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I 부 왕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 (16:21-28:20) 13. 왕국이 확립됨: 왕의 죽음과 부활 (27:45-28:20)
 교차대구적 문학 형식(성경에서는 아주 흔하다)에서 첫째와 마지막 항목은 서로 대응되며, 둘째와 마지막에서 둘째도 서로 대응된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좁혀 들어온다. 그리고 제일 가운데 항목이 초점이 된다. 그처럼 현재 구절에서 예수의 부활은 극도로 중요한 것이다. 신약의 나머지에서도 그것은 동일하다. 부활이 없다면 복음 혹은 좋은 소식은 없다. 신약 신앙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예수의 부활의 실재(實在) 위에 세워져 있다. 바울에 따르면 복음 기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전 15:3, 4)는 것이다. 다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4, 17)라고 강조한다. 마태복음의 교차대구에서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의 나머지 책들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즉 부활은 중추를 이루는 실재로서, 그밖의 다른 모든 것들이 그 위에 기초되어 있다는 것이다. (333.3)
 그러나 그 실재는 예수께서 그의 봉사 기간에 수없이 많은 경우에 그들에게 그것을 예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발생하기 전에는 제자들의 생각 속에 없었다(16:21; 17:23; 20:19; 12:40). 그들의 마음은 정복하시는 왕으로서 오실 메시야에 너무도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고난당하는 종으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전적으로 실패하였다(시 22; 사 53). 그 결과로, 예수의 죽음은 그들에게 사전 대비됨 없이 닥쳐왔고, 그들을 절망의 구덩이 속에 빠뜨린다. 예수께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 보내신 시간은 제자들의 생활 속에서는 어둠의 시간이었다(57-61). 그들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제3일에 그가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수의 약속을 듣고 깨닫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333.4)
 그러나 흥미롭게도 모든 사람이 부활에 대한 그 예언을 잊지는 않는다. 유대 지도자들은 그것이 발생하리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기억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제자들이 그 시체를 훔쳐다가 부활하셨다고 주장할까봐 두려워하였다(62-64절). 그런 경우에, 예수의 부활에 관한 제자들의 거짓말은 그가 메시야라는 그의 거짓말보다 더 나쁠 것이다(64절).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위기가 다시 닥칠 가능성에 대하여 대단히 염려한 나머지 예수의 무덤을 지킬 경비대들 요구하기 위하여 그들의 성일에 이방인(부정한 이방인)을 방문함으로써 극단적으로 엄격한 그들의 자신의 안식일 율법들을 범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한다(62절). 그들의 통상적인 관습을 깨뜨리면서까지 그렇게 한 행위는 제자들에 의하여 저질러질지도 모를 백성들에 대한 기만 행위에 대해서 그들이 얼마나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를 지적해 준다. (334.1)
 추측컨대, 그 일 전반에 관하여 철저하게 넌더리를 내고 있는 빌라도는 저 골치 아픈 지도자들과 협동하기로 선선히 동의한다. 이는 만일 그가 협조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 시체가 제3일에 사라진다면, 그 문제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그 무덤을 인봉하고 그것을 파수할 보초병들을 허락한다(65, 66절). (334.2)
 그러나 이런 예방 조치를 취함에 있어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때가 되어 예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이 그 시체를 훔친 것에 관하여 여하한 넌센스가 있을 수 없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했다. 그의 원수들의 경계는 그의 부활의 진실성을 뒷받침하고 있다”(Morris, Matthew, 732). (334.3)
 마태복음 28:1-10은 우리를 부활 사건으로 데리고 간다. 신약의 어떤 기자들도 실제적인 부활을 묘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세 방면에 걸쳐서 그 영향과 결과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다: 빈 무덤, 파수병들의 공포,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따른 자들 중 몇몇과 만나심. (334.4)
 마태가 천사를 등장시키고(5절), 나중에 예수께서 먼저 두 여성과 만나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9절)은 특별히 흥미롭다. 첫째 복음서에서 이 여성들은 부활에 대한 주요한 인간 증인들이다. 이것은 그 사건에 대한 역사적 유효성에 관한 중요한 요소로서, 이는 여성들은 유대인의 사회에서 증인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마태가 그 이야기를 꾸며내고 있었더라면(어떤 사람이 그렇게 비난하고 있듯이), 그가 그의 제1세기 청중들을 확신시키기를 원한다면 여성들의 증거를 부각시키리라고 거의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335.1)
 여성들을 부각시킨 것은 마태가 예수의 족보에서 여성들을 포함시키는 드문 조치를 취한 그의 복음서 첫 장에 대하여 계속 충실을 기하고 있다는 그런 의미에서 또한 흥미롭다. 그처럼 부활의 이야기에서 여성들은 마태의 위대한 주제들 중 하나—예수께서 구원하러 온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유대인 사회의 다른 버림받은 자들뿐 아니라 여성들을 포함한다는 주제—를 확고히 해 준다. 1:21“자기 백성”은 전통적인 유대교가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했었던 범위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335.2)
 여성들은 교회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인 봉사에서 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28:7-10에서 우리는 그들이 부활의 목격담을 제자들에게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을 발견한다. (335.3)
 예수의 일요일 부활과 천사들의 출현은 여러 사람들에게 다른 영향을 끼친다. 로마 군병들이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던(4절) 것에 비해서, 그 여성들은 처음에는 놀란 듯이 보이다가, 나중에는 “큰 기쁨”에 가득 차서 제자들에게 그 좋은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8절). (335.4)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는 신자는 어떤 사람이고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것은 사망에 대한 예수의 승리이다. 드디어, 그것은 사망 자체의 죽음을 알린다. 부활은 사단과 사망의 세력들과 권세들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의 위대한 승리이다. 부활은 하나님이 참으로 통제하고 계신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 우주적 중요성 외에도, 예수의 부활은 그의 재림 때 그를 믿고 죽은 모든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보증의 역할도 한다(고전 15:20-23, 51-55; 살전 4:16 참고). (335.5)
 예수의 부활은 사도행전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신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열쇠가 된다. 그의 수치스러운 죽음은 제자들에 의해 결코 승리로 간주되지 않았었다. 그 반대로, 그들은 그것을 공개적인 패배와 그의 주장들에 대한 부정과 배척으로 보았다.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더라면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타인의 무덤에서 끝났을 것이다. (336.1)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단지 몇몇 좋은 사상들 외에는 제공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로 인하여 제자들은 유대인과 로마의 당국자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변화된 사람들이 되었다. 그 반대로 그들은 강력하게 그 복음 기별을 도처에 전할 두려움을 모르는 전도자들이 되었다. 사도행전에서 그들의 전파의 핵심은 “그가 ... 내어준 바 되[어] ... 못박[혀] 죽[었]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다(행 2:23, 24; 3:15; 4:10 참고)는 것이다. (336.2)
 28:7-10의 여성들이 제자들에게 말하라고 명령을 받은 것은 이 위대한 진리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26:32에서 예언하신 바대로, 이 여성들이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그들이 그를 만날 것이라고 일러줄 것이라고 부언하신다(10절). 그 만남으로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끝맺는다. 그러나 먼저 그는 천사의 방문과 빈 무덤에 관한 보초병들의 보고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336.3)
 빈 무덤은 로마의 감시병들과 유대 지도자들 모두에게 문제가 된다. 병사들이 행한 첫 번째 일은 예루살렘에 파견병을 보내 방금 발생한 일을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그 기록의 역설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허위를 유포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던 바로 그 사람들(27:63, 64)이 이제는 그 부활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을 속이는 쪽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보초병들에게, 그들이 그런 일을 막도록 명령을 받았던 바로 그 일, 즉 그 시체를 도둑맞았다고 말하도록 지시한다는 것이다(28:13).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필사적이고 그 사실을 은폐할 수만 있다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고 하려고 한다. (336.4)
 군병들 또한 곤경에 빠져 있다. 그들의 기본적 문제는 그들이 지키기 위해 파송되었던 그 시체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잠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 좋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결국, 보초 임무를 서다가 잠을 자는 것은 가장 가혹한 형벌, 아마도 사형까지도 당할 수 있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상관들에게 시체를 잃어버렸다고 보고하는 다른 방안도 또한 가혹한 형벌을 가져올 것이었는데, 이는 그것이 임무 수행에 그들이 실패했다는 고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로마 장교들이 천사들, 광휘, 그리고 부활이란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믿으려고 할 것인가? (337.1)
 전체적으로 말해서, 군병들이 유대인의 당국자들의 해결책을 받아들여서, 어떤 형벌을 피하거나 적어도 지체시키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 방향으로의 이동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준 “많은 돈”의 뇌물로, 그리고 만일 그 보고가 그의 귀에 도달하면 빌라도(그는 가이사랴에 있는 그의 저택으로 가지 위해 그 도성을 곧 떠날 것이었고 아마도 그 문제에 대해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를 “권(勸)할” 것이라는 약속에 의해 가뿐히 해결되었다(14절). (337.2)
 마태는 군인들이 그 기만에 호응하고 승낙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15절)고 마태는 말한다. 실제로, 그 이야기는 사도들이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 유포되었다. 유스티노스 마르튀로스(Justin Martyr, AD c.100-165)는 2세기 중엽에 유대인들은 여전히 제자들이 그 시체를 훔쳐갔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Dialogue with Trypho, 108). (337.3)
 물론, 유대인의 지도자들 또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결국, 그들은 거짓말을 고수하든지, 아니면, 그 시체를 보여주든지, 또 아니면 예수의 부활을 믿든지 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방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시체를 내놓을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그 거짓말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337.4)
 왕의 마지막 명령과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