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사무엘 상∙하 제 Ⅴ 부 다윗: 상처난 왕의 몰락 (삼하 13-24) 제 12 장 자비로운 여호와의 손에 빠짐 (삼하 21-24)
 첫 난제의 해설은 다윗의 군대의 수효에 대한 다윗의 “자랑”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출애굽기 30:12을 인구 조사의 위험이나 위법성을 뜻하는 법조문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어떤 설명도 확신을 주기에는 미흡하다. 그러나 인구 조사하는 일이 왜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할지라도, 뻣뻣한 요압은 알았고, 그래서 그는 왕에게 도전하였다. 그러나 요압도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삼하 24:3). 어쨌든 왕은 요압을 무시하였고, 인구 조사는 진행되었다. (330.2)
 둘째 난제는 구약의 난제라기보다는 우리의 난제이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의로운 분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분은 그분의 판단을 따라 벌을 주시거나 상을 주신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열왕기상 22장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아합을 어떻게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게 하여 쓰러뜨릴 것인가를 하늘 조정에서 의논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20절). 역시 거기서도 아합이 죽어야 마땅하다는 논의가 없었다. 유일한 질문은 그를 어떻게 죽일 것인가가 문제였다. 마찬가지로, 사무엘하 24장에서도 인구 조사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논하지 않는다. 요압 그리고 곧 다윗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남은 문제는 그 죄를 어떻게 벌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330.3)
 다윗이 결국 정신을 차렸을 때에, 그는 “그 마음에 자책”하였다(10절). 선지자 갓은 세 가지 형벌 중에서 택하라고 하였다. 다윗의 반응은 성경 속에서 신자의 여호와에 대한 확신에 관한 가장 감동적인 증언들 중의 하나이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14절). (330.4)
 이 이야기는 단체 사상의 견고한 벽 속의 틈을 보여준다. 다윗이 그의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백성을 생각할 때에 그는 외쳤다: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17절). 놀랍게도, 다윗의 표현은 여호와께서 이미 천사를 명하여 재앙을 그치도록 하신 후에 나왔다. (331.1)
 물론 다윗에게는 그 칼이 자기와 자기 집에 이미 임하였고, 그것은 계속 황폐를 가져올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의 독자들은 예루살렘의 황폐 속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윗에게만 죄가 있다고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함께 잘못한 것이다. 결국, 애초에 왕을 구한 자가 누구였는가? (331.2)
 타작 마당의 장면은 이스라엘의 미래의 예배 경험을 위하여 중요한 것이다. 역대하 3:1에는, 그 장소가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희생으로 드린 모리아 산과 동일한 곳이라고 되어 있다(창 22:2, 14). 값을 흥정할 때, 다윗은 예물을 드리는 것에 있어서의 중요한 원칙을 표현하였다: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삼하 24:24). 비록 여호와의 자비와 은혜가 공짜이며 영원하다 할지라도, 결국 여호와께 대한 헌신은 값비싼 것이다. (331.3)
 사무엘하의 마지막 장면은 다윗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희생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다. 우리의 저자는 다윗에 대하여 그와 같은 사건을 겨우 두 번밖에 기록하지 않는다: 그가 법궤를 예루살렘에 가져왔을 때(삼하 6:13, 17)와 여기 재앙이 그쳤을 때. (331.4)
 요약: 부록에 대한 조망
 사무엘하의 마지막 이야기는 그것이 심판의 기별로도(삼하) 그리고 희망의 기별로도(대상) 사용될 수 있게 하는 자비의 모습을 넉넉히 보여준다: 멸망의 칼이 멈추고(24:16), 여호와의 위대한 자비에 대한 다윗의 고백(14절), 그리고 마지막 말씀: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25절). (331.5)
 그러나 이 이야기가 사무엘하 21장의 다른 재앙의 이야기의 대응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괴롭히는 요인들은 더욱 선명하게 두드러진다. 첫째 재앙과 관련하여, 사울의 집이 문자 그대로 멸망했다면, 둘째 재앙과 관련하여 다윗의 집은 살아남았다. 다윗의 집이 살아남은 것이 좋은 소식인가? 칼이 다윗의 집을 결코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보증을 생각할 때(12:10), 집안이 계속되리라는 약속은 고무적인 것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332.1)
 그러나 아마도 더 정신이 들게 하는 것은, 첫째 재앙의 이야기에서는 7명의 사람이 죽었으나, 둘째 재앙에서는 70,000명이 죽은 것이다. 사울의 죄는 7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나, 다윗의 죄는 10,000명을 앗아갔다. 이 기사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24:1)라는 진술로 시작하기 때문에 아마도 이제는 백성 자신들도 연루가 된 것이다. 다윗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다윗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벌을 받았다. 그것은 왕정의 마지막을 본 사람들에게 강력한 기별이다. 그들의 왕이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백성도 실패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사람들의 손에 빠졌다. (332.2)
 그들이 하나님의 손에 빠질 수만 있다면 .... (332.3)
 ■ 말씀을 적용함
 1. 문제성 있는 이야기들. 성경에서 문제성 있는 이야기들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그들이 사는 곳에 따라 취급하신다는 생각은 고무적인가 낙담시키는 것인가? 내 가치 판단과 조화되지 않는 상황 속에 하나님이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나의 하나님에 관한 견해는 어떤 영향을 받을까? 성경과 진리에 관한 나의 견해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까? (332.4)
 2. 약속들. 사울의 피 흘린 죄는 어떻게 내가 나의 약속을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리라고 말하는가? 어떤 종류의 약속들을 나는 잘 잊어버리는가? 왜 그런가? (333.1)
 3. 강력한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말하는 격렬한 시편들을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왜 그러며, 아니라면 왜 안 그런가? 혹은 그것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333.2)
 4. 무죄함. 내 생애 속에서 다윗처럼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의해 너무 고양되어서, 나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게 될 때가 있었는가?(삼하 22:21-25). 그것은 바리새인보다는 세리를 내 삶의 모델로 삼아 살아가는 경향이 있는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눅 18:9-14). 혹은 나는 바리새인과 같은 주장을 할 위험에 있는가? (333.3)
 5. 도미노 효과(Domino Effect). 내 삶 속에서 나의 죄가 남에게 고통을 준 경우가 있는가? 남의 죄의 결과로 내가 고통을 당한 적이 있는가? 내 죄로 남을 상하지 않고, 남이 자기 죄로 나를 상하게 한 것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333.4)
 6. 자비하신 하나님의 손에. 내가 큰 죄를 범했을 때에라도,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빠지기를 원하는 그러한 신뢰를 나는 어떻게 계발할 수 있겠는가? (333.5)
 ■ 말씀을 연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