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103편 감사의 태도
 시편 103편 (352.1)
 이 찬양의 노래는 하나님께 대한 가슴 깊이 젖어 드는 감사의 정 때문에 시인은 은하계에서는 “일등성”(D. Kidner)으로 불리워 왔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 또는 찬양하도록 권고하고 있다(1절)! 그는 이와 병행하는 2절의 표현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로 그 이유를 더 설명하고 있다. 시인은 분명히 자신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슴속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감사를 환호로 나타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절). (354.1)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의 모든 은혜를 잊어버림이요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차 아니함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하나님에 관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찬양은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행적을 인식하고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와 지혜를 찬양으로 화답할 때 시작된다. (354.2)
 찬양하지 않는 태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부족에서 야기될 수는 없다. 모세는 오히려 이스라엘이 자칫 물질주의 정신에 굴복할 수도 있음을 경고했다. (355.1)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신 8:12~14).
(355.2)
 하나님을 잊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행적에 대해 침묵을 지킬 때 분명해진다. 웨스터만(Claus Westermann)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찬양의 비결은 곧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는 힘이다. 인간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The Psalm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80] p. 6).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하여 그분을 찬양하는 것은 가장 차원 높은 기도의 형태이다. 찬양은 우리의 애통과 탄원의 기도를 초월한다. (355.3)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서, 우리 존재의 의미와 구원을 위해서 창조주께 온전히 의지하는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355.4)
 찬양의 이유
 다윗은 그가 맛보았던 은혜, 그의 생애를 이렇듯 풍족하고 복된 경험으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열하고 있다. (356.1)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 103:3~5)
(356.2)
 이 기분 들뜨게 하는 축복은 인간의 모든 필요를 다 포함한다. 그것은 그의 생에 대한, 영원에 대한 포부를 성취시켜 준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죄악을 사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실로 모든 사람들의 가장 큰 바램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영혼과 마음에 평화를 가져 온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 오직 그분만이 영혼에게 당신의 용서를 확신시켜 주실 수 있다. 시편 32 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복한 후에 오게 되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의 한없는 은사를 강조했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심으로 더 이상 우리의 죄를 헤아리지 않으신다(시 32: 1, 2). (356.3)
 용서 없이는 인생이 자유롭고 기쁠 수 없으니, 이는 죄가 있는 곳애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생애를 새로운 장래, 새로운 소망으로 예비해 주신다. 용서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을 가져다 준다. 그때에야 비로소 영혼은 존재의 기쁨과 찬양으로 넘치게 된다. 하나님과 화합한 후에야 인생이 진정으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현존하는 삶의 기쁨 저 너머에 있는 영생의 확신과 우리의 생명력을 “독수리같이”(5절) 새롭게 해주시는 하나의∙∙∙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다. (357.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 40:31)
(357.2)
 독수리는 백 년을 살고도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고 한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마음에 들어올 때 이것은 인간의 품위와 목표, 생명력과 부력(浮力)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제 다윗은 받은 은혜 하나를 더 첨가하고 있다.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4절). 이 표현은 다윗이 실제로 죽음으로부터의 자신의 구원을 미리 분명하게 보았다 할지라도—죄 사함과 영적 치유 이후—어쩌면 그의 치명적인 병으로부터의 육신적 치유를 설명하는 것이리라(시 16:9~11; 49:7~9, 15; 73:24과 비교).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 현재, 그리고 영원한 미래를 포함하므로! (357.3)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찬양함
 다윗은 자신의 용서와 치유의 경험을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오랜 역사의 관점에 올려놓았다.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필요의 순간에 은혜롭고 연민에 찬 구원자가 되어 주셨다. (358.1)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시 103:6, 7)
(358.2)
 애굽으로부터 약속의 땅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의로우심 문자 그대로는 ‘옹호하심’은 압제에 눌린 당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충실한 언약의 표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시편 기자는 모세 이후의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그 자체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하나의 이유로 보고 있다. 하나님의 품성은 이스라엘이 겪은 하나님과의 경험에서 명백히 나타났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둘러싸고 춤을 추는 소름 끼치는 배도를 이미 행한 후에도 모세는,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는 놀라운 소식과 함께 시내 산으로부터 내려왔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의 죄 의식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뿐이었다. 죄는 하나님을 원수로 본다. 그러므로 이제 다윗은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358.3)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8)
(359.1)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의 사랑은 영원하시다. 그분의 “노”는 당신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배은에 의해서만 일어난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격동시켰다(삿 2:12; 왕하 17:7; 시 106:29; 렘 44:8), 또는 여호와의 진노를 “불러일으켰다”(대하 36:16; 시 78:58)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의 목적은 인간을 상처내기보다는 오히려 치유하기 위함이며, 당신의 언약의 백성을 죽이려 함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호 6:1, 2 참조). (35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