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사무엘 상∙하 제 Ⅴ 부 다윗: 상처난 왕의 몰락 (삼하 13-24) 제 12 장 자비로운 여호와의 손에 빠짐 (삼하 21-24)
 1. 단체 형벌. 나라가 왕의 죄 값을 치렀다. 그의 후손들이 사울의 죄값을 치렀다. 우리의 개인주의적 문화는 자녀가 부모의 죄값을 치르지 않도록 요구한다(비교 겔 18).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비의 죄를 자녀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출 34:7). (320.4)
 구약이 자주 하나님의 손이 형벌을 직접 내리는 것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부모의 죄가 자녀에게 꽤 자연스럽게 이른다는 다윗의 삶의 분명한 진리를 간과하기 쉽다. 왕들과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발언권이 있다면, 사무엘하 21장의 교훈을 잘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320.5)
 2. 거짓 구실로 얻은 맹세를 강제 집행하는 것. 우리의 현대적 생각으로는 속임수로 이루어진 계약이나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세밀한 조건들을 나열하는 조금 비현실적인 구약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되었든지 간에 맹세는 구속력이 있었다. (321.1)
 3. 속죄를 위해 인간을 제물로 바치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과 관련이 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8, 39). 기브온 사람들이 피 흘린 죄에 대하여 피를 요구한 것은 “그리도인적”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것을 따랐다. 원인은 정당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형벌은 도가 지나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321.2)
 그러나 동시에 그 이야기가 피는 피를 요구한다는 인간 본연의 감정을 증명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요성은 지평선 위에서 두르러지기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아들을 하나님께 희생으로 드리려고 했다(창 22:12). 선지자 미가는 “내 죄를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위하여 내 몸의 소생을” 드리고자 하는 충동을 기록하였다(미 6:7). 그리고 여기 사무엘하 21장에서 피는 피로 죄의 값이 치러져야 한다는 요구를 하나님이 인정하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는 바울의 말씀의 능력을 깨달을 더 큰 이유가 있다(롬 5:1, 8). (321.3)
 4. 인간의 생명보다 의식적 요구가 더 귀하게 여겨진다. 다윗이 이전 왕가의 가족들을 합당하게 매장하기 전까지 가뭄이 나라에 계속된다. 비록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이미 매장했지만(삼상 31:11-13), 하나님께서는 사울 집의 다른 가족들이 조상묘에 묻힐 때까지 그 땅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셨다. (321.4)
 또 다시 우리 현시대는 거룩함에 대한 관념을 우리에게서 다 빼앗아 가는 경향이 있다. 의식은 우리 삶의 참된 부분이 아니라 “형식적”인 의식이 되고 말았다. 다윗의 경우에 있어서, 사회적 규범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신체의 유골을 경건하게 처리할 것을 요구한다면, “바른” 일을 하기 위하여 심각한 조처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무엘하 21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322.1)
 요약하건대, 그 풍습의 기원이 어디에 있다고 보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합당하든지 않든지 간에 우리의 대사는 다윗과 그 백성들이 그 당시에 보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한 일을 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하나님께서 더 분명하고, 더 나은 길을 제시하시기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그들의 선악의 판단 기준에 충실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사울은 “더 잘 알았기” 때문에 그가 기브온과의 맹세를 어겼을 때에 죄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왕위 계승자 다윗이 일을 바로 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여호와께서는 “공의”가 이루어졌다고 만족하실 수 있었다. (322.2)
 이와 비슷하게, 왕족을 위한 합당한 매장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었다(21:14). 하나님은 정의를 보장하시는 분이시며, 그 당시의 습관을 따라 다윗이 정의를 행하는 책임을 갖게 하셨다. (322.3)
 불편한 습관을 다루는 내용을 지나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저자의 의도와 합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사울의 집의 피를 흘린 죄가 있다는 시므이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포함시켰다고 본다(16:5-8). 다른 이들은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 이 이야기는 교묘하게 다윗이 사울의 집을 학살한 사실을 폭로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의 다윗의 역할을 어떻게 보든지 간에, 사울의 죄가 자기의 머리, 즉 자기 자손에게로 돌아왔다는 기별은 사울의 집이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의 분명한 증거이다. (322.4)
 블레셋 거인들(21:15-22)
 다윗을 칭찬하는 노래같이 들리지만 블레셋 거인 네 사람과 싸우는 다윗의 용사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는 사실상 다윗을 뒷전에 밀어 넣는다. 이스비브놉 앞에서 기진한 다윗은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에 의해 구출된다. 그러자 다윗의 부하들은 왕이 그들과 함께 전쟁에 나가서 생명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7절). (323.1)
 가드 사람 골리앗을 죽인 것에 대한 언급은 흥미있는 일이다(19절). 왜냐하면 여기서는 다윗 대신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죽인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삼상 17). 그러나 역대상 20:5에서는 (야일의 아들이라고 소개된) 엘하난이 골리앗이 아니라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고 되어 있다. (323.2)
 이 차이점은 여러 모로 설명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엘하난은 다윗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미 유대의 전통 속에서 제안된 설명이다(Anderson, 255). 다른 설명은 역대기의 저자가 사무엘상∙하의 문제를 골리앗의 아우를 “만들어냄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Anderson, 255). 그 혁신적이고 “자유주의적” 설명이 「제임스왕역」의 번역자들에 의하여 “보수적인” 옷을 입은 채로 들어앉았다. 그들은 역대기의 해결을 사무엘하 21:19의 본문에 도입하였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의 아우[라흐미]를 죽였”다. (323.3)
 「제임스왕역」의 번역자들이 the brother of (“...의 아우”)를 이탤릭체로 인쇄하여 원문에는 그것이 없다는 사실을 밝힘으로 그들의 한 일은 “정직한” 일이었지만, 그들의 조화(調和)를 도모하는 경향은 훗날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의 소지를 남겨 주었다. 왜냐하면, 1901년의 「미국개역」(American Revised Version)이 사무엘하 21:19의 히브리어 본문으로 돌아가 직역을 했을 때, 즉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였다고 했을 때, 그때 밝혀진 것으로 생각된 오차(discrepancy)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하여 많은 “오류들”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B. G. 윌킨슨(B. G. Wilkinson)의 저서 우리의 「흠정역」 성경 옹호되다(Our Authorized Bible Vindicated)에서의 논박은 The Literary Digest 에 실린 두 기사를 언급하였다. 하나는 “누가 골리앗을 죽였는가?”(“Who Killed Goliath?” 1928. 12. 29)이고, 둘째는 “골리앗에 관한 논쟁”(“The Dispute About Goliath,” 1929. 3. 9)이다. 윌킨슨은 골리앗의 경우를 「제임스왕역」을 유일한 성경이라고 옹호하는 일의 쐐기로 이용하면서 도전장을 내놓았다(Wilkinson, 1, 2). (323.4)
 나는 그러한 오차들을 쉽게 해결할 수 없다. 적어도 이 “미세한” 단계에서는 힘들다. 그리고 그런 유는 사무엘서/열왕기와 역대기의 병행구절의 목록에서는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미세한 것이 믿음의 장애가 된다면, 성경을 세밀히 공부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안전하다. 많은 신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이런 해결 방법을 따랐다. 그러나 “거시적” 단계에서는 논쟁의 양편에서 다 드러나는 흑백 논리의 사고 구조를 깨는 것이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성경이 신성한 글이라는 사실이 어쩌면 불가능한 요구를 당하도록 한다. 계몽 철학자 G. E. 레싱(G. E. Lessing, 1729-1781)도 그런 현상을 보고 개탄했다. 다양한 복음서의 내용을 가리키면서 그는 말했다: “만일 우리가 리비(Livy), 디오뉘시우스(Dionysius), 폴뤼비우스(Polybius), 타키투스(Tacitus) 등의 글을 존중심과 고상함으로 대하여 한 음절 때문에 심하게 취급하지 않을 것 같으면, 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복음서들도 같은 대접을 하지 않는가?”(Kuitert, 279에 인용). (324.1)
 이 군사적 영웅들의 목록을 포함시킨 저자의 의도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가 다윗의 부하들을 칭찬하는 동안에 다윗을 더 평범한 인간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혹은, 다시 풍자(irony)를 사용하여, 다윗이 여호와 안에 있으면 자기는 사실상 무적이라고 선포하는 시편 직전에 다윗을 약해빠지고 쉽게 망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제시한 것이 아닌가? (324.2)
 감사(22:1-23:7)
 사무엘하 22장시편 18편은 사소한 차이가 나지만 같은 내용이다. 문맥상, 제목은 이 시가 다윗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노래의 말로 아뢰어 가로되”라고 되어 있다(1절). 생생한 언어로 시편은 다윗의 거의 죽을 뻔한 경험(스올[sheʼol], 5, 6절), 여호와께 부르짖어 성공한 것을 묘사한다. 참으로, 여호와의 반응은 하늘과 땅을 떨게 한다(8-16절). 볼드윈(Baldwin)은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성경이 그 사실을 확증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자연이 어우러져 움직인다는 개념은 믿을 수 없이 당돌하다”(Baldwin, 288). (325.1)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는지를 묘사한 후에(17-20절), 시인은 다윗의 생애의 이야기와는 전혀 딴판으로 그의 순결함과 언어의 정직성을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21절). “내가 또 그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24절). (3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