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6 장. 안식일:봉사의 기쁜 소식 IV. 우리의 거주 환경에 대한 봉사로서의 안식일
 1. 생태학적인 위기
 강요인가 신념인가? 천연 자원의 남용과 무제한한 착취야말로 지구 상의 생명의 존속에 대한 제일의 위협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래학자들은 인간이 자연의 신비를 밝혀 가는 바로 그 순간에 인간은 역시 환경적인 재해의 결과로 자연의 파멸의 위험을 가중시키고 있음을 경고하였다. 오늘날 위태로워진 생활 환경의 생태학적 균형에 대하여 염려하는 사람들이 교육 계획과 정책과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183.1)
 뜻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은 관심을 함께 표명하여 나서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창조의 선하심을 믿고 있고 또 하나님과 협력하여 전체 자연 질서에 생태학적 조화를 회복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환경적 위기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신학적 확신이 절대로 필요하다. (183.2)
 세속적인 이데올로기는 단지 백성들로 하여금 환경법을 어겼을 때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연이나 자연의 자원을 숭배토록 하는 일 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환경의 갈취, 오염, 파괴 행위의 일부를 억제 시킬 수가 있을 뿐 생명의 모든 형태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존경심을 유발시키지는 못한다. 두려움은 강요를 할 뿐 확신을 갖게 하지는 못한다. (183.3)
 폐암의 공포는 몇 사람으로 하여금 흡연을 중지토록 할 수 있을 뿐 수백만명의 애연가들로 하여금 금연의 결심을 갖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환경 오염의 해결이 영적 오염의 해결과 관련되어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자신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등 생물의 생명을 존중해 주기를 기대 할 수가 없다. 본질적으로 법률들은 인간의 이기적인 이해관계와 상충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184.1)
 궁극적으로 생태학적인 위기의 해결은 모든 인간의 행위의 지침이 되어야 하는 영적인 가치의 회복에서 찾아야만 한다. 헨리 H. 바네티(Henlee H. Barnettee)가 옳게 말했듯이 “사람들이 타인과 또 자신들의 환경에 대하여(위하여, 또 더불어)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주로 그들이 하나님과 자연과 자신들과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49 (184.2)
 사람이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창조계에 대해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행동을 하게 되려면 먼저 자신과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목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50 안식일은 신학적인 확신과 실제적 행동의 토대를 마련해주고 있기 때문에 생태학적인 위기를 해결하는데에 필요한 영적 가치들의 회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가 있다. (184.3)
 2. 하나님의 창조의 선하심
 자연의 가치. “기독교 교리와 인간 및 인간 환경의 문제와의 상관성을 조사 하기 위하여” 1971년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임명한 위원회는 그 보고에서 말하기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회복은 인류의 미래의 안녕에 대한 관건이 된다”51고 하였다. (184.4)
 지도급에 속하는 종교 사상가들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회복”을 환경 위기의 열쇠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과학과 공업기술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손상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의 선하심을 즐기려는 소망을 감소시켰다. 인격적인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앙을 비 인격적인 자연발생설의 개념으로 대체 시킴으로써 과학자들은 자연을 기술이 이용하고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자연은 하나님의 계시의 중재자(“너”)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경제적 착취의 수단으로 전락되었다.52 (184.5)
 안식일은 자연의 “성례전(聖典)적” 가치 즉 하나님의 임재와 아름다움의 중재자 또는 계시자로서의 기능을 회복시켜주는 효과적인 제도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과 궁극적인 회복에 있어서의 자연의 역할과 기능을 환기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태초의 완전한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계는 비록 죄로 말미암은 이변(異變)을 치르기는 했지만 하나님에 의하여 “심히” 좋게(창 1:31) 창조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인간과 하등 동물을 모두 포함한 이 세계는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확언하고 있다. (184.6)
 안식일은 이 세계가 처음에 완전하고 선했음을 지적함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계를 긍정하는 신앙, 즉 전체 자연 질서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신뢰를 갖도록 도전하고 있다.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성화(聖化)의 상징인 안식일(창 2:3)은 끊임없이 하나님은 이 세계로부터 독립적인 존재이면서 이 세계와 갈라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안식일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연 안에서, 자연을 통하여 창조주의 임재를 경험하도록 초청하고 있다. (184.7)
 안식일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연상하게 하고 미리 맛보게 함으로써(사 66:22~23)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이 세계를 존중하고 경탄하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의 영원한 즐거움을 위하여 이 세상을 그 원래의 완전함으로 회복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안식일에 의하여 표명된 자연의 신학적인 가치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연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자신과 미래를 유일하신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적 목적의 일부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더불어 꼭 같은 기원과 운명을 나누어 가진 이 지구를 착취하거나 또는 파멸시키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된다. (184.8)
 이원론적 오해. 자연의 가치는 자연의 구속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잘 파악될 수가 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모두 구원의 우주적인 차원을 희생시키면서 개인의 구원에 대한 강조에 치중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53 성자(聖者)들은 자주 이 땅 위에서 이 세상과는 초연하게 산, 그리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영혼만이 “천국”이라고 일컬어지는 추상적인 장소로 순례의 길을 떠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육체적인 몸을 이 땅에 남겨 두는 순례자로 묘사되고 있다.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풀라톤 사상의 영향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서54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성서적 주장이 아니다.55  (185.1)
 풀라톤 사상의 우주론적, 인간학적 이원론은 자연계에 대하여 경멸적인 태도를 발전시켰다. 이와 같은 타(他) 세계적인 태도는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요,” “여기서 나는 나그네일 뿐 하늘만이 내 집이다;” “땅은 황량한 사막, 하늘이 내집이다” “이 땅에 지쳐 ∙∙∙ 하늘을 바라본다.” 등이 기독교 찬송가 가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땅에 대한 이렇듯 경멸적인 태도는 히브리 찬송가인 시편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오히려 시편의 중심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솜씨에 대한 찬양이다. 그 일례로서 “안식일의 찬송시”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시편 92편에서 시편 기자는 악기를 연주하면서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시 92:4, 5)라고 찬송하고 있다.56 (185.2)
 시편기자가 이처럼 자연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자연계를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드라마를 위한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전체 드라마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사람을 낙원에서 자신의 환경에 대하여 응답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창조하고 있다.(창 2:15; 1:29~30).57 에덴의 위기가 발생하자 동산은 광야로 바꾸어 지고(창 3:17~19) 인간과 자연의 조화도 깨지고 말았다. 자연은 아담의 타락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그 결과만은 함께 나누어 담당하고 있다. (185.3)
 자연계의 위기는 계속된 인간의 불순종으로 더욱 가중되었다. 인간과 하나님의 격색(隔塞)된 관계는 인간과 자연의 소외된 관계를 낳았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창 4:8) 전체 인간은 너무나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대 홍수를 통하여(창 6~8) 질서의 일부를 회복해야 할 필요를 느끼셨다. (185.4)
 홍수 후 인류가 새로운 출발을 내딛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인류와 더불어서 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 곧 ∙∙∙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짐승들과 더불어”(창 9:10, 12, 15, 17) 언약을 체결하셨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하나님은 이같은 언약을 통하여 당신이 자연계의 규칙성을 보존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대 홍수로 말미암아 자연계에 가해진 혼돈이 결코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하셨다. 후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연 질서에게 주신 언약을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보증으로 제시하였다(렘 33:25, 26). (185.5)
 우주적인 구속. 홍수 이후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는 하나님의 처음 의도와 크게 달라지고 말았다(창 1:28~30). 신뢰는 두려움으로 바꾸어 졌다. “땅의 모든 짐승이 ∙∙∙ 너희를 두려워하리라”(창 9:2)고 되어 있다. 이 말은 인간이 이제 이 세계에 대한 청지기의 직분을 더 이상 수임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58 이 말은 이제 자연계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책임한 행위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186.1)
 그러한 예는 구약 성경에 수두룩히 있다. 일례를 들면 이사야는 말하기를 “땅이 또한 그 거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 음이라”(사 24:5~6)고 하였다.59 그러나 자연은 인간 반역의 결과로 인한 고통을 함께 나누어 가짐으로써 인간의 화해와 궁극적 회복에 까지도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속의 목적은 인간과 하등 동물, 즉 피조물 전체를 망라 하는 우주적인 것이다. (1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