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6 장. 안식일:봉사의 기쁜 소식 III. 타인에 대한 봉사로서의 안식일
 안식일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자신을 발견하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발견하도록 돕고 있다. 또 안식일은 하나님의 의지와 은혜에 대한 생생한 이해와 확증을 갖도록 도와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돕는 손을 내밀도록 한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의 자기 본위적 위안이 아니라 타자(他者)중심의 봉사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신앙은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타자 중심적이다. 기독교의 창건자는 지구에서 이국적인 휴가를 즐김으로써,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을 부유케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또 그 생명을 더욱 “풍성히”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요 10:10). (173.1)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의 정신이 특별히 안식일의 제도를 통하여 들어 났음을 보았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기운을 돋우기 위하여가 아니라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누어 주시기 위하여 “안식 하셨다.” 창조의 일곱째 날에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풍요한 생명의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인간적인 시간의 한계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은 이로써 그의 피조물들에게 풍요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즐겨 인간의 육체 속으로 들어 가시기 까지도 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시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하나님의 사랑의 구현이며 생생한 계시인 것이다. 특별히 안식일에 인간의 영적, 육체적 필요를 위해 봉사하심으로써 구주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으로 보여 주셨다. (173.2)
 1. 나누어 주기 위한 시간
 안식일에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사랑으로 인한 축복을 기념하는 행위는 이미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시간과 신학적 동기를 부여해 준다. 안식일에 애굽과 죄의 멍에(신 5:15; 눅 4:18; 13:16)로 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축하는 신도는 동료 인간의 필요에 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모본을 실천하려는 강한 의욕을 갖게 된다. 안식일 계명은 안식일에 동정어린 관심을 받아야 할 대상자들의 목록을 꽤 장황히 열거하고 있다. 이들 대상에는 아들, 팔, 남종, 여종, 숫소, 암소, 가축, 나그네(신 5:4; 출 20:10; 23:12)가 포함되어 있다. (173.3)
 안식일의 이같은 인도주의적 기능은 이제 와서 거의 잊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의 준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는 날이기 보다는 자기 의(義)를 내세우는 날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안식일 봉사를 통하여 안식일 계명의 진정한 의도를 밝히고자 고심하셨다. 안식일의 인도주의적인 봉사를 단지 위급 상항에만 국한시켜 버린 당시의 율법주의적 해석을 중화(中和)시키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급성 환자가 아니라 만성적 질환의 소유자를 안식일에 치료해 주신 것이다. (173.4)
 그 좋은 예가 바로 5장(章)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 있는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여인”을 치료한 경우이다. 회당장은 자기가 볼때 그러한 “일은 엿새 동안에 할 것이고 안식일에는 말아야 할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치료 행위에 반대하였다(눅 13:14). 그리스도는 청중들에게 안식일에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관습을 상기시킴으로서 이같은 그릇된 인식을 반박하셨다. 만약에 동물들의 매일의 필요들이 충족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라면 “18년 동안 사단에게 메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메임에서 푸는 것은 더더욱 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눅 13:16). 아마 어느 누구도 안식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축복들을 나눠주는 날로 만들어(요 9:4) 안식일이 가진 복음적 봉사의 특성을 강조하려는 그리스도의 결의 어린 노력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74.1)
 2. 선을 행하는 시간.
 공관 복음서들이 한결같이 전하고 있는, 손 마른 사람의 치료에 대한 일화(막 3:1-6; 마 12:9~14; 눅 6:6~11)는 안식일의 사회적 기능을 말해 주는 또 하나의 예증이다. 예수님 앞에 한 환자를 데려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송사할 뜻을 가지고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2:10)라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174.2)
 마가와 누가에 따르면 예수님은 먼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눅 6:9)는 원칙적인 질문을 제기하셨다고 했다.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병을 고치는”(테라퓨에인)이라는 말 대신에 “선을 행하는 것”(아가토포이에인)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고쳐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안식일 계명의 근본 의도 속에 한가지 유형의 자선 행위만이 아니라 모든 유형의 자선, 활동을 포함시키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포괄적으로 안식일의 기능을 해석한 예는 랍비들의 해석들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174.3)
 실지에 있어서 학자들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기본 기능을 힘들여 명백히 하시고자 하신 사항을 잘못 인식하여 예수님의 그렇듯 포괄적인 해석은 네째 계명의 노골적인 위반이라고까지 말하는 자들이 없지 않다.35 이같은 결론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적절한 준수에 대하여 송사쪼로 걸어오는 질문에 답하여 안식일의 인도주의적 기능을 수사학적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인식치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계명을 더욱 명확히 하고자 애쓰시면서 어떻게 또 계명을 부정할 수가 있는가?37 (174.4)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마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마 12:11~12)는 두번째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선 활동의 시간으로서의 안식일 준수 원칙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셨다. 그리스도는 원칙적인 질문과 구체적 예증의 제시를 통하여 안식일은 그 근본적인 기능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동정과 관심을 표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임을 잘 설명해 주셨다. (175.1)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안식일의 준수는 금지 사항들(막 7:9)로 뒤덮여진 채, 도움이 필요한 동료 인간들을 도와줌으로써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께 사랑의 봉사를 행하는 기회가 되지를 못하고 율법주의적, 광적 신앙행위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안식일에 구원의 축복을 경험하는 신자는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구원”하려는 동기를 갖게 된다. 그리스도를 송사한 자들은 안식일에 다른 사람들의 육체적 영적 안녕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경험에 결함이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들은 안식일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념하기 보다는 흠을 찾아내어 그리스도를 죽일 방책을 마련하는 데에 골몰하고(막 3:2~6) 있었다.38 (175.2)
 엘렌 화잇은 질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고통당하는 자를 치료해 주는 것보다 이 사람들이 계획하고 있었던 것처럼 안식일에 사람을 죽이려 하는 일이 더 좋은가? 안식일에 자비의 행동을 펴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보다 마음 속에 살의(殺意)를 품는 것이 더 의로운가?”라고39 하였다. (175.3)
 이해와 오해.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에 부여하신 근본적인 인도주의적 가치는 마태복음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는 단호한 표현으로 제시되었다. W. 맨손(Manson)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동시대 인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원칙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으로 잘못 실천하고 있던 무위적(無為的) 태도를 일격에 무효화 시키었다.”40고 했다. (175.4)
 안식일에 대한 이같은 적극적인 해석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윌리 로르도르프(Willy Rordorf)는 마태를 향하여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하여 “모랄리스트적인 오해의 발단을 초래시킨 자”라고 비난하고 있다.41 현대의 학자가 복음 기자를 향하여 안식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있다고 하는 비난은 과연 공정한 것인가? (175.5)
 설사 마태의 보고에 대한 신뢰가치가 의심받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의 해석이 한 사도와 그의 무리들의 견해를 대신하는 것이란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광적 종교성을 표현하는 날이 아니라 “선을 행하고”(마 2:7) “자비”를 나타내어야 할 날이라고 하는 마태의 사상은 세개의 다른 복음서 기자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똑같이 수사학적 질문의 형식을 빌어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사람을 “구하는 일”이 옳다고 말씀하고 계시다(막 3:4; 눅 6:9). (175.6)
 누가복음에서 그리스도는 인간들을 육체적, 영적 속박에서 풀어 주는 날이 안식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눅 13:16, 12)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좇는 무리들에게 안식일에 하나님의 구속의 활동을 나누어 하도록 권하고 있다(요 4:4; 5:17; 7:22, 23). 따라서 복음서들의 기자들은 한결같이 보고 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을 특별히 인간들의 필요에 사랑의 봉사를 베풀므로써 하나님을 공경하는 날로 제시하였다고 했다.42

 (175.7)
 안식일의 이같은 인도주의적 가치를 재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기념비적인 선언을 통하여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되심을 확인하셨다(막 2:28; 마 12:8; 눅 6:5), 인간들의 안녕을 위하여 안식일을 제정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존귀를 돌리고 사람에게 덕을 끼치기 위하여 안식일이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위”를 주장하셨다.43  (176.1)
 모든 공관복음서들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그리스도의 주장을 손 마른 사람의 치료 다음에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이 치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인도주의적인 기능을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뚜렷하게 선포하셨다. 세 복음 기자들이 전부 이 이야기를 그리스도의 그 중대한 주권 선언(막 2:28)의 바로 다음 자리에 배정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수께서 네째 계명의 무효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안식일 본연의 기능 즉 “선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시간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과 구원을 기념하는 날임을 밝히셨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마 12:12; 막 3:4; 눅 6:9). 그러면 안식일에 우리의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속에는 우리의 직계 가족은 물론 더 큰 인간 가족중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구성원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는 안식일의 경축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방식들에 대하여 간략히 검토하기로 하자. (176.2)
 3. 가족을 위한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