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6 장. 안식일:봉사의 기쁜 소식 II. 자신에 대한 봉사로서의 안식일
 그리스도인이 안식일에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는 궁극적으로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봉사로 끝난다. 왜 그런가? 근본적인 이유는 안식일 봉사를 통하여 신도는 하나님에게 힘이나 권능을 추가시키지를 못하고 대신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신도의 개인 생명에 능력과 힘을 주시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안식일이 개인적으로 반성하고 소생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제공해 주고 있는 시간과 기회를 통하여 가능해지고 있다. (165.1)
 1. 안식일:성찰의 시간
 성찰의 필요. 일부 사회 학자들은 반성의 결핍이야말로 우리의 문화를 피상적이며 불안정한 것으로 만든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인간들은 그들의 참된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낳아서 살다가 죽고, 군중 속에서 잃어 버린 바 되고 있다.24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대단히 활동적으로, 쉴사이 없이 소란스러운 생활을 살고 있지만 항상 내면적인 공허와 환멸을 느끼고 있다. (166.1)
 오늘날 상당수의 서구인들이 자신들의 내적인 자아에 질서와 평정을 주기위한 시도로서 동양의 참선(參禪)을 실험하고 있다. 동양의 명상법은 결가부좌(結奶趺坐), 주의 집중, 독경(讀經) 따위의 따르기 쉬운 과정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 주장하는 말에 의하면 그러한 동작들에 의하여 개인은 신적(神的)인 진동(振動) 혹은 영적인 실체들과의 접촉을 경험하고 이로써 내적인 조화와 평정의 느낌을 갖게 된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명상법의 근원이 되고 있는 동양 종교의 세계관과는 하등 상관없이 단지 일종의 심리학적인 자기 보조의 수단으로서 이러한 명상행위를 실천하고 있다. (166.2)
 표면상으로 볼 때 어떤 사람들에게는 수정된 형태의 동양 명상법, 소위 초월적인 명상이라는 것이 때로는 평정, 성찰, 그리고 어떤 고등한 존재와의 교통을 바라는 내면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양의 명상법을 통하여 내적 평정과 조화를 얻으려는 노력은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살기 위하여 사람은 성찰하고 자기 분석을 해야할 근본적인 필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166.3)
 이점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특히나 그렇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것이 하나님과 자신과 타인들과 또 크게는 이 세계와 연관된 것이면서 동시에 생명에 대한 자각적이고 지성적인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자기 이해를 증진시키는 영적인 훈련 활동에 충분한 시간을 내고 있는가? 1979년 12월 21일자에 발행된 크리스차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에 실린 갤럽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 가운데 10%만이 매주마다 성경을 읽고 있을 뿐이다. (166.4)
 모르긴하되 복음운동이 강력하지 못한 다른 기독교 국가들로 가면 이 비율은 더 낮아질 것으로 추측한다. 더구나 조급해 마지않은 생활 때문에 불과 몇귀절의 성경을 읽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이 사람들이 그 귀절을 명상할 시간이나 혹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더더욱이나 어려운 일이다. 가다 오다 성경을 읽는 것과 조목 조목 성경절을 연구하는 것과 성경 귀절을 가지고 깊이 명상하는 것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166.5)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동양의 명상법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 원인은 서양의 기독교 전통이 사람들에게 성경의 전통을 따른 명상법을 가르치지 못한 데에 있다. 안식의 안식일을 참지 못해 하는 현대의 경향은 성찰과 명상과 예배의 시간으로서의 안식일을 포기하게 하는 중대한 요인의 하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66.6)
 안식일과 명상. 하바드 대학의 신학자(神學者) 하비 콕스(Harvey Cox)는 자신의 저서 “동양으로의 선회”(Turning East)에서 그가 콜로라도 부울더(Boulder)에 있는 한 불교 연구 기관인 나로파 연구소(Naropa Institute)에서 동양의 참선을 연구하고 있을 때 겪은 한 의미심장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부울더에 체재해 있는 동안에 그는 “온 종일 일은 대단히 조금만 하면서 있는 그대로 의 창조물들을 즐기며, 세계를 손질하기보다는 음미하는, 옛날 방식의 진짜 사바트(안식일)”를 자신과 함께 경축하자고 하는 한 랍비의 초청을 받아들였다.25 (167.1)
 콕스는 자기가 금요일 일몰 시각으로부터 토요일 일몰 시각까지 “행하기 보다는 그저 존재하는” 느낌이 드는 안식일 기념 의식에 참여했을 때 “명상은 그 본질에 있어서 일종의 축소된 안식일”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술회했다.26 사실에 있어서 두 행위 모두 모든 활동으로 부터의 중지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두 사이에 지대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예컨데 동양의 명상은 현 세계의 실재들로부터 동떨어진, 생활의 총체적인 방식으로 생각되어진 반면에 안식일은 단지 생존을 위한 날마다의 투쟁 속에 있는 단 하루의 막간일 뿐이며 이 막간은 사람들로 하여금 보다 더 좋은 세상의 도래를 기다리면서 이 세상에서 살 아가도록 해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27 (167.2)
 하비 콕스의 말에 따르면 안식일과 동양의 명상 사이에 있는 두번째의 중요한 차이점은 안식일의 우주적인 본질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달리 말해서 동양 종교에서는 소수의 특권 소유자들, 즉 주로 승려(僧侶)들에 의해서만 명상이 행해지고 있는 반면 안식일은 소수의 엘리트들에게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경험을 주기 위하여 제칠일에 작업을 중지하도록 명하고 있다는 것이다.28 (167.3)
 안식일은 사회를 비아 악티바(Via activa)와 비아 콘템플라티바(via contemplativa) 즉 일하는 계층과 명상하는 계층으로 구분하는 것을 정죄하고 있다. 네째 계명의 근본 의도는 모든 사람의 생활 속에 노동과 휴식, 생존과 존재, 행위와 성찰의 양쪽이 모두 적정 배분을 갖는다는 것이다. 낯설은 동양의 전면적 정적(靜寂)이라는 개념을 수용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안식일의 통합된 생활방식을 배척하는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윤리와 전통을 끌지어준 유덕한 성경적 관습을 파괴하는 것이다. (167.4)
 우리가 바라는 바는 동양의 명상을 통하여 그들의 생활 속에 안식과 평정과 의미와 질서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 동양에 그 근원을 둔 또 하나의 제도인 네째 계명을 발견하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콕스가 말했듯이 이 제도는 “비록 그 모양은 변색되고 뒤틀려져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소속되어 있으며 그리고 역사의 모순들과 혼란의 한가운데를 살아가야 하는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명상이라고 하는 소형(mini) 안식일은 생활 그 자체의 선물이 될 수가 있다.”29 (167.5)
 명상의 기초. 안식일은 심오한 명상의 시간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기초까지도 마련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와 완벽한 구속과 또 그의 궁극적인 회복의 상징인 안식일은 어떤 추상적인 고등한 영적 존재나 또는 능력에 대해서가 아니라 당선의 자녀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일하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에 대하여 명상하도록 초청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관심의 상징인 안식일은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이 외롭게 홀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토록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과의 영원한 교제를 즐기게 하려 함이었다. (168.1)
 안식일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 있다. 생활의 이유는 생명 그 자체가 아니다. 그같은 이유로는 단지 절망만을 경험할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와 미래에 있을 사귐을 즐기기 위하여 산다. 따라서 안식일에 안식일의 기쁜 소식을 명상하는 것은 현 생활의 긴장으로 부터의 도피책이 아니라 불안한 현 생활 속으로 하나님의 임재 의식(意識)과 또 더 풍요롭게 될 미래의 친교에 대한 회망을 도입시키며 미래의 친교에 대한 희망을 도입시키는 방책인 것이다. (168.2)
 명상은 자각 의식과 연관된 활동이다. 이것은 깊은 조사연구라기보다는 하나의 감성있는 의식(意識) 태도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두 사이의 차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안식일에 신앙 도서(圖書)의 독서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만약 우리가 저자가 내세우는 주장이나 혹은 그가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사용한 본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의도를 마음 속에 가지고 그 책을 읽는다고 한다면 그 때는 우리가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가장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는 분석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단순히 책 속에 있는 기별을 통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의 영혼에게 말씀을 들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유있게 그리고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면 그때는 명상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여러가지로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자유로이 느끼고 이해하며 누리기 위하여 일을 쉬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168.3)
 따라서 안식일의 자유의 정신은 이처럼 풍요케 하는 명상의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말은 우리가 안식일에 자연의 과학적인 신비를 들여다 볼려고 애쓰지 않고도 자연을 바라볼 수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가 들으려는 음악의 조(調)나 반음 올림표나 반음 내림표의 숫자에 신경을 쓰지 않고서도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시행(詩)들이 모두 운율에 맞게 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따지려 하지 않고서도 시를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의 신비를 풀려고 또는 분명한 신학적 모순들을 조화시키려고 애쓰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다. 안식일이 제공하는 평온과 자유로운 수용(受容)의 분위기가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명상을 하도록,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발견하도록, 참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도록”(시 34:8) 해 주는 것이다. (168.4)
 2. 안식일:소생(蘇生)을 위한 시간
 생명에 대한 명령. 안식일이 명상과 예배와 친교와 봉사와 휴양을 위하여 제공하는 시간과 기회들은 다 소모된 전지(電池)를 재충전시키는 발전기와 같은 기능을 하도록 고안되었다. 안식일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이 재충전과 소생의 기능을 다 하고 있다. 이제는 다른 것에 앞서 우리의 조각나 있는 생활에 안식일이 회복시켜 주고 있는 질서와 조화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169.1)
 현대 생활의 문제는 헐버트 사운더스(Herbest Saunders)씨가 아프리카의 일부, 노동자들에 대하여 전하는 한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이 노무자들은 아프리카의 내륙에 있는 외떨어진 초소까지 탐험 장비들을 등짐으로 나르기 위하여 이 노무자들을 고용한 탐험대 대장으로부터 여러 날 동안 사정없이 들볶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어느날 이 노무자들은 여행을 더 계속 할 수 없다고 버티었다. 그들은 길 옆에 짐을 풀고 눌러 앉아서 감독자의 호소에도 막무가내로 귀를 막았다. 드디어 기진맥진해진 감독이 왜 이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노무자의 대표가 대답하기를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육체를 잡아 일으켜 줄 때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30 (16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