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7 장  재창조의 안식일과 구속의 실로암 못
 아무도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담력을 얻지” 못하면 원수를 사랑하고 아무 염려 없이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여 고른 숨을 쉬며 사는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진실로 재창조된 마음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에 피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히 10:22) 사람들이다. (205.1)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예비하고 창조한 안식의 큰집은 영적인 나라이다. 물과 성령과 피로 거듭난 사람들의 시야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이다. 이 사람들에 비교한다면 옛 사람은 눈 먼 사람들이다. 세속에 속하고 육에 속한 옛 사람은 영적인 나라와 영적인 사물들에 대해 눈 먼 사람들이다. 빛의 나라에 소경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소경이면서 “우리도 소경인가”(요 9:40) 라고 항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우리가 소경이다”라고 고백하였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을 수밖에 없는”(요 9:41) 사람들이다. (205.2)
 그리스도의 새 나라에 다시 태어난 안식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흙을 이겨 그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어 보게된”(요 9:6, 7, 11) 사람들이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요 9:7). 하나님 아버지가 보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못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흘리신 피의 샘이다.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고 예언된 그 샘이다. 그리스도의 “두 팔 사이에서”(슥 13:6) 터진 샘이다. 이 샘이 우리의 “양심과 몸을 맑은 물로 씻어 양심의 악을 깨닫게 하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샘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안식의 성소로 나아갈 담력을 주는 예수의 피의 샘이다. (205.3)
 재창조된 세계의 제칠일 안식일은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샘을 상징하는 날이다.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마음의 세계에 눈이 먼 사람(요 9:1 참조)에게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 보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던”(요 9:14) 것이다. 이전 창조의 첫 제칠일 안식일은 태초의 세계가 멱감았던 원초적인 시간의 샘이었다. 옛 사람들은 제칠일 안식일마다 이 원초적인 시간의 샘에서 자신들의 죄된 시간들을 씻고 정화된 시간을 다시 돌려 받았다. (206.1)
 그러나 그리스도가 재창조한 세계를 거룩하게 목욕시킨 저 십자가의 실로암 못에 비교한다면 이전 창세기의 제칠일은 하나님 나라 시간의 그림자일 뿐 참 형상이 아니다. 새로워진 제칠일 안식일은 창세기의 제칠일 안식일의 차원을 훨씬 넘은 시간을 상징한다. 재창조의 제칠일 안식일은 십자가의 실로암을 상징하는 구속의 시간, 성화의 시간, 다시 태어남의 시간, 다시 봄의 시간이다. 우리가 죽고 장사되고 다시 부활하는 침례의 샘을 상징하는 시간이다. 그리스도의 피의 샘을 상징하는 시간이다. (206.2)
 이 실로암에서 씻어 보게 된 사람은 죄를 씻어 하나님 성소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실로암 못에서 씻어 마음이 청결하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것”(마 5:8)이며, “볼 수 있다”(요 3:3).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요 3:3, 5)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물과 성령과 피”“거듭난 사람”(요 3:3)이다. (206.3)
 진흙을 이겨 눈 뜬 안식일의 새 사람
 요한복음 9장에서 실로암으로 가서 씻어 보게 한 사람은 동시에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 눈을 뜨게 한” 사람이다(요 9:11, 14, 15).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으로 가서 씻으라”한 소경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요 9:1) 이었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은 듣지 못한 일”(요 9:30) 이다. 흙으로 빚은 창세기의 눈감은 사람이 하나님의 호흡을 받고 눈에 묻어 있는 흙을 씻어 눈뜨고 일어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사건은 태초에 “빛이 있으라”(창 1:3) 하신 아들 하나님이 세상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요 12:46) 그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도록”(요 8:12) 세상과 사람을 재창조하고 계심을 세상에 나타낸 사건이었다. 이 세상에 이미 재창조의 “빛이 어둠에서 비추고 있었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요 1:5) 뿐이었다. (207.1)
 이전의 창조에서도 흙 사람 아담은 눈에서 흙을 털어 내고 눈을 떴다. 진흙으로 빚은 인간은 진흙에 빚진 인간이다. 진흙에 빚지고 진흙을 진 인간, 그리고 진흙에 패배한 인간이 진흙을 “이겨” 눈을 떴다. 진흙에 승리하여 눈을 떴다. 눈뜨고 일어났다. 흙이 눈에 들어가는 날이 죽는 날이다. 눈에 들어간 흙을 이기고 승리하여 사람은 부활로 눈뜨고 일어난다. 실로암은 빚진 흙을 씻어내고 이겨내는 샘이다. 눈을 뜨고 보는 것이 태어나는 것이다. 보게 하는 것이 구원하는 것이다(막 10:51, 52). 하나님은 보시는 하나님이고 보는 자의 하나님이다. 그는 보는 자의 하나님으로써 역시 산 자의 하나님이다. 보는 자가 산 자이다. 또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곧 보는 것이다. 육으로 태어난 자는 육의 것을 볼 것이며 어둠으로 태어난 자는 어둠의 일을 볼 것이다. 성령으로 태어난 자는 성령의 일을 볼 것이다. (207.2)
 다시 나고 부활하려면 죽어야한다. 다시 보려면 눈이 어두워야 한다. 창세기의 첫 아담은 눈뜨고 일어나기 전에 눈감은 진흙의 사람, 앞 못보는 죽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자 눈에 흙이 들어가 있는 죽은 사람이 눈을 뜨고 살아났다. 요한복음 9장“태어나면서 소경인” 사람은 숨을 쉬고 있었을 뿐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었다. 죽은 자와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었다”(요 9:3).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사람을 창조하고 재창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와 재 창조주로써 하나님이시다. 사람을 태어나게 하고, 사람으로 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은 하나님이 그를 눈뜨고 보게 하기 위하심이었다.” (208.1)
 하나님이 이 소경을 눈뜨게 하고 재창조하기 위해서 이 소경에게 먼저 해야할 “하나님의 하실 일”은 무엇인가? 이 소경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로 말미암아 치료되고 재창조되어야 할 첫 사항이 무엇인가? 이 소경은 먼저 자신의 눈먼 사실에서 눈먼 소경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감은 사실에서 눈감은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눈에 흙이 들어간 눈먼 사람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눈먼 사람들의 대표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빛으로 오신 어둔 세상의 모든 영적 소경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모두 “차라리 소경이 되었다면 죄가 없었을 것이나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남는”(요 9:14) 사람들이다. (208.2)
 예수님의 이같은 지적은 창세기의 배경에서 당신의 재 창조적 사명을 암시하는 말씀이었다. 진흙으로써의 제 본성과 처지를 망각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안다”(창 3:10)고 한 첫 창조의 옛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나는 소경이 아니며 눈먼 것을 알지 못한다”(계 3:17)고 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209.1)
 자신의 눈멀음에 대한 부인, 진흙에 빚진 자신의 처지에 대한 눈감음이 인류에게 가져온 재앙은 무엇인가.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의 가난과 마음의 청결을 상실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사이에 숨는”(창 3:10) 존재가 되고 말았다. 물과 성령과 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순결한 삶을 버리고 선악과로 거듭나고 음식물로 거듭나고 육체로 거듭나서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아는” 수치의 삶으로 전락하였다. 이것은 오히려 “네 눈먼 것과 네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계 3:17) 태도이다. 본다는 망상을 가진 자, 소경됨을 고집하는 자들에게 “너희 죄는 그저 있고” 소경 신세는 계속될 뿐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본다고 하는 자들을 소경 되게 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세상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함이다”(요 9:39). (209.2)
 “보지 못하는 자들,” “스스로 보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자들,” “날 때부터 소경 되었다”고 제 눈먼 처지를 고백하는 소경에게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 하신다면” 하나님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소경이 하나님에게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함을 얻을 안약”(계 3:18)은 무엇인가? 흙이다.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는 것”(요 9:6) 이다. 나면서 소경된 자를 치유하는 첫 번째의 조치는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창 3:19)는 사실을 일깨우고,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는 것”(창 3:23) 이다. 소경된 사람에게 진흙에 빚진 처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실로암으로 가서 그 진흙의 부채를 씻어내고 진흙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는 것이다. “실로암으로 가서 씻으라”(요 9:7)고 말하는 것이다. 실로암의 피 못에 힘입어 진흙을 “이겨” 내게 하는 것이다. (209.3)
 안식일은 사람으로 하여금 제 근본인 흙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날이다. 사람은 흙이고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에 새롭게 눈떠야하는 날이다. 진흙에 불과한 제 처지에 눈감았던 삶을 회개하는 날이고 진흙에 빚진 삶에 대한 자각을 되찾는 날이다. 진흙을 빚어 눈에 바르고 진흙에 빚진 마음으로 실로암을 찾는 날이다. 실로암을 찾아 진흙에 빚진 삶을 씻어내는 날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날이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한 날이 안식일”(요 9:14)이라고 하였다. (210.1)
 안식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실로암의 피 샘에서 씻고 거듭나 안식의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안식의 나라를 보고 그 나라로 들어가는 날이다. 이 안식의 집으로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창조의 제6일에 자신의 “육체 가운데로 열어 놓은 새롭고 산 길이다”(히 10:20). 안식일은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담대히 들어가는 하나님의 성소이다(히 10:19). 예수가 나무에 매달린 골고다의 동산에 있는 집이다. 나무에 달린 예수의 두 팔 사이에 있는 실로암의 피 못이다. 이 샘에서 우리가 씻어 눈을 뜨고 거듭나고 숨을 돌린다. 그곳에서 안식의 하나님의 낯을 뵈고 하나님의 안식의 나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우리가 안식한다. 예수 안에 있는 십자가의 이 “소망의 담대함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예비한 안식의 처소이다(히 3:6). 제칠일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아버지 집에 예비한 안식의 집을 상징하고 예수 안에 우리가 누리는 숨과 쉼의 벅찬 새 삶을 대표하는 날이다. 예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의 새 삶을 상징하는 날이다. (2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