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65편 열방을 위한 감사의 노래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312.1)
 시편 65편 (313.1)
 시편 65편은 이스라엘의 전 국가적인 찬양과 감사의 노래다. 마지막 부분인 9~13절은 토지에서 거둬 들인 풍성한 수확, 또는 기근과 극심한 가뭄을 극복시켜 주심에 대한 축복을 연상시켜 준다. 그러나 이 시편은 단순한 추수의 노래만은 아니다. 이는 또한 외적으로부터의 보호를 감사하는 노래인 것이다(1~8절). (314.1)
 이렇게 감사할 여러 가지 조건들이 시편 65편을 하나님을 창조주요 예비자, 그리고 구원자로 찬양케 하는 많은 단락으로 이루어지게 하고 있다. 천연계의 하나님과 역사의 하나님은 동일하시다. 이 노래는 각 시대를 사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고 우리 마음속에 그분께 대한 감사의 태도를 배양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쓰여졌다. 이 시편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세 가지 동기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구세주 하나님(1~ 4절), 창조주 하나님(5~8절), 예비하시는 하나님(9~13절). (314.2)
 영적 구원이 우선함
 구원받은 백성들은 시온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있는 당신의 성전에 거하시는 한 이 산은 거룩한 산이었다. 당신의 쉐키나의 영광이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예배자 하나하나를 축복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의 백성들로 부터 무언가 받기를 고대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신실한 찬양, 감사, 그리고 당신과 맺은 서약의 실천이었다. (314.3)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시 65:1)
(315.1)
 이 노래는 하나님께 자신들을 위탁하기로 서약한 자들에게 친히 말하고 있다. 침례 받은 그리스도인 역시 신실한 서약을 한 바 있다. 그리스도와 당신의 예배하는 교회에 충성의 서약을 한 것이다. 이 서약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한 형태이다. 왜 이스라엘은 감사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야 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전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왕이시요 그 모든 신하들은 그분을 창조주요 아버지로 인식하기 위하여 그 앞에 나아와야 한다. 모든 사람이 기도에 응답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기꺼운 공약을 인해 감사해야만 한다. (31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시 65:2)
(315.3)
 이 시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확약이다. 이 노래는 성경에 나오는 가장 훌륭한 명칭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2절, 히브리 원어에는 단지 두 단어뿐임). 우리의 신실한 기도와 겸손한 청원을 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다. 한 근대 작가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그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시네”(John Masefield). (316.1)
 지상의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이 그 역사에서 체험했던 것처럼 애타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이와 같은 극적인 응답을 받아 보지 못했다. 한 예가 시편 78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억류되어 있는 히브리 노예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의 부조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다(출 2 참조). 결과는 열 재앙으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개입을 갈구하는 히스기야 왕의 신실한 탄원을 들으셨다. 결과는 185, 000 명의 앗수르 군대를 동이 트기 전에 전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앞서 언급한 시 46편 참조). (316.2)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들을 옹호하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신실한 기도를 들으신다. 영감 받은 시인이 이렇게 언급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옵니다, “모든 육체”(사람)가 이처럼 놀랍고 미쁘신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것인바 이는 인간이면 누구나 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런 선한 목자장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당신 자신의 피조물을 포기하실 수도 없고 또 포기하지도 않으실 조물주의 음성을 깨달아 알 수 있다. (316.3)
 여기에서 시온 산은 모든 사람의 집결 장소로, 그리고 온 백성이 기도하는 성전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사야의 전율하는 계시에 보면, 시편 65편의 이 소망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메시아를 통하여 장차 가져올 궁극적인 현실로서 보다 분명히 확대되어 설명되어 있다(사 2, 9, 11장 참고). 그 완성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명에서 이루어졌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그 이스라엘의 구세주께서는 또한 모든 이방인 들의 구원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시 65:5, 표준역 성경(RSV)에는 ‘주’‘소망’으로 번역함)로 묘사되었다. (317.1)
 인간의 예배에 대한 욕구는 원칙적으로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기 시작할 때 충족된다. 그러나 우주 가운데 “무엇인가”가, 무엇인가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 선한 힘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하는 사실을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개인의 구주가 되실 때만 우리는 그분과 올바로 관계를 맺게 된다. 신앙적인 감사는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여타의 동기 중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조정하는 하나의 중심적인 동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317.2)
 우리의 최대의 요구는 비록 그것이 필수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육체적, 정서적 본능을 만족시켜 주는 재물이나 감정이 아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는 신앙적인 것, 즉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급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염려로 가득 차 있고 죄의 무게로 짓눌려 있는 한 우리는 이 세상의 물질을 참된 의미에서 즐길 수가 없다. 우리가 이 땅의 상급을 마음껏 즐길 수 있기 전에 우리의 죄로 병든 영혼이 하늘의 약으로 치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의 깊은 동기는 우리 마음에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인 것이다. (317.3)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시 65: 3)
(318.1)
 하나님께서는 그저 우리가 스스로 도울 때 우리를 돕지 않으신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죄에 빠져 있을 때 도우시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도움을 요청하는 모든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해석이다. 그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조차 도움을 구하는 죄수의 탄원을 확신의 말씀으로 들어주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우리가 인생의 싸움에서 패배함으로 죄악이 우리를 엄습할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이제 속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하다”는 말로 용기를 주고 있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장벽을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우리는 죄 사함이 필요하다(사 59:2). (318.2)
 우리가 해결하기에는 우리의 죄가 너무 많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처리하실 수 있다. 죄가 하나님을 이기지는 못한다. 하나님께는 죄가 무력하나니! 그분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위대한 중보자, 충분한 대속물, 그리고 전능한 보증인을 예비 하셨다.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우리를 위로해 주고 있다. (319.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 2).
(319.2)
 그 열매는 모두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선 셀 수 없는 무리에 관한 요한의 계시에 나타난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3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