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7 장  재창조의 안식일과 구속의 실로암 못
 안식일, 예수가 예비한 내 아버지 집의 처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4). (199.1)
 우주는 큰집이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이 집을 창조하셨다. 우주는 아버지 하나님이 지으신 “내 아버지의 집”이다. 제칠일은 아버지 하나님이 지으신 시간의 큰집이다. 거할 곳이 많은 집이다. 모든 날들이 쉬는 큰 날이다. 시간의 우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 집에 우리들의 처소를 예비하셨다. 그곳은 그리스도의 “나 있는 곳”이다. 그곳은 우리들이 쉴 곳이요, 우리들이 숨쉴 곳이요, 우리들의 살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우리들을 인자의 처소, 곧 “나 있는 곳”“있게 하려고” 우리를 자기에게로 영접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199.2)
 그리스도가 쉼 없고, 숨 없는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고 우리를 영접하는 이 안식의 처소는 참으로 “거할 곳이 많은” 시간의 큰집이다. 그런데 이 집은 어디에 있는가. (199.3)
 예수가 재창조한 구원의 나라에서는 아버지 집과 아들의 집이 따로 있는 세계가 아니다. “너희가 아들을 알았으면 아버지도 안 것이다”(요 14:7).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아버지]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7).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요 14:10)하면, 그는 그리스도가 재창조한 구원의 새 세상에 눈 뜬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 집에 예비하신 처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처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식의 집을 본 자가 “거할 곳이 많은 내 아버지의 집”을 본 자이다. 결국 예수 안에 있는 “소망의 담대함을 끝까지 견고히 잡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집”이다(히 3:6). 예수가 왕으로 다스리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요, 예수가 예비한 처소이다. (200.1)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집은 마치 밭 갈던 농부가 어느 날 뜻밖에 땅 속에 묻힌 보화를 발견하듯이 발견한 세계이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의 눈에 드러난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마음의 하늘이고 마음의 땅이다. 세상과 육체는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세계이고 집이다.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줄도 알지 못한다”(요 17:25; 마 16:17). 세상과 육체는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요 16:3; 14:17). 오직 아들이 선택한 “너희는 저를 알고” “저를 본다”(요 14:17, 19).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요 너희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요 14:17).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여 너희에게 나타내시기” 때문이다(요 14:21). (200.2)
 진실로 그리스도의 안식의 집은 재창조된 사람들에게 나타난 세계이다. 하나님이 “물과 성령과 피”(요일 5:8)로 거듭나게 하신 사람들의 눈에 드러낸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의 눈 앞에 드러난 하나님 아버지이며 그 아들이며 그들의 집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의 눈앞에 벗겨진 신비한 세계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유업으로 물려받은 집이요 삶이다. 그러나 낙타같이 큰 부자들의 삶에서는 바늘구멍같이 작고 좁게 보이는 문으로 열려 있는 세계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마음에 예비된 그리스도의 집, 곧 그리스도의 충만한 숨과 쉼의 삶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날이다. 진실로 거할 곳이 많은 큰집이다. 공간의 세계에서 삶과 쉼의 터를 빼앗긴 억조 창생이 모두 몰려와도 부족이 없이 넉넉하게 숨을 얻고 쉼을 얻을 시간의 큰 바다이다. 은혜의 대 우주이다. (200.3)
 안식일의 집으로 가는 십자가의 길
 안식일의 새 집으로 가는 길은 “너희가 알고 있는”(요 14:14) “좁고 협착한 길이다”(마 7:13, 14).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예비한 길이다. 그가 수난 주간의 제 6일, 곧 예비일에 십자가로 예비하고 십자가로 “다 이룬” 길이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가 “저희를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한” 길이요, “저희도 진리를 거룩하게 한 길”(요 17:19)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한”(요 17:21) 대속의 길이다. (201.1)
 땅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다 내게로 영접하여” 쉼을 얻게 하며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를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한”(요 17:24) 길이다. (201.2)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하나님의 “새 일”이며 재창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복음서는 재창조의 창세기이다. 그 중에서도 요한복음은 보도 형식에 있어서까지 창세기의 창조 소식을 반영하고 있다. “태초에 빛이 어둠을 비추었다”(요 1:5)는 서두로 시작하여 “다 이루었다”(요 20:30)는 십자가 선언으로 말미를 장식하였다. 세상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시작하여 재창조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6일에 십자가의 재창조 위업을 “다 이루심으로써” 그리고 제칠일에 쉼의 세계로 들어가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재창조 주간 7일이 끝난 것이다. (201.3)
 이전 창조와 재창조가 대조되는 곳은 또 있다. 이전 창세기의 아담은 에덴 동산의 선악과에서 시험을 받았고 재창조의 창세기인 요한복음의 예수 곧 둘째 아담은 골고다의 동산에 있는 십자가의 나무에서 시험을 받았다(요 19:28, 30, 23, 41; 행 5:30). 첫째 아담은 창조주간의 제6일에 자신의 갈빗대를 열어 제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인 여인을 낳았다. 이 여인은 아담이 제 가슴에서 예비하고, 성도의 큰사랑과 큰 고통과 큰 인내(계 14:12)로 예비한 사람이다. 제칠일을 위해 예비한 사람이다. 제칠일의 사람이다. 첫째 아담의 속 사람이다. (202.1)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도 재창조의 제6일에 제칠일의 신부를 예비하였다. 옆구리를 열고 피를 쏟아 예비하였다. 사람의 아들의 심장에서 낳은 이 신부가 구속받은 새 인류이다. 재창조의 세상을 유업으로 받을 교회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큰 고통과 큰 인내로 낳은 마음의 사람이다. 심령이 가난한 인간이다. 이 신부, 이 사람, 이 교회가 제칠일의 사람이요 어린양의 신부이다. 어린양의 침궁에서 어린양의 안식, 곧 그의 깊은 호흡으로 영접된 언약의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제6일에 십자가의 피로 거룩하게 씻은 합일의 성소가 곧 제칠일 안식일이며, 이 성소에서 더불어 한 육체를 이룰 거룩한 합일의 배필로 영접한 사람이 제6일에 십자가의 옆구리에서 낳고 씻은 제칠일의 신부이다. (202.2)
 예수가 십자가에서 “다 이룩한” 재창조의 세계는 이전의 세계보다 “더 좋은 세계”이다. “거룩한 세계”이다. 이 세상에 비교하면 이전 세계와 그 만물은 모두 그림자일 뿐 참 형상이 아니다(히 10:1).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예비한 새 안식일은 재창조를 기념하고 재창조의 세계와 삶을 구가하고 그 삶을 대표하는 날이다. 그리스도의 “내 안식”의 날이다(히 4:5). 이 안식일의 안식에 비교한다면 “여호수아가 준 안식”이나 아담이 누린 안식일 안식은 모두 그림자일 뿐 하나님의 날의 “참 형상”이 아니다. (203.1)
 재창조의 제칠일 안식일은 새 세상의 새 언약을 나타내는 날이다. 새 언약은 “더 좋은 언약”(히 7:22)이다. 이 새 언약에 비교한다면 옛 언약은 모두 그림자일뿐 참 형상이 아니다. 사람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히 9:10) 맺은 언약이다. 새 언약은 또 “주께서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맺은 언약과 같지 않다”(히 8:9). 새 언약은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흠 없는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룬”(히 9:14, 12) 언약이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 백성이 되게 한”(히 8:10) 언약이다. (203.2)
 새 언약은 “자신의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려야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취한 약점 많은 대제사장”(히 7:27, 28)이 맺은 언약이 아니라, “하늘의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히 8:1) 우리의 “더 좋은 중보자”(히 8:6)가 우리와 맺은 언약이다. 죄 많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소에서 맺은 언약이 아니라 “손으로 짓지 아니하고 이전의 창조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온전한” 성소(히 9:11)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맹세의 말씀”(히 7:28)과 “자기의 피”(히 9:12)로 세운 언약이다. (203.3)
 재창조의 새 안식, 곧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예비한 언약의 성소는 오직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들어가는 성소”(히 10:19) 이다. 그 안식의 성소로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그리스도의 육체이다”(히 10:20).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찢어졌고, 그 찢어진 육체에서 그가 예비한 안식의 성소로 들어가는 산길이 새롭게 열린 것이다. 예비의 날은 십자가의 날이며, 예비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예비의 주님은 십자가의 주님이다. (203.4)
 실로암에서 씻어 눈 뜬 안식일의 새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예비하고 창조한 안식의 새 집은 새로 태어난 새 사람이 보고 알고 사는 집이다. 이 새 사람에 비교한다면 옛 사람은 그림자 일뿐 하나님의 “참 형상”이 아니다. 옛 사람은 흙으로 잉태된 흙의 사람이지만 재창조의 새 사람은 “성령으로 잉태된 거룩한” 사람이다. 성령으로 잉태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재창조된 새 세상의 사람을 대표하고 재창조의 안식일의 사람을 대표한다. “물과 성령과 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며, “물과 성령과 피로” 하나된 거룩한 합일의 사람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다. 평화의 사람이다. 인내의 사람이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다”고 내놓을 만한 사람이다. 애통과 고통과 사랑으로 불의를 참아내고 이겨낸 사람이다. 눈물과 긍휼의 사람이다. 자기 희생의 사람이다. 밀알을 땅에 던지듯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이다. (204.1)
 새 사람은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고통의 심장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이다. 속이 썩어 다시 살아난 사람이다. 가슴에서 피를 쏟아 태어난 사람이다. 예수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예수의 피 뿌린 마음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이전 창조의 옛 사람도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것으로는 완전히 태어나지 못하고, 어머니의 가슴에서 그 가슴의 흰 피, 곧 피 젖을 먹고 온전히 태어났다. 그러나 어머니의 가슴에서 젖을 먹고 태어난 옛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심장과 옆구리에서 다시 태어난 재창조의 사람에 비교한다면 영적인 사람의 그림자일 뿐 참 형상이 아니다. (2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