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요한계시록 제22장 두 잔치
 요한계시록 19장은 아마겟돈의 전쟁으로 마지막 때의 시나리오의 막을 내린다. 바벨론을 지지한 자들의 비통한 조가(弔歌)의 장면은 이제 이 마지막 때의 배도한 종교 체제의 패망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환호의 장면으로 전환된다(계 19:1-10). 이 19장은 아마겟돈의 전쟁의 장면으로 종결되며, 그리스도가 전쟁의 왕으로 그의 백성을 악의 군사들에게서 구출하시는 싸움을 보여 준다(계 19:11-21). (291.1)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계 19:1-10) (291.2)
 요한계시록 19:1-10은 바벨론의 심판(계 17-18)과 아마겟돈 전쟁의 종결(19:11-21)사이에 끼여 있는 막간의 장면이다. (291.3)
 성경절 : 요한계시록 19:1-10

 (291.4)
 바벨론의 멸망에 대하여 기뻐함 (19:1-6)
 요한계시록 18:20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마지막 때의 바벨론의 멸망을 즐거워하라는 부르심이 있다. 요한계시록 19장의 전반은 이 부르심에 응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이 바벨론에 대한 승리를 즐거워하며 축하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 기쁜 축하의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요한은 계시록의 여러 부분에서 떼어 온 문구들을 모아서 하나의 일관된 묘사로 이 장면을 그렸다. 여기에서 묘사된 장면은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는 보좌실 장면을 반향한다. (292.1)
 요한은 큰 무리가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 19:1). 이 장면은 요한계시록7장의 큰 무리가 외치는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고 하는 장면과 흡사하다(계 7:9-10). 여기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구속을 받은 성도들이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 바벨론에 대한 그분의 의로우시고 공평하신 심판에 대하여 찬양하는 것으로 묘사된다(계 19:1-6). 여기서, 요한계시록 11:18의 약속인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를 성취시킨 것이다. 바벨론과 그의 지지자들은 땅을 망하게 하는자들이며, 이제 그들을 완전히 소멸시키셨다. (292.2)
 바벨론의 멸망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운 백성의 피를 갚으신 것이다. 마지막 때의 이 배도한 종교 체제는 하나님께 충성한 백성들의 피를 흘린 정죄의 심판을 받았다(계 18:24). 다섯째 인을 뗄 때에 박해와 순교를 당한 의인들이 제단 밑에서, 그들의 피를 갚아 주시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하나이까?라고 하나님께 탄원했다(계 6:10). (293.1)
 이제 바벨론은 몰락하였고, 의인들의 탄원은 응답을 받았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묘사된 기뻐하는 큰 무리의 중심이 순교를 당한 의인들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들의 환호는 원수를 갚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백성을 구원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환호이다. 이들의 구원은 원수들의 권력을 패배시키고, 바벨론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키므로 가능했다. (293.2)
 바벨론의 멸망의 연기는 “세세토록 올라가더라”(계 19:3)라고 했다. 일찍이 요한계시록 14:11에 기록된 예언이 이루어졌다. 바벨론의 멸망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다”라는 뜻은 다른 말로, 바벨론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며, 고대의 에돔(Edom)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과 비교된다(참고 사 34:8-10).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한 자들의 멸망은 영원한 것이다. (293.3)
 원수들에 대한 완전한 승리의 축하 행사에, 24 장로(온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표하는)와 네 생물(전사들을 대표하는)이 구속을 받은 의인들에 합류한다. 이들은 다 함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를 하며, 하나님의 앞에서, “할렐루야! 아멘!”이라고 찬송을 드린다. 이 기쁨에 충만한 축하 행사는 극치에 이르러,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를 시작하시도다.”라고 외친다(계 19:6). 이런 감탄의 외침은 일곱째 나팔 때에 선포된,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계 11:17)라는 선포를 반복한다. 마지막 때의 바벨론의 멸망은 이 땅에서 충만하신 능력과 권세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의 출발점이다. (293.4)
 혼인 잔치가 선포됨(19:7-9)
 여기서 계시의 장면은 이 계시록의 핵심으로 볼 수 있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의 연합인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전환된다(계 19:7). 요한계시록의 모든 사건들은 이 절정의 순간을 향해 움직인다. 이제 이 특별한 사건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발표가 있다. 이 발표는 기쁨의 환호와 축하를 불러일으킨다. 신부는 단장하고 준비되었다. 이제 신랑이 나타나면 혼인 잔치가 베풀어지는 순간이다. (294.1)
 여기에 묘사된 장면은 고대 이스라엘의 혼인 풍습을 반영한다. 결혼할 신랑은 신부의 부친의 집으로 찾아가 결혼 계약을 맺는다. 신랑이 신부의 아버지에게 결혼 지참금을 지불하면, 이때부터 신부가 신랑과 같이 살지 않을 지라도 이들은 법적으로 결혼한 부부가 된다. 이때 신랑은 자기 아버지의 집(본가)으로 돌아와서, 이들 신혼 부부가 살 집을 준비한다. 그리고 신부는 자기의 본가에서 혼인 잔치를 위해 준비한다. 양쪽의 준비가 끝나면, 신랑은 신부의 본가로 다시 와서 결혼 잔치가 벌어진다. 혼인 잔치 후에 신랑은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같이 살게 된다. (294.2)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기의 신부인 교회가 있는 땅으로 오셔서 혼인 계약을 맺으셨다. 갈바리에서 그의 생명으로 결혼 지참금을 지불하신 후,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부의 거할 곳을 준비하기 위해서,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셔서 신부를 자기 있는 곳으로 데려가실 것을 약속하셨다(요 14:2-3). 그의 신부는 자신을 준비하면서 땅에 남아 있다. 이 땅의 역사가 끝날 때,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셔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혼인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부인 교회와 연합할 것이며, 그의 신부를 당신의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갈 것이다. 요한계시록 19:7-9은 이 기쁨의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294.3)
 요한계시록은 신부의 비유를 들어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묘사한다. 이 기간 중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랫동안 기다린 그 사건을 준비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 그의 교회가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기를(엡 5:27) 바라신다. 여기 요한계시록 19:7-8에 그리스도의 신부는 혼인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했다. 이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계 19:8)고 있다. 이 신부의 옷은 자줏 빛과 붉은 옷을 입고, 화려하게 장식한 음녀 바벨론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계 17:4). 신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바벨론의 죄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의인들은 바벨론의 부정한 상태에 자신들이 물들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충성한 자들이다. 이제 이 의인들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295.1)
 그리스도의 신부의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계 19:8)이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자신의 행실을 입으리라는 것은 아니다. 이 성경절은 그 신부에게의로운 행실을 상징하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was given)라고 말한다. 계시록의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의 옷을 공급하시는데(계 3:18; 6:11), 그것은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희게(계 7:14; 22:14) 한 것이다. (295.2)
 그 신부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옷을 입고, 혼인 잔치를 위해 준비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생애에 있는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행위를 예시한다. 바울은 이 양자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선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하나님의 백성의 의로운 행실은 그들의 생애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의 결과이다. 또 의로운 행실은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복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외향적 현상이다. 이사야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며, ∙∙∙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였음이라”(사 61:10)라고 말하였다. (295.3)
 그 이상(異像)의 종결에서 천사는 요한에게 다음을 기록하라고 권고한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9:9).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험을 두 가지의 관점에서 묘사한다. 그들은 어린양의 신부이며, 또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는 자들이다. 첫째는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곧 이루어질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키며, 둘째는 그들이 초청에 응답하여 그 큰 날을 위하여 자신들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상기시킨다. (296.1)
 이 시점에서, 요한계시록 19장은 실제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묘사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랫동안 기다린 사건의 기약이 마침내 도달한 것을 공포할 뿐이다. 이 혼인 잔치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린양의 신부(계 21:9)와 아내로 표현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후에 이루어진다.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과 새 예루살렘은 같은 존재(동일제)로 표현된 것이며,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그리스도는 영원한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2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