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6 장  안식일, 시간 속의 변화산
 거룩한 합일의 초청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개인적인 날이다. 이 날은 하나님의 비밀의 날이다. 하나님의 “나의 안식일”이다. 하나님의 신성한 날이고 하나님의 계심이 가득한 날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온 백성을 떨게 하는” “심히 큰 나팔소리”가 진동하는 시내산 정상 같은 시간이다. 하나님의 위엄으로 진동하는 산(출 19:16-23) 그 사면에 지경을 세워 거룩하게 한 시내산 같은 시간이다. “사람의 눈에는 맹렬한 불같은”(출 24:17) 하나님의 현존이 충천하는 날이다.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 오라”(출 16:9). 제칠일 안식일은 불타는 떨기나무같이 불꽃같은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한 날이다.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시간이 하나님의 신성으로부터 안식일 안에 서서 우리를 부르신다. “모세야 모세야”(출 3:5). (190.1)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안식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우리를 당신의 아들과 신부로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의 안식을 나눠주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우리를 품에 안아 당신의 안식을 더욱 풍성히 하고자 하여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주께서 나를 부르셨고 나는 대답할 것이다”(욥 14:15):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5). (190.2)
 그러나 “주께서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하신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나를 부르시고도 정녕 가까이 오지 말라 하심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말씀은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 신을 벗고 이리로 가까이 하라”로 읽어야 할 것이다. (191.1)
 안식일은 거룩한 시간이다. 하나님의 계심으로 불타는 떨기나무 같은 시간이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과 더불어 안식의 호흡을 나누어 쉬는 시간이며, 하나님과 사람이 그 안식의 호흡으로 한 육체를 이루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 호흡과 이 합일은 오늘에 재연되고 재현되는 과거의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역사의 첫 안식일에 이루어졌던 그 꿈같은 합일을 기념하거나 반복하는 것으로 끝나는 날이 제칠일 안식일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매 안식일은 우리가 세상이 생기고 나서 처음으로 우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을 우리의 피 남편으로 맞이하는 날이다. 우리에게만 최초와 유일의 날이며 시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조차 그 삶에 최초이고 두 번 없는 시간으로써의 제칠일 안식일이다. (191.2)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이 같은 시간이다. 하나님의 초청을 받았다 할지라도 신을 신고서는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나님 앞의 시간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떨기나무 불덩어리의 속불꽃 같이 거룩히 불타고 있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피 남편과 피 아내로 합일을 이루는 지극한 시간이다. 아무도 신을 신고 이 거룩한 하나님의 품안, 곧 그의 거룩한 침상에 오를 수 없다. (191.3)
 제칠일 안식일은 사람이 벗고 살던 에덴 동산과 같은 시간이다. 영적으로 말한다면 아담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나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미 에덴의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을 때 이미 사람은 하나님의 품속의 신부가 아니었다. (191.4)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합일의 품이다. 하나님의 맨 몸, 맨 살의 품이다. 온전히 벗기어져 맨 몸, 맨 살의 하나님이 매달린 십자가 같은 시간이다. 우리가 온전히 벗고 맨 몸으로 들어가고 맨 살로 맞이해야 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맨 몸 같고 하나님의 속살 같은 신성이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길 속의 속불꽃처럼 시간 속에 불붙고 있는 날이 안식일이다. 깊은 속살 같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우심이 겹겹이 구름을 이룬 날이 안식일이다. (192.1)
 이 시간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우리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신다. 날이 서늘한 저녁에 “네가 어디 있느냐”고 사람을 찾으신다.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서서 우리를 찾으시고 “네 발에서 신을 벗고 이리로 가까이하라”고 부르신다. 이 시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선택을 받고 부름을 받은 자라도 신을 벗어야 한다. “목욕한 사람”이라도 발을 씻어야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목욕한 사람,”“온 몸이 깨끗한 사람은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요 13:10)고 말씀하셨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신을 벗고 발을 씻고서 들어가고 맞이하는 하나님의 “나의 안식일”이다. (192.2)
 수건을 벗고 둘이서만 말씀하는 하나님의 성막
 안식일은 여호와의 영광이 머무른 시내산 정상 같은 시간이다. “여호와의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칠일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셨다”(출 24:16).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는 맹렬한 불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다”(출 24:17). 그 산 위의 구름 속에서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출 33:11). 모세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가. . . 너를 앎이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출 33:17).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하실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었다”(출 34:34). 아담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온몸을 벗고 있었듯이 모세도 “벗고” 있었다. 신을 벗었고 수건을 벗었다. 신랑과 더불어 합일에 이르는 신부의 몸은 신방을 “나오기까지 벗고 있었다.” (192.3)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났다. “그러나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출 34:30). 마치 아담이 그에게 “먹지 말라한 나무실과를” 먹기 전에는 그의 “벗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과 같았다. 모세는 하나님의 면전을 나왔을 때,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봄으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자기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다”(출 34:35). 이는 마치 하나님의 면전에서 나온 아담과 하와의 벗은 몸의 광채를 뱀이 보고 그들의 “벗었음”을 그들에게 고함으로 나뭇잎의 옷으로 자기 몸을 가린 것과 흡사한 것이다. 안식일은 모세처럼 우기가 하나님과 둘이서만 벗은 발과 벗은 얼굴과 벗은 몸으로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다. (193.1)
 시내산 정상을 덮었던 하나님 계심의 구름은 옮기어 광야에 설치한 하나님의 회막 위를 덮었다.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출 40:34, 35) 이었다. 제칠일은 시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막이다. 제칠일의 시간 위로 하나님의 신비의 구름이 덮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 시간의 성막에 가득하다. 이 구름이 우리의 벗은 몸을 에워싸고 우리는 이 구름 속에서 수건을 벗고 하나님과 둘이서만 말씀을 나눈다. (193.2)
 또 제칠일은 하나님이 엘리야를 “머리 위로 취하듯” 우리를 사람들의 머리 위로 높이 취하시는 날이다. “홀연히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사이를 갈라놓으면서 믿는 자들이 회오리바람 같은 성령에 쏠려 안식의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다. 승천하는 엘리야가 “겉옷”을 벗은 몸으로 불 말들이 이끄는 불 수레에 오를 수 있었듯이(왕하 2:13) 믿는 자들은 세상의 신분을 가늠하는 모든 옷을 떨치고 나서 안식의 하늘로 오를 수 있다. 제6일이 끝나는 문턱에는 제칠일의 안식으로 향하는 불 말들의 불 수레가 기다리고 있다. 세속의 신을 벗고 수건을 벗고 “떨어진 겉옷”을 떨치고서야 그 수레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194.1)
 시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변화산
 하나님의 “나의 안식일”은 사람이 신을 벗은 발과 수건을 벗은 얼굴로 그리고 누더기 겉옷을 벗은 맨 몸으로 나서는 하나님 앞의 시간이다. 하나님이 맨 몸과 맨 살의 품으로 우리를 초청한 날이다. 하나님의 맨 살의 품은 십자가의 사랑이다. 이 사랑의 품속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신부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 안식일은 거룩한 산실이다. 비천한 죄인이 여왕 같은 하나님의 신부로 변화되는 시간 속의 변화산이다. 시내산의 모세처럼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셨음을 인하여,”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입은 은총을 인하여,” 그리하여 자기가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된 사실로 인하여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시간이다. (194.2)
 창호지나 유리로 된 창문이 방안에 켜 있는 등불로 인하여 붉은 색으로 번지듯이, 사랑하는 신랑의 품에 안긴 신부의 얼굴이 분칠하지 않아도 홍조로 피어나듯이, 기다리던 어린 자식을 보고 소리치며 달려드는 어미의 얼굴과 목소리에 열기가 생기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제칠일 안식일에 이루어지는 합일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과 신체와 행실에 변화를 경험한다. 이것이 안식일로 인한 성화이다. 모세가 들어간 시내산 정상이 그 자체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빽빽한 구름과 맹렬한 불길의 영광으로 덮이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 아니다. 시내산 자신의 공격으로 번개와 우레와 심히 큰 나팔소리로 온 백성을 떨게 한 것이 아니다. 성막이 모세가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짙은 구름에 휩싸이게 된 까닭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임하셨기 때문이다. (194.3)
 시내산의 변모도 모세의 얼굴의 광채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새빨갛게 타는 불길로 떨기나무에 와 계신 하나님의 현존 때문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떨기나무처럼 하나님의 계심의 영광으로 불타는 시간이다. 세키나의 영광으로 빛나는 시간이다. 인자의 영광은 그 내재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불타는 영광이다. 제칠일 안식일을 구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신성으로 불타는 안식일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의 영혼은 안식일 안에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언약자의 은총으로 인하여 떨기나무처럼 불타고 시내산처럼 진동하는 것이다. (195.1)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산에 올라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 사건(눅 9:28, 29)은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안식일 경험의 훌륭한 암시이다. 변화산의 사건은 여러 면에서 모세의 시내산 사건을 닮았다. 이 때에도 시내산에서처럼 그의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앎”이 선포되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향하여 “너는 내 목전에서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하신 하나님은 변화산 사건에서도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눅 9:35)고 하셨다. (195.2)
 안식일은 이런 날이다. 믿는 자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신성의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날이며 그 구름 안에서 둘이서만 말씀을 나누고 한 육체로 합일을 이루는 날이다.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는 은총을 입고 그 일로 인하여 용모가 변화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과 신부로 선택한 우리를 옆에 세우시고 우리를 두고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분부함으로써 하나님 앞과 수많은 피조물들의 앞에서 우리가 높이 되는 날이다.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시고 내게 선전한 기름으로 부으시는”(시 92:10) 날이다.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