 뜻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웅변적으로 표현하여 말하기를 “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제칠일에 쉬셨다. 이것은 우리도 당신의 너그러우심을 통하여 우리의 일을 마친 후에 영원한 생명의 안식일에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임을 당신의 말씀이신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는 것이라 하였다.”2 이 불안한 시대에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평화와 안식을 미리 맛본다는 뜻이다. 또 이것은 “너희 손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빌 1:6)이라는 확신 속에서 안식을 누린다는 뜻이다. (195.3)
 2. 하나님의 임재의 안식
 안식일의 적절한 준수가 우리들의 생활에 그리스도의 안식을 가져다 주는 두 번째의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토록 해줌으로써이다. 거센 풍랑이 일렁이는 갈릴리 호수를 잠잠케 한 것은 그리스도의 임재이다(마 8:23~27). 그리고 근심이 가득찬 우리의 생활에 평화와 평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도 역시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다. 성경에 빈번하게 진술되고 있는 안식일의 거룩함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196.1)
 우리는 이미 3장(章)에서 안식일의 거룩함이 안식일을 통하여 백성들의 생명 속에 특별히 나타난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존재한다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안식일에 세상의 여러가지 시끄러운 소리들로부터 마음의 귀를 돌이키기 위하여 자신의 세속적인 관심사들을 모두 접어 두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우리는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경험하고 있다고 하겠다. 안식일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가까이 느끼는 경험으로 우리의 마음이 고양되었을 때 우리의 영혼은 기쁨과 평화와 안식으로 충만하게 된다. (196.2)
 이런 것들이 지속되려면 관계가 계속 밀접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필자가 대학 시절을 보낸 영국의 뉴볼드 대학에서는 학생들을 A. B. C 의 등급으로 나누어 이성(異性)과의 면회 횟수를 규정하는 규칙이 있었다. A의 등급을 받은 한쌍의 남녀 학생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지정된 휴게실에서 약 한 시간 동안의 만남을 즐길 수 있었지만 B급이나 C급에 속하는 남녀 학생들은 한 달에 두번 혹은 한 번의 면회 밖에는 즐길 수 없었다. (196.3)
 필자는 약혼녀와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는 짧은 기간의 면회야말로 우리의 약혼관계의 지속에 절대적으로 긴요한 사항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A급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안식일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신 주님과의 일주 일회의 특별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식일의 이같은 만남은 한 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계속되는 만남이다. 거룩한 안식일의 경험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특별한 의미에서 주님의 영적인 임재와 사귐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하면 자연히 마음이 엄숙해 진다. 안식일 시간과 활동에서 그리스도의 임재의 의식을 함양시키는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매일의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안식과 평화를 경험한다. (196.4)
 3. 경쟁으로부터의 안식
 참된 안식일 준수가 우리 생활에 그리스도의 안식을 제공하는 세번째 방식은 우리를 생산과 성취의 압력으로부터 해방시켜 줌으로써이다. 우리의 경쟁적인 사회가 우리에게 끼치는 간장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좌절감을 야기시키고 있다. 경쟁은 사람을 낙심시키고 비인간화하며 사기를 저하시킨다. 3장(章)에서 보았듯이 오늘날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옛날의 이스라엘인들천럼 이웃 집의 살림살이를 따라 가노라고 안식일도 잊어버리고 장사에 골몰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출 16:27)고 말하여 이같은 탐욕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였다. 안식일은 탐욕스러운 심령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도록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의 평화와 안식의 거하는 곳이라고 가르친다.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