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6 장. 안식일:봉사의 기쁜 소식 IV. 우리의 거주 환경에 대한 봉사로서의 안식일
 인류와 자연 사이의 회복된 조화의 광경은 신약에는 물론 구약에도 나와 있다. 구약에서는 지구의 종말적 회복이 안식일의 경험과 기별에 의하여 조성되어온 메시야 시대의 소망과 관련되고 있다. 옛 낙원의 종말적 회복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묘사는 이사야 11장에 나오고 있다. 거기에 묘사되기를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사 11:6, 7, 9)라 하였다.60  (186.3)
 이 비슷한 묘사가 신약 성경에서도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인류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구속과 궁극적인 회복에 동참하고 있다. 바울의 글을 보면 하나 남은 그리스도의 안에서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들을 종국적으로 그들이 통일과 조화와 화해를 경험할 지점으로 인도하고 있다(엡 1:10; 골 1:20), 즉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피조물이 썩어 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 때 를” “이제까지 기다리며 피조물들이 다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21, 22)라고 했다.61 요한 계시록의 기자도 “새 하늘과 새 땅”(계 21:1~4; 벧후 3:11~13)의 평화와 조화를 즐기는 구속받은 자들에 대하여 비슷한 광경을 묘사하였다.62 (186.4)
 3. 안식일과 생태학상의 위기
 인간과 동물과 식물계의 우주적 회복에 대한 성경의 주장은 자연과 환경 전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대하여 지극히 중요한 암시를 주고 있다. 하나님을 전 세계의 창조주와 회복자(者)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목표들과 의도에 대하여 순응하는 태도를 갖는 다는 것을 뜻한다. 그와 같은 계획에 동기를 주고 실천하기 위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역할을 적절히 해석해 주는 상징들과 제도들을 필요로 한다. (187.1)
 그런데 안식일이 교회에 그와 같은 상징과 제도를 제공하고 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안식일이 이른바 “생태학적 양심”이라고하는 것을 개발시키는 신학적 동기와 실제적인 기회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적인 의미에서 안식일은 신자에게 인간과 자연이 하나님의 창조와 성화와 구속과 총국적인 회복을 함께 나누어 누리고 있으며 따라서 자연과 인간은 피차 훌륭한 동반자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줌으로써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존중하고 그 진가를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과학적인 지식과 기술의 역할은 자연의 균형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안식일은 인간의 생명속에 이룩 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의 회복을 자연계에까지 확장하도록 거들고 있다. (187.2)
 실제적인 면에서 안식일은 제칠일이 표명하고 있는 자연의 신학적인 가치들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귀한 기회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와같은 실제적인 기회들에 대해서는 청지기 직분, 한계, 탄복의 제목으로 논하게 될 것이다. (187.3)
 청지기 직분. 안식일 준수는 지구 전체에 대한 책임있는 청지기 직분의 한 실천이다. 이것은 하루 동안 땅과 백성의 이용을 포기함으로써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출 20:11; 31:17)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안식일에 모든 노예들 뿐만 아니라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신 5:14)에 대한 자유의 허락까지 포함하고 있다. 사무엘 라파엘 허쉬(Samuel Raphael Hirsch)가 잘 말했듯이 “우리가 안식일에 포획을 억제하고 있는 새와 물고기와 동물, 그리고 우리가 뜯어 내기를 삼가한 초목, 우리가 짜르고 깍고 섞으고 형성하기를 삼가한 물질, 이같은 모든 부위(無爲)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며 하나님을 이 세계의 창조주요 주인이요 주님으로 선언하는 행위이다.”63 (187.4)
 안식일에 인간과 천연 자원의 사용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전반적인 태도에도 변화가 따른다. 이로써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의 약탈자가 아니라 관리자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같은 교훈이 특별히 안식년과 희년과 관련된 입법 사항을 통하여 권고되었다. 제칠일 안식일의 자매 관계에 있는 이 두 제도는 히브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로 하여금 땅과 백성들을 모두 하나님의 소유, 곧 “토지는 다 내 것이요 너희는 나그네요. 나의 소작인들”(레 25:23, NIV; cf. 25:42, 55)로 인정 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제정된 것들이다. (188.1)
 안식년과 희년에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기 위하여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부채를 면제하고 경제적인 궁핍으로 팔려야 했던 토지들이 원 소유자에게 반환되었다(레 25; 신 15:1~18). 뿐만 아니라 토지를 과도하게 이용함으로써 박토가 되는 것을 보호하고 기력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하여 안식년에는 휴경토록 하였다.(“제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찌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레 25:4). (188.2)
 안식일의 이와같은 규범은 인간에게 허락된, 착취로부터의 자유와 안식의 권리를 토지에게도 허락해 줌으로써 토지를 자의식을 가진 인격의 소유자로 대접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안식일은 그 특유한 방식으로 오늘날 “생태학적인 문제”로 일컬어지는 것들을 취 급하기 위한 구체적인 도구들을 이미 구약 시대에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188.3)
 분명히 안식년 법령의 규범들을 현대의 사회 경제적 상황에 적용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도 필요한 일도 아니다. 일례로서 노예제도는 이미 중요한 사회적 문제가 아니다. 또 차관(借款) 문제만 하더라도 지금은 이미 개인으로부터 빚을 얻는 일이 거의 없고 공공의 재정 기관의 융자를 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신중한 관찰자라면 누구나 안식일과 안식년에 나타나 있는 바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청지기 직분의 원칙과 현재의 생태학적인 위기와의 상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88.4)
 우리는 우리가 성경의 전통적인 지침에 따라 안식일을 준수했다고 해서 인류와 그들의 환경에 어떠한 유익이 발생 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가 있다. 성서의 안식일 준수 지침에는 안식일 기간에 공장과 상점의 유흥 장소를 패쇄하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 또 오늘날에 와서 이것은 사회봉사에 필요되는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수백만대의 자동차들을 정지시키고 산업용 기계들이 정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188.5)
 그 결과 안식일에는 우리의 일부 대도시들의 대기를 유독한 매연 가스로 가득 채우고 있는 대기 오염의 흐름이 일시 중지될 것이다. 뉴욕시의 대기(大氣)를 조사한 한 과학 보고서는 이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이 하루 평균 흡입하는 유독 가스의 양이 담배 38개 비에 해당한다고 하였다.64 토지에게 있어서 안식일 준수는 매 칠년 마다 일년씩을 완전히 안식하도록 한다는 것을 뜻한다. 분명히 그와 같은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며, 경제적인 요인들도 무시될 수 없을 것이다. (188.6)
 좀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이것은 그 날 하루를 자연과 경쟁하면서가 아니라 자연과 교통하면서, 자극적인 오락으로 신체를 억압하면서가 아니라 안식일의 평화와 위안의 분위기 속에서 심신(心身)의 기지개를 펴면서 보낸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은 안식일 준수 방식에 대한 근대 과학의 답변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그 대답이 명확히 긍정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단언은 할 수 없으나 우리의 의료 및 생태학 관계의 과학자들은 우리의 개인 생활과 환경의 위태로운 균형을 회복시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계획의 실천을 적극 추천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188.7)
 

자연을 진정으로 찬미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초탈이 전제된다.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에 자연을 가만히 놔두어야 한다. 자연 위에 무엇을 세우거나 또는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자연을 바꾸는 일은 “안식”의 위반이 될 것이다. 안식일은 자연을 바꾸는 날이 아니라 자연을 하나님의 솜씨의 아름다움과 영광의 한 표현(시 91:1)으로서 찬미하는 날이다.
(189.1)
 한계. 안식일이 사람들과 토지 모두에게 제공하게 되어 있는 안식은 레스티 루티오 아드 인태그름(restitutio ad integrum)이라고 일컬어져 왔는데 그 뜻은 전체에 대한 회복이다.64 이 원칙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을 “축복”하시고 “심히 좋다”고 선언하셨을 때 그는 피조물들에게 잃어버린 기력을 재생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안식은 이와 같은 기력 소생의 과정을 안전하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며 시간은 안식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만약에 인간 오염의 유독 효과로부터 자연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매 칠일마다 하루씩(1년의 7분의 1)의 시간을 공기와 물에 배당시키고 매 칠년마다 1년씩 토지를 휴경토록 하여 상실된 기력을 회복토록 한다면 이러한 조처야말로 생태학적 위기의 해결에 기여하는 방책이 아닐까? (190.1)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안식일의 의식(意識)”이라는 것이다. 이 의식(意識)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공간과 주요 자원을 계속적으로 유린하는데 목적을 두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탐욕을 제한하는 데에 목적을 둔 청지기의 정신 곧 이 세계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진 청지기의 의식을 말한다. 안식일 계명은 그와 같이 책임 있는 청지기 직분의 정신을 가르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안식일은 안식의 명령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생산과 이득에 제한을 두도록, 그리고 만족할줄 모르는 인간의 탐심을 침묵시키도록 가르치고 있다. (190.2)
 심지어 자신들을 안식일 준수자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안식일의 이렇듯 중요한 기능을 인정하고 있다. 비근한 예로서 가톨릭의 학자인 A. 마틴(Marti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안식일은 기간을 의식한다는 뜻이다. 안식일은 한계를 의식한다는 뜻이다 ∙∙∙ 안식일에 대하여 사색을 한다는 것은 행복의 문제에 전념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또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질식시키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켜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명심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능률과 이득과 생산성이라는 미신의 포기를 뜻한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코 앞의 이익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뜻한다. 안식일을 존경하는 것은 인간이 한계를 가지고 있고 만약 그 한계를 벗어나면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뜻이다.66 (190.3)
 찬탄. 안식일이 물질 세계의 건설적 또는 파괴적 이용에 제동을 가한 제한으로 말미암아 자연에 대한 찬탄이 가능해졌다. 우리가 삼림의 나무들을 짤라 내는 데에 몰두하거나 또는 정원에서 화초들을 뽑아내는 데에 전념하는 동안에는 그 삼림이나 정원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가 없다. 진정으로 자연을 감상하고 찬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초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안식일이 우리에게 이러한 초탈(超脫)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 날에 그리스도인은 자연을 손대지 않고 놔둔다. 자연 위에 무엇을 건축하거나 또는 그것을 훼손시킴으로써 자연을 변경시키는 일은 “안식일”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안식일은 자연을 바꾸는 날이 아니고 자연을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아름다움과 영광의 표현으로 찬미하는(시 19:1) 날이다. (191.1)
 생태학적인 의식(意識)을 개발 시키려면 자연을 찬미하는 윤리의 회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알베르 까뮈(Albert Camus)는 말하기를 “자연이 더 이상 사색과 찬미의 대상이 되지 못할 때에 자연은 그것을 변모시키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는 행위를 위한 물질 이상의 것이 될 수가 없다.”고 하였다.67 세속적, 과학적인 세계관이 만연됨으로 말미암아 자연에 대한 찬미의 윤리가 상실됨으로써 자연에 대한 착취의 윤리가 판을 치게 되었고 이로써 인간은 자신의 서식지(棲息地)에서 이방인이 되고 말았다. (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