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4부 거룩한 열성 제20장 속죄는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스콧 오그레이디가 보스니아에 숨어있을 때 그는 미국의 보호 밖에 있었다. 그가 미군 해병대 헬기 안에 들어왔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미국의 보호 아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이 보스니아에 있었다. (144.1)
 아드리아 해의 헬기 항모로 돌아오는 길에 저공비행을 하던 헬기는 소형 SA~7 미사일 공격과 함께 총격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 미사일은 빗나갔지만 총알 한 발이 헬기 안까지 들어왔다. 그 총알은 통신장비를 망가뜨리고 안에 타고 있던 해병 엔젤 카스트로 쥬니어(Angel Castro Jr.) 병장이 입고 있던 방탄조끼 뒤로 튕겼다. (144.2)
 조종사는 총격과 미사일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헬기를 상하좌우로 흔들며 갈지자로 아주 거칠게 몰 수 밖에 없었다. 때때로 전선을 피하기 위해 갑자기 위로 튀어올랐다. 이후에 한 해병대원은 이렇게 언급했다. “정말 끔찍한 비행이었습니다. 내가 타본 것 중에 가장 거친 헬기 비행이었습니다.” 그리고 헬기가 아드리아 해에 도착하자 오그레이디와 구조대원들은 안전할 수 있었다(Time, 1995. 6. 19. 26). (144.3)
 오그레이디의 안전한 곳으로 귀환은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계별로 일어났다. 결정적인 순간은 그가 헬기에 탑승할때였다. (144.4)
 그러나 그가 완전히 안전한 곳에 있으려면 갈 길이 멀었다. 요기 베라(Yogi Berra—미 프로야구 뉴욕 양키스 팀의 전설로 남아 있는 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게임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 게임은 끝난 게 아니다.” (145.1)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때였다. 만약 그분께서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연합되는 것과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희망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일하게 우리를 속죄하는 희생 제물의 죽음이었다(히 9:28).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고 돌아가셨을 때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완벽한 준비를 마치셨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는 십자가에서 완비되었다. (145.2)
 모든 속죄는 십자가에서 들려진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러나 이 속죄의 이야기는 이천 년 전 예루살렘 영문 밖 언덕에서 끝난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늘날의 우리도 속죄하셨기 때문에 계속된다. 속죄는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과 다시 연합하기까지 단계적으로 진행해 나가는 과정이다. (145.3)
 속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이라는 점에서 십자가는 속죄의 끝이 아니다. 우리가 십자가 사건에 기초하여 일생 동안 하나님과의 변화된 관계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오래전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어떻게 속죄를 받을 수 있겠는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치료되고 있는 한 속죄사역도 계속된다. (145.4)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과의 화목(reconciliation)을 가능하게 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1~22). (145.5)
 그러나 화목(reconciliation)은 십자가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만약 십자가에서 화목이 끝났다면 왜 바울이 백성들이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고했겠는가? (146.1)
 속죄가 십자가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개념은 성경의 또 다른 증거와 일치한다. 첫 번째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7,18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에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것도 망하였으리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십자가에서 속죄가 완전히 이루어지고 끝났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 없이 단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만 하셔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바울의 이 말은 틀린 말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원을 위해서 부활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속죄사역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지속될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필요한 동시에 그분의 살아계심도 필요하다. (146.2)
 히브리서 7장부터 10장을 보면 그리스도는 그분의 승천 이후에도 고대 이스라엘 성소를 통해 예시된 하늘의 참 성소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사역하고 계신다. 그 곳에서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앞에 나타나셨다(히 9:24). 자기 피로 우리를 향한 영원한 속죄를 얻기 위하여(12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를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14절; 참고 13절)도록 사용하셨다. (146.3)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한 풍성한 준비를 하기 위해 죽으셨으며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변화의 혜택을 나누어/적용시켜 주셨다. (147.1)
 비유로 이해해 보자. 그리스도께서(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하여)은행에 돈을 예치해 두셨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좌에서 돈이 나갈수 있도록 수표를 써 주신다(그분의 중보사역으로 그 혜택을 나누어 주신다). 우리가 구원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준비와 분배 모두 필요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덮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돈”을 은행에 넣어놓으셨다. 거기에는 구원받을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만큼 충분하다. 그러나 돈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도 수표를 써주지 않는다면 이 막대한 계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미국에서는 자신의 은행계좌에 돈을 예치한 다음 그 계좌에서 인출 할 수 있는 개인수표를 소지하면서 필요시 수표에 필요한 금액을 적어 현금처럼 사용하거나 타인에게 줄 수 있다.—역주) (147.2)
 신약의 증거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과 같이 고대 이스라엘의 속죄제에는 제사장의 중보가 필수적인 요소로서 포함되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은 성소로 희생제물을 가지고 와서 그 머리에 손을 얹은 후 그 제물을 죽여야 했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 피를 단에 적용하고 그 기름은 단 위에 불살라야 했다(레 4:22~35). 이 제사의 결과는 이렇게 요약된다.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26절, 참고 31, 35절) (147.3)
 속죄는 죄인의 손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짐승의 죽음으로 끝마쳐진 것은 아니었다. 죽음은 하나님의 용서로 이어지는 제사장의 중보를 가능하게 하는 피를 제공했다. (147.4)
 이 중보가 바로 “속죄” 사역으로 불리는 것이다. 중보는 속죄하는 희생 제사의 한 부분이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짐승의 제사의 의미를 이루었기 때문에(요 1:29)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제사와 분리된 국면으로 보는 것보다는 그분의 희생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포함되어야만 한다. (148.1)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제사에 개인적으로 신실하게 참여해야만 했다. 신실하게 참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 백성들은 짐승을 성소로 가지고 와서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얻고 그것을 잡음으로 제사에 참여했다. 제사장이 죄인을 위한 제사를 모두 마쳤을 때, “그가 사함을 얻”었다(레 4:31). 다시 말해 죄인은 하나님께 직접 용서를 받게 되었다. (148.2)
 희생제물의 죽음과 제사장의 중보가 그/그녀를 대신해서 수행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읽으시고 위선은 가납하지 않으신다(사 1:10~17). 위선은 속죄를 방해하거나 무효화한다. (148.3)
 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에서 중보하고 계신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회개—죄에서 돌이키는 것—의 선물을 신실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용서를 받을 수 없다(행 5:31). 시편 기자가 알았던 것과 같이 우리가 우리의 죄를 포기지 않는다면 용서를 포함한 다른 것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다(시 66:18). (1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