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사무엘 상∙하 제 Ⅴ 부 다윗: 상처난 왕의 몰락 (삼하 13-24) 제 12 장 자비로운 여호와의 손에 빠짐 (삼하 21-24)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의 원수들을 이기게 하셨는지를 묘사한 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 나온다: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멸하였사오며, 저희를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38절). “저희가 둘러보아도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내가 저희를 땅의 티끌같이 부스러뜨리고, 거리의 진흙같이 밟아 헤쳤나이다”(42, 43절). (325.3)
 시(詩)는 하나님을 더 찬양하고,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51절)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325.4)
 “다윗의 마지막 말”(23:1)이 바로 뒤 23:1-7에 따라나온다. “다윗의 말”이라고 이름이 붙은 짧은 토막이다(1절). 여기서 언사는 더욱 빛난다: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노가(nogah)]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3, 4절). (325.5)
 폴친의 말에 의하면(David, 205),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반사되는 곳에서 빛을 즐긴다. 22:13에서 하나님께 돌리는 “광채”(노가)를, 이제는 23:4에서 거침없이 자기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폴친은 다윗이 여기서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태양 언어”는 구약에서 시편 84:11에서만 나타난다고 말한다. 거기서 그것은 하나님께 적용된다: “하나님은 태양이요 방패이시다.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예를 주신다”(David, 204). (326.1)
 하나님의 영광과 다윗 자신의 경험에 반영된 그 빛을 찬양하는 이 찬미들이 전체 대사의 문맥과 상관이 없다면, 그것들은 단지 감사의 영광스런 표현으로 쉽게 수용될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인”(23:1, 「제임스왕역」)은 최상급, 부풀림, 과장법 등의 언어 사용에 관하여 더 관대한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언어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축할 때 신자들이 늘 사용하는 언어였으니까—세상은 그가 영광스러운 빛으로 다가왔을 때까지 매우 어두웠다. (326.2)
 그러나 역사적 다윗에게 적용시킨다면, 혈과 육의 현실과 신성의 영광 사이의 대조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어떻게 보면, 시편을 진정한 육신의 다윗이 아니라, 더 진실한 “다윗의 아들”에게 적용시키는 기독교적 접근은 영적으로 민감한 방법이다. 역사에 나온 진정한 다윗은 이 시편들에 나온 무구하고 전능하고 영광스런 형상에 접근하지 못했다. 비록 폴친(David, 202-207)이 그 대조를 너무 진하게 했지만, 직전의 군사적 기록 속에 나오는 현실성을 지적한 것은 바른 일이었다. 전혀 늘 승리하는 전사—왕이 아닌 다윗이 전장에서 “기진맥진하여” 아비새의 구출을 받는다. 그의 부하들이 왕은 다시는 전쟁에 나가지 말아서 “이스라엘의 등불”“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21:15-17). 폴친의 표현을 빌자면, 실제 삶의 기진함과 참 예배의 충만함의 대조는 “깜빡이는 등잔과 타오르는 태양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David, 205). (326.3)
 다윗의 왕국의 멸망의 관점에서 기록하면서, 사무엘상∙하의 저자는 아마도 역사의 다윗과 시편의 다윗의 대조점을 독자들이 기억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원수들 위에 자기를 높이 드셨다고 하는 선언을 너무 성급히 하였는가?(22:49). 그는 자기를 비하시키는 투로 노래할 수 있었고, 또 그리 하기도 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28절). 그러나 인류는 늘 위대한 구원 뒤에 위태롭게 된다. 아마도 그것이 다윗의 문제였을 것이다. (326.4)
 사무엘상의 서두에 나오는 시가 속에서 한나는 같은 문제에 봉착한다. 그녀는 외친다: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2:1).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3절). 요컨대, 구원의 풍성함은 교만으로 이끌며, 그것은 다시 고통으로 낮추어져야 한다. 이것은 신자가 끊임없이 실생활에서 만나는 딜레마이다. 나는 여호와께서 양편에서 일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며,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기(6, 7절) 때문이다. (327.1)
 한나와 다윗과 우리를 위하여 폴친의 결론은 진리에 가깝다: “한나에 의해 암시되었고, 역사를 통하여 기록된 다윗의 실수는 너무 신속히 고양(高揚, exaltation)에서부터 기고만장(氣高萬丈, exultation)으로 움직인 것이다”(David, 207). (327.2)
 더 많은 다른 용사들(23:8-39)
 하나님과 다윗을 찬양하는 두 영광스런 찬미 직후에 저자는 다윗의 군인 영웅들의 목록을 삽입한다. 이것은 시편의 영광과 그 뒤를 따르는 재앙의 무서운 고뇌 사이에 완충제로 들어와 있다. 역대상 11:10-47에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비교를 흥미있게 할 차이들이 많이 보인다. (327.3)
 분석가들은 숫자 3과, 그것의 배수에 관심을 갖는다. “3”을 열 번 사용했고, “30”을 세 번 사용했으며, “300”을 한 번 사용했다—만일 역대기의 평행절을 살펴본다면, 역대상 11:11에서부터 또 300을 찾아볼 수 있다. 이 300은 사무엘하 23:8의 800 대신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숫자 3은 부록의 다른 부분에서 또 나타난다: 3년간의 기근 (21:1); 이스비브놉의 창이 300세겔 나가는 것이었고(16절); 다윗의 원수들로부터 3개월 동안 도망, 3일간의 염병(24:13). 저자의 숫자 7에 대한 관심도 확장해 보자. 21:9에서 죽은 사울의 가족이 7명이요, 24:15에서 죽은 이스라엘 사람이 70,000명이다. 그대는 “이상적인” 숫자에 꽤 관심을 갖고 있다. 상상이 가는 것은, 그런 관심은 비록 그 목록 중에 포함된 사람의 수가 36명인데도 불구하고, 이 목록 끝에 주어진 분명한 진술 즉 “도합이 37인이었더라”(30 더하기 7?; 23:39)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이름이 빠졌을 수도, 곧 역대기의 목록에 나오는 “알래의 아들 사밧”의 이름이 빠졌을 가능성도 있다(대상 11:41; Anderson, 277). (328.1)
 저자의 숫자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바라는 정도로 숫자의 정확성에 특별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는 점도 분명히 해 두어야 하겠다. 이 모든 3이라는 숫자들과, 30이란 숫자들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역대기도 우리를 많이 돕지 않는다. 그는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기도 하고, 첨삭을 한다. 그가 마지막에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추가하기 때문에, 합계가 37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328.2)
 내용 면에서, 사무엘하의 목록은 23:8-23에 나온 대사를 늘린 것을 포함한다. 그중 가장 긴 것은 베들레헴 우물에서 전사들이 선물로 길어 온 물에 대한 다윗의 두려움을 그린 것이다. 그는 그 물을 땅에 부어 여호와께 바쳤다(16절). 다윗은 말했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17절). (328.3)
 이 목록은 블레셋 사람들을 이긴 내용들의 목록들(21:15-22)과 대칭 구조의 균형을 이룬다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저자가 무슨 의도로 이 목록을 여기 삽입했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렇게 말했을지라도, 그 목록의 마지막에 들어 있는 사람의 이름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헷 사람 우리아. 대부분의 이름들은 다윗의 전기 중에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아를 안다. 우리는 어디에선가 그를 만났다. 그의 이름이 24장의 재앙의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이다. (328.4)
 여호와의 손에(24:1-25)
 사무엘하의 마지막 이야기는 또 불편한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24:1). 다시라는 단어는 부록의 시작과 21장에서의 사울이 피 흘린 죄의 이야기로 우리의 관심을 끌고 간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왕가의 실수가 있고, 무죄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제사와 여호와의 자비가 나온다. (329.1)
 역대상 21장의 동일한 기사는 놀라운 차이를 보여준다. 즉 사무엘서는 이스라엘의 전사가 80만 명이라고 기록하고, 역대기는 110만 명이라고 한다(삼하 24:9; 대상 21:5). 사무엘서는 유다에 50만, 역대기는 47만으로 그 합이 베냐민과 레위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전한다(삼하 24:9; 대상 21:5, 6). 사무엘서에서 다윗은 “타작 마당과 소” 값으로 은 50세겔을 지불한다. 역대기에서는 “그 기지(基址) 값으로 금 600세겔을 달아” 준다(삼하 24:24; 대상 21:25). 사무엘서에서는 땅 주인의 이름이 늘 아라우나로 나오고, 역대기에서는 늘 오르난으로 나온다(삼하 24:16; 대상 21:15; 「새국제역」의 15절 난외주를 보라). (329.2)
 그러나 병행되는 기사들 사이의 모든 차이점 중에서 가장 흥미를 유발시키는 것은 사무엘하 24:1에서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격동시키는 것이고, 역대상 21:1에서는 사단이 하는 것으로 나와 심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복음주의 학자인 볼드윈의 입에서 나온 놀라운 설명은 이렇다: 역대상 21장의 병행 기사는 여러 해 동안 어떻게 신학적 사상의 발전이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예전에 여호와를 원인으로 삼았던 것을 ‘사단’‘대적’을 원인으로 삼게 되었다”(Baldwin, 294). (329.3)
 우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무엘하의 기사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곤란하다:

 (1) 저자는 인구 조사를 하는 것이 왜 잘못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역대기의 저자도 설명을 안 하기는 매 마찬가지이다);

 (2)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격동하여 이 행위를 하게 하시고, 그 행위 때문에 다윗을 벌하신다. (3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