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73편 의심에서 확신으로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 73:16, 17)
(338.3)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이 그에게 노출되었다. 아삽은 의심에 병든 채 성전으로 올라갔다. 결국 그는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나왔는데 이는 그가 불가시적인 존재(Invisible One)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의심 가운데 올라갔다가 변화되어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나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를 미끄러짐에서 건지셨으니 이는 아삽이 그분께로 나아왔기 때문이었다. 성전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아삽에게 일어났었는가? (338.4)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여전히 살아 계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었다. 지성소에는 놀라운 신성의 능력과 영광의 광채인 하나님의 쉐키나의 영광이 거했다(시 26:8; 63:2. 3 참조). 아삽은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하나님의 탁월한 인간 역사 통치에 관한 재확신 같은 자신의 의문을 해결해 줄 지적 해결책을 그다지 찾지 못했었다. (339.1)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 73: 25, 28)
(339.2)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을 때 그의 영혼은 이전에 결코 알지 못하였던 것 같은 하나의 평화를 체험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전혀 새로운 인생관을 받게 되었다. 그는 영원의 빛으로 사물을 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마지막 심판의 실체가 새로운 현실로 다가와 마음을 찌르는 것이었다. 성소 의식 자체가 이미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아는 열쇠를 쥐고 있다. 그 상징적인 의식들은 그의 눈을 열어 “악인의 종말”, “저희 결국”을 보게 하였다. 혹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신탁이 아삽에게 주어졌으리라고까지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보다 더 확실한 것은 거룩한 상징들과 축제들의 의미가 그에게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번제단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는 그에게 죄인의 영원한 죽음을 보여 주었으리라. 그는 성소 안에서 주님을, 회개한 모든 죄인에게 자비하시고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을 궁극적인 심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으로 보았다. 이같은 관점은 또한 이스라엘의 현인들이나 학자들이 가르치던 바였다. (339.3)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죄인이 백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전 8:11~13).
(340.1)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 11:9)
(340.2)
 악인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듯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방법은 강제적이 아니다. 그 분께서는 모든 사람이 죄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눈으로 보고 맛볼 수 있을 때까지 죄가 뻗어 나가도록 허락하신다. 당신 자신의 시간에 따라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개입하시며 당신에게 요청하는 자들의 운명을 바꿔 주시는 것이다. (340.3)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의 빛 가운데서 아삽의 오만성은 급진적으로 변했다. (341.1)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시 73:18~20)
(341.2)
 자아를 신뢰하는 거만한 사람들은 견고한 땅 위를 걷지 못한다. 그들의 행복은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불안정하며 또 진실되지 못하다. 거기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없다. 하늘의 기쁨은 마음의 상태이며 주관적 감정에 근거를 두지 않고 하나님께 근거를 둔다. 지상의 사물은 영혼의 깊은 갈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 아삽은 물질주의의 하찮음과 천박함을 알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선지자적 확신으로 이스라엘 중에 있는 천박한 쾌락 주의자들의 종말을 전하고 있다. 그는 마치 그들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처럼 애통해 하고 있다. (341.3)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시 73:19) (342.1)
 새로운 자아 인식
 이제 아삼은 하나님이 구하시는 빛 가운데 서서 충격적인 자아 평가에 도달한다. (342.2)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시 73:21, 22) (342.3)
 하나님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는 항상 새로운 자기 평가를 수반한다. 아삽은 여기서 심오한 자아 인식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욥과 바울이 하나님 앞에 회개했던 자복의 깊이에 버금가는 것이다. (342.4)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 42:5, 6)
(3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 7:24)
(343.1)
 이같은 자책감은 오직 거룩하신 분과의 신앙적 만남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조물주를 보다 잘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을 보다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있는 참된 종교의 원동력이다. (343.2)
 그러나 위험은 우리가 무의식 중에 우리 자신의 형상을 따라 신관(神觀)을 형성하려는 데 있다. 여기서 보면, 서구 기독교가 지난 여러 세기 동안 무신론과 진화론의 철학적 주장을 용납해 온 것처럼 생각된다. 그것은 서구 문명에 두루 편만한 하나의 죽은 정통 교리의 그릇된 신관(神觀)에 대한 하나의 반발이었다. 어찌 됐든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을 통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참된 계시였다. 야곱, 아삽, 그리고 루터 같이 하나님과 겨룬 씨름꾼들은 오늘날도 여전히 들려줘야 할 전율하는, 그리고 흥분시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3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