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8 장  안식일, 하나님의 새 일 곧 새 언약의 초청
 안식일은 또 사람이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아들로 기름부음을 받는 날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서 나게 하셨”(갈 4:4, 5, 9)던 것이다. 우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로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던”(히 4:6) 것이다. 이로써 죄지어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안식을 잃었던 탕자가 다시 안식이 머무르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고(눅 15:11-32) 죄로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났으며 내[하나님]가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었던”(눅 15:24) 것이다. 아버지 집밖에서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근심하고 탄식했던” 아들의 “생명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속하사 평안케 하신 것이다”(시 55:18).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신음하고 탄식했던 인류가 그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고” “영원히 요동치 않게 된”(시 55:22) 것이다. 탕자 같은 인류의 머리 위에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내려와 앉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이런 날이 안식일인 것이다. (217.3)
 안식일의 소식은 기쁜 소식이다. 우리에게 안식이 있다는 소식은 복음이다. 안식이야말로 가진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사야 할 보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천국은 안식이 있으므로 천국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않은 사람은 이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이 웬만큼 가난해지지 않고는 안식의 소식을 제일의 기쁨으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풍파 많은 세월의 바다를 웬만큼 노를 저어 항해 해보지 않은 나이로써는 안식의 소식이 가슴에 깊이 헤쳐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질병과 곤고와 불충과 불효와 부정과 불의와 불신에 웬만큼 눈물짓지 않는 나이로는 알아보기 어려운 보배이기 때문이다. 실로 창기와 노처녀와 과부와 세리와 병자의 눈에 먼저 보이고 귀인과 건강한 자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부자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218.1)
 안식일은 실로 기쁜 소식의 날이다. 죄로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날이다. “여자가 남자를 안게 되었으니” 나와 남편을 맞이하라는 날이다. “보라 신랑이로다 나와 맞이하라”(마 25:6)는 날이다.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네가 정하게 되고 내게 범하여 행한 모든 죄악에서 사하였고 네가 처음과 같이 세움을”(렘 33:7) 입었으므로 집나간 아들이요 아내인 너 사람아 “어서 돌아 오라”는 소식의 날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마 3:2)는 소식의 날이다. 비천한 여인은 지극히 거룩한 자의 아내로 “처음과 같이 세움을 입었고” 죄 많았던 아들은 “지극히 거룩한” 아들의 명분을 다시 얻었다. (219.1)
 여인은 남자를 안았을 뿐만 아니라 거룩한 아들을 낳았다. 육체가 성령을 품어 성령의 아들을 낳고 성령의 열매를 맺었다. 여인의 아들이요 성령의 아들이요 성육신 하신 독생자이다. 안식일은 사람이 비천한 남종과 여종으로 태어나는 날이 아니요,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로 태어나는 날이다. 비천한 계집 종의 자식이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날이며 그 아들이 주인이 되는 날이다. (219.2)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뜻에 크게 응하는 날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이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라엘에 응하리라”(호 2:21, 22). (219.3)
 사람이 “지극히 높으신 능력의 덮으심”을 받아 하나님의 신부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아들을 낳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과 하늘과 땅과 만물이 크게 응하는 안식일의 신앙에서는 결코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직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라는 고백이 있을 뿐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가 없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가 있느니라”(마 19:26)가 있을 뿐이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눅 1:49, 50)라고 찬송할 뿐이다. 주께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눅 1:72),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셨다”(눅 1:74, 75)고 찬송할 뿐이다. (219.4)
 안식일: 새 언약의 새 삶
 안식일의 초청은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되었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자”(계 19:7)는 것이다. 하늘 임금이 어린양의 신부에게서 예복을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곧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입게 하셨다”(계 19:8)는 것이다. (220.1)
 안식일의 초청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초청이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은 복이 있다”(계 19:9).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다”(계 19:8). 우리의 신랑이신 어린양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다”(계 19:11).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때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였다(계19:13). 어린양의 신부는 어린양의 피로 씻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계 19:14)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그를 따를 것이다. 이것이 새 언약인 안식일 신앙 안의 새 삶이다. (220.2)
 또 안식일 신앙, 곧 그 새 언약 안의 새 삶은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 잔치와도 같다”(마 22:1). 임금이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어 가로되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 (220.3)
 그러나 세상은 안식의 초청을 거절하였다.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사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었다.” 그리하여 임금은 할 수 없이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하였다. “종들은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데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이 가득하였다”(마 22:8, 9, 10). (221.1)
 그런데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잔치에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둠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2:11, 12, 13). (221.2)
 안식일은 남자를 맞이하는 날이요, 아들을 맞이하는 날이요, 아버지이신 임금을 맞이하는 날이다. 신부를 맞이하는 날이요 신랑을 맞이하는 날이다. 언약의 상징으로써 그렇다. 이 상징들이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는 기별이 있다. 하나님과 사람은 특별한 관계 곧 언약의 관계라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야 할 삶은 언약의 삶이라는 것이다. (221.3)
 그 관계는 일차적으로 수건을 벗고 신발을 벗고 옷을 벗어야하는 관계이다. 붉은 진실 이외에는 그 무엇도 불필요하고 오히려 불결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예복을 입어야 하는 관계이다. 붉은 진실, 붉은 마음만으로는 감당치 못하는 지극히 거룩한 관계이다. 사람의 진실을 넘어서고 육체의 진실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차원과 영적 차원에서 하나가 되는 관계이다. 생존의 차원에서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죽어서 부활한 삶의 차원에서 하나되는 관계이다. 이 관계의 매체가 예복이다.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예수이다. (221.4)
 안식일 신앙은 일차적으로 심령이 가난하여 벌거숭이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신앙이다. 빈손 들고 벌거벗은 진실로 하나님을 맞이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신앙이다. 수건 같고, 신발 같고, 헌 누더기 같은 자신의 의를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신앙이다. 십계명의 신앙 정신은 계명의 준수로 수건을 챙기고 신발을 챙기고 겉옷을 챙기는 정신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준엄한 십계명의 거울 앞에서 더러운 신발 같고 수건 같고 누더기 같은 자기의 의를 완전히 무장 해제 당하는 정신을 뜻한다. 율법으로 무장된 마음, 율법으로 강퍅해진 마음으로는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하나님이 맹세하셨다”(히 3:18).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를 무장해제 당한 사람,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 십자가로 마음의 가난한 사람에게 예비된 나라가 안식의 천국이다. (222.1)
 그러나 가난한 심령만으로는, 벌거숭이의 진실만으로는 아들을 맞이하고 신랑을 맞이하고 임금을 맞이하는 안식일 안식의 새 삶을 살 수 없다. 예복을 입어야 한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예복을 입어야 한다. 어린양의 피로 빤 예복이다. 이 예복이 사람을 육체적 관계를 넘어 성령의 관계에 서게 한다. 이 예복을 입지 않고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다.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안의 신앙에 초청되었다 할지라도 그 초청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옛날 모세를 좇아 애굽을 나온 자들이라 할지라도 오직 “믿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히 3:18, 19). 오히려 그 “믿지 아니하는 악심”(히 3:12)으로 말미암아 “광야에 시체로 엎드려졌듯이”(히 3:17) 비록 안식일의 “복음을 전해 받은 자들이라 할지라도”“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않으면 그들이 들은바 말씀이 그들의 진정한 안식에 유익이 되지 못한다”(히 4:2). (222.2)
 그리스도가 예비한 안식일 안식의 언약에 들어간 자는 “이미 믿는 우리들이다”(히 4:3). 그리스도의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예복, 곧 그리스도의 “옳은 행실”“그의 의로” 옷 입은 자들이다. 복음 전함을 이미 받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의로 자신을 겸비케 하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의 의로 말미암아 가난한 심령을 잃고 자신의 “마음을 강퍅케 한다면”(히 3:8) 그리스도가 예비하신 새 언약의 안식, 곧 제칠일 안식일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로 말미암아 새 언약에 들어간 안식일의 신부는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으로 내[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겔 20:39). 예복과 예물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께 나가고 안식에 나가는 정신을 말한다. 십자가의 예복과 예물이 있는가 하면 자기의 의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율법의 예복과 예물이 있다. 아벨의 예복과 예물이 있는가하면 가인의 예복과 예물이 있다. 용서받아 다시 하나님의 안식에 초청된 우리는 “다시는 우리의 의를 내세우는 우리의 예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223.1)
 새로워진 안식일 언약의 예복은 우리의 벌거벗음과 우리의 허물을 덮고 가리우시는 그리스도의 넓은 옷이며 고아 같고, 과부 같은 우리를 품에 안으시는 그리스도의 품이며 죄 많은 우리의 육신과 한 몸을 이루신 성육신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태초에 사람의 시간인 유한한 제칠일로 들어와 사람의 시간을 공유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더불어 거룩한 혼약을 맺으시었다. 사람의 배은과 배신으로 이 혼약이 깨어지자,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의 시간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함께 나누어 가진 하나님으로 오시어 깨어진 언약을 재건하시었다. 우리가 안식일에 만나는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다. 우리와 더불어 유한한 시간의 멍에를 함께 지고 계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와 한 몸이 되어 우리의 육체적 질고를 우리와 함께 걸머진 하나님이다. 이분이 우리의 안식일 언약의 주님이시다. (223.2)
 안식일의 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이다. 어린양의 혼인 침상에 오를 자 누구인가. 자기의 신발을 벗고 수건을 벗고 옷을 벗어 벌거벗은 진실만으로 어린양에게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뿐 아니라 벌거벗은 진실 위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복을 입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유월절 어린양을 예물로 들고 가는 자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 20). “모세의 법[언약]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늘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8, 29). (2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