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73편 의심에서 확신으로
 「아삽의 시』 (330.1)
 시편 73편 (331.1)
 시편 73편은 한 히브리 성도가 하나님의 본체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에 대하여 자신의 의구심을 토로하는 간증이다. 그의 이름은 아삽, 예루살렘의 레위 제사장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되는 착하고 도덕적인 삶을 보내면서 그는 하나님의 성전 봉사로 항상 바쁘게 생활했다. 자신이 위독한 병에 걸리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이 진행되는 것 같았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14, 26절). 그때 자신의 병보다 더 고통스러운 그 무엇이 그의 마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 그리고 언약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 이런 것들에 대한 의심의 통증이었다. 무엇 때문에 악하고 자아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그처럼 순조롭고 정상적인 반면 의로운 한 사람이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가? (333.1)
 아삽은 신실한 예배자들, 소위 말하는 “의인들” 축에 속했다. 그는 탕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매사에 번영, 활력, 건강 등 한 마디로 하나님 안에서의 좋은 생애, 샬롬의 축복을 기대했었다. 첫 시편은 그의 높은 소망을 정당화시켜 주는 듯했다. (333.2)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 1:3)
(333.3)
 아삽의 인생 철학은 아마,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엄격한 순종은, 불순종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저주인 질병과 비 정상적인 죽음을 초래하게 되는 것과는 달리 필연적으로 구체적인 축복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이었으리라. (334.1)
 욥의 소망이 느닷없이 뒤틀려 버리고, 마침내 부서진 사기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으며 “재 가운데” 앉아 있었을 때 그의 부인은 다음과 같이 악담을 퍼부으며 절망에 빠졌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그의 친구들도 또한 욥이 자신에게 이같은 재앙이 오도록 하나님을 거스려 끔찍한 죄를 범했음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욥은 비록 이전보다는 확신이 혼동스럽기는 했으나 그래도 꿋꿋이 자신의 무죄를 고수했다. “내가 공명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욥 31:6). 그는 하나님께 항변했다.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취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욥 10:2, 3).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욥 13:23, 24). (334.2)
 훗날, 유대인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언약을 순종에는 축복을, 불순종에는 저주를 자동적으로 내리는 하나의 자연 법칙쯤으로 여긴 듯하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이같은 합리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천성 소경인 사람을 보았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요 9:2)라고 질문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 하는 것이었다. (335.1)
 아삽은 분명히 혼동스러웠다. 그의 마음에 무겁게 자리한 것은 그토록 힘든 자신의 육신의 병이 아니었다. 참으로 자신의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바라던 자신의 기대가 수치로 변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모든 것이 만일 하나님의 선한, 순전한 자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도대체 야훼는 어떤 하나님이신가? 만일 그분이 선한 하나님이요 도덕적 하나님이요 만물의 창조주시라면 어떻게 악인이 번영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을 보면서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4~11절). 이 질문은 아삽의 신앙을 위태롭게 하였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단순히 무시할 뿐만 아니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인간사에 관계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도전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 분께서는 우리의 기도나 도덕적 노력같은 시시한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인간 만사에 무반응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 너무 바쁘시다는 것이다. 아삽을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오만한 자의 번영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참된 신조, 즉 야훼는 당신의 언약의 백성의 구세주요 축복의 시여자(施與者)라고 하는 진리에 도전하는 그들의 자만스런 철학이었다. (335.2)
 이같은 억측은 참으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하나님의 이름 찬양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가증한 죄가 된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같은 비신앙적인 존재들이 샬롬, 건강, 그리고 번영을 즐긴다는 말인가? (336.1)
 아삽은 자신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시 73:13). 물론 아삽은 이 의심을 홀로 감당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주목하신다. (336.2)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말 3:14. 15).
(336.3)
 아삽은 그래도 신실했다. 욥처럼 그의 마음도 하나님께 진실하였다. 그는 성전 의식에서 으례 행했듯이 무죄하므로 자신의 손을 씻었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 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다니며 ∙∙∙”(시 26:6; 신 21:6). (336.4)
 아삽은 자신이 무죄하게 곤경에 처했다고 느낀다. 자신이 감당해야만 하는 이런 재앙이 정결한 생애, 칭찬받을 행실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와 행복을 위한 세상의 경주에 뛰어들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그는 거의 하나님의 섭리와 언약을 단념할 뻔하였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2절). 아삽은 구약의 “의심 많은 도마” 였다. (337.1)
 전환점
 만일 아삽이 참으로 자신의 의심에 굴복하려 했더라면 그는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증하는 허다한 증언을 포기해야만 했으리라. (337.2)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라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시 73:15, 16)
(337.3)
 한 사람의 의혹의 경험이 모든 성도들의 믿음을 모아 놓은 것보다 더 참될 수 있겠는가? 수많은 증거가 도외시 당할 수 있겠는가? 다윗은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믿음을 기억함으로 용기를 얻었다. (337.4)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시 22:4, 5)
(338.1)
 아삽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이스라엘의 믿음 사이에서 산산이 찢겨졌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기 원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축복의 시여자를 잃고 말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도를 이해하기 원하였고 자신의 마음의 안정을 바랐다. (3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