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흥해도 악이고 선은 망해도 선이다. 악이 성공했다고 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선이 실패했다고 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결코 혼동하는 일이 없으시다.

 — 시편 73편(187.1)
 솔직한 책 시편에
 시편은 솔직하다. 시편은 감추지 않는다. 그것이 시편의 매력이요 위력이다. 가슴은 진정(眞情)에 의해서만 설레고, 마음은 진실(眞實)에 의하여서만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성경의 중심(中心)인 시편은, 그 가슴을 파고드는 사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 시편은 인간의 위선(僞善)과 독선(觸善)을 체질적으로 뿌리치고 있는 것이다. 시편 73편에서 우리는 다윗 왕 당시 성전 음악을 담당한 경건한 레위인이요(역대상 6장 39절 참조). 선견자였던(역대하 29장 30절 참조), 아삽(Asaph)이 썼거나 수집한 신앙고백에서, 있을 법한 종교적 자존심을 성가시듯 벗어버린 성도의 냉가슴 앓던 고민을 솔직한 말로 듣게 되는 것이다. (187.2)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善)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失足)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字通)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疾視)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淨)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편 73편 1~5, 7~9, 12~14절). (188.1)
 성도의 말 못할 고민
 시인은 일찍이 시편 1편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2절) 의인은 “그 행사가 다 형통”(3절)하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았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 결국 “악인의 길은 망하리”(4, 6절)라는 믿음도 가졌다. 그런데 살아온 날들 동안 체험한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진실보다 아첨이 인생회전을 더 순조롭게 하고 금일봉(金一封)이 골방에서 드린 간절한 기도보다 더 위력이 있는 것을 체험한 현실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시인은 이런 현실에 당황한다. (189.1)
진실보다 아첨이 인생의 회전을 더 순조롭게 하고, 금일봉이 골방에서 드린 기도보다 더 위력이 있는 것을 체험한 현실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시인은 이런 현실에 당황한다.
(189.2)
 그는 오히려 “악인의 형통함”을 분명히 보았으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 한 자”가 득의만면(得意滿面)한 것을 보고서 어느새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곤혹(困惑)에 빠진다. (189.3)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기는커녕, 잘 먹어 “눈은 솟아오르고” 몸도 튼튼하여 “그 힘이 건강하고” 걱정 근심 없이 살면서 자부심으로 거들먹거리며 지내는 모습을 보며 시인은 마음이 산란(散亂)해 지고 감정이 극도로 상한다. (189.4)
 세상이 이렇게 심판 없는 경기장 같아서야 누가 인생 경기 규칙을 준수할 것인가? “내가 내 마음을 정(淨)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된 일이 아닌가? 모처럼 의롭고 선하게 살아보려는 사람들은 오히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져,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니 이 무슨 변(變)인가? “내가 주께 질문 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이니까”(예레미야 12장 1절). (189.5)
 성소에서 발견한 “유레카”
 시편 1편에 기록된 행복된 인생을 위한 경기 규칙이, 막상 인생 경기가 벌어지는 경기장인 73편의 딜레마(窮地)를 해결하지 못해 “심히 곤란”을 겪던 시인은 마침내 17절에서 두 시편을 잇는 고리를 찾는다. (190.1)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 즉

 내가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 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73편 1~19절). (190.2)
 시인이 성소에서 경험한 “유레카”(eureka—내가 발견 했다)는 무엇인가?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비 위에 차려진 하나님의 보좌, 그것은 “의와 공의”(시편 89편 14절)가 그 기초가 되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심판대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대경륜을 집행하는 본영(本營)인 것이다. 세상은 심판 없는 경기장이 아니며, 인생은 규칙 없는 경기가 결코 아니다. 성소는 선과 악을 나누는 곳이다. 시인은 성소의 뜰에서 희생 제물로부터 분리된 동물의 기름이(출애굽기 29장 13절; 레위기 3장 3~5절 참조) 제단에 사르어져 연기가 되는 것을 깊은 생각에 잠겨 바라보며 마침내 대답을 찾았다. (190.3)
 시편 73편과 똑같은 주제를 다룬 37편에 그 대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191.1)
 “행악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대저 행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

   (37편 1, 9, 20절). (191.2)
 시인은 마침내 어린양의 기름처럼 타서 연기같이 사라지는 악인의 결국을 본 것이다. 그렇다. 악은 흥해도 악이고 선은 망해도 선이다. 악이 성공했다고 선이 되지 않으며 선이 실패했다고 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191.3)
 악은 끝내 파멸이라는 결말에 이를 것이요, 선은 마침내 선에 따르는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되도록 작정하신 선하신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결코 혼동(混同)하지 않으신다. (191.4)
쓸모 있는 돌은 끌과 망치로 많이 쪼이고 맞은 후 결국 조각품이 되어 나오고 가치 있는 광석은 용광로의 불속에 던져져 ∙∙∙ .
(192.1)
 결국이 다른 두 결국-선과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