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삽은 분명히 혼동스러웠다. 그의 마음에 무겁게 자리한 것은 그토록 힘든 자신의 육신의 병이 아니었다. 참으로 자신의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바라던 자신의 기대가 수치로 변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모든 것이 만일 하나님의 선한, 순전한 자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도대체 야훼는 어떤 하나님이신가? 만일 그분이 선한 하나님이요 도덕적 하나님이요 만물의 창조주시라면 어떻게 악인이 번영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을 보면서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4~11절). 이 질문은 아삽의 신앙을 위태롭게 하였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단순히 무시할 뿐만 아니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인간사에 관계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도전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 분께서는 우리의 기도나 도덕적 노력같은 시시한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인간 만사에 무반응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 너무 바쁘시다는 것이다. 아삽을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오만한 자의 번영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참된 신조, 즉 야훼는 당신의 언약의 백성의 구세주요 축복의 시여자(施與者)라고 하는 진리에 도전하는 그들의 자만스런 철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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