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한 장로는 기도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한다. 기름을 붓는 일이 요구된다. 이 기름을 붓는 일의 목적에 대하여 야고보는 우리에게 아무런 빛도 비추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신약 시대에 널리 퍼진 관습이었을지라도,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한 기록을 거의 갖지 못한다. 오직 여기 야고보서와, 막 6:13(제자들이 사람들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들을 고치며 선교 여행으로부터 돌아온 일)과 눅 10:34(선한 사마리아인이 기름과 포도주를 강도 만난 여행자의 상처에 부은 일)에서 그 같은 관습과 관련된 구절을 발견한다. 이것이 기름을 붓는 일의 목적에 대한 고찰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제안된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234.1)
 첫 번째 가능성은 관습적이요 치료적인 것이다. 기름은 고대 세계에서 치료와 완화와 정결 등의 의료 목적으로 널리 사용되곤 했다(사 1:6; 눅 10:34 참조). 유대 철학자인 필로는 올리브 기름이 “완화작용을 하며, 피로를 중화시키며, 좋은 상태를 갖게 한다. 근육이 이완되었으면 바짝 죄어 견고하게 하라. 생기와 활력을 증가시키는데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Dibelius, 252 n. 63). 헤롯 대왕은, 그가 죽으려고 누웠을 때, 그의 치료사에게 기름으로 목욕시켜 달라고 재촉했다(Josephus, Wars of the Jews, I. 33.5; Mayor, 165 인용). 기름의 치유적인 특징은 Galen(“중풍에”)과 Pliny(“치통에”)와 같은 고대인들에 의해서도 칭송받았다(Laws, 227 인용). (234.2)
 하지만 야고보가 치료적인 관점을 마음에 가졌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의도가 치료적이었다면, 왜 교회 장로를 청하였을까? 왜 친지나 의사를 부르지 않았을까? 마음에 이런 질문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두 번째 가능성을 제안한다; 즉, 상징적인 종교적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Peter Davids는 기름이 여기서는 약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기도자의 영적인 능력에 대한 다소간 외부적이고 신체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표징으로 사용되었다”(James, 123)고 진술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병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그분을 신뢰할 수 있음이 상징화된 것이요 그분의 특별하신 보호와 관심의 상징적 예증이라고 제안한다(Moo, 179; R. P. Martin, 208). (234.3)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결론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야고보의 묘사에 대하여 ‘치료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를 구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미신[혹은 종교적 믿음]에 기초한 치료와 과학에 기초한 치료를 구분하는 것은 헬라에서 의료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낯선 것이며”(227)라고 말한 Sophie Laws의 의견에 동의하며, 야고보가 말하는 사람들 중에 유대 청중들은 훨씬 적었다. 그러므로 습관적으로 치료나 고통의 경감을 위해 기름을 사용하였지만, 그 적용은 행함 중에 함께하실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믿음에 기초했다.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5:14) 행할 이유였다.

 (235.1)
 주의 이름으로 인한 치료는 1세기의 귀신을 쫓아내며 치료하는 동안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 예수의 이름, 많은 다른 이름에 대한 주술적이고 기계적인 주문과 관련지어서는 안 된다. 야고보는 단지 치료가 이루어지는 배경에 대해서만 진술하고 있다. 그것은 병자들이 총체적으로 발견할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이다. (235.2)
 이 부분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장로가 병자 “위에서” 기도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기도가 드려질 때 손을 병자 위에 얹는 것이며, 어떤 능력이 치료자를 통하여 발산된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야고보는 이런 상황을 묘사하지 않는다. 병자를 위해 기도하며 기름을 붓는 일을 요청받는 무리로서 지도자들임을 주목해야 한다. 야고보는 오늘날 널리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개인적으로 믿음으로 치료하는 관습을 여기서 묘사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개인들이 믿음으로 치료하는 일들을 통하여 역사하는 하나님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14절을 그 같은 카리스마적인 은사를 유효하게 하는 증거구절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235.3)
 구원, 용서, 고백, 치료
 야고보의 초점에서 탈선되지 말라. 초점은 기름을 붓는 일도 아니요 손을 얹은 일도 아니다. 그의 강조점은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는 15절에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새로운 차원이 언급된다: 바로 믿음이다. 야고보는 모든 기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의 기도이다. 그는 기도의 빈도와 열성으로 바라는 결과가 일어날 것이라고 암시하지 않는다. 기도를 효과있게 만드는 것은 믿음이다. 야고보는 여기서 누구의 믿음을 의도하고 있는지 명쾌하게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맥이 가리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가장 필요한 자는 기도를 드리는 장로들이다(14절). (236.1)
 The Authorized Version은 나아지다(well)라는 단어를 구원하다(save)로 번역한다. sōzō(“구원하다”)는 단어는 독점적인 종교 용어가 아니다. 그 기본적 의미는 구출하고 구원하고 회복하는 것이다. 일으키시리라(egeirō)를 단어도 마찬가지이다. 이 단어들은 마지막 구원과 죽은 자들의 부활에만 제한되지도 않는다. 야고보는 여기서 즉각적인 신체적인 회복과 완전함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중요한 의도일지 몰라도, 우리는 종교적인 측면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유대인의 마음속에는, 신체적 치료와 인격적 구원이 함께 동반되고 있다. (236.2)
 15절의 미래 시제의 확실성은(“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저를 일으키시리라”, “사하심을 얻으리라”) 그 말씀들, 특히 첫째와 둘째 문장을 얼마나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지 어느 정도 의심케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진술이 사도 시대에 국한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절대적인 보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 그 문제를 해결한다. 물론 본문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 다른 사람들은 “만일 그가 최선을 다한다면 주께서 병자를 낫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로 그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본문을 제한한다. 본교 성경 주석“기도의 응답으로 건강이 회복됨은 즉각적이든지 혹은 점진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자연법칙에 대한 인간의 유한한 지식을 초월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행위로 일어나는 것이든지, 혹은 자연적인 치료에 적용되는 간접적인 또한 더욱 점진적인 하나님의 지도하심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가 전자의 경우보다 기도의 응답을 덜 받은 것이 아니며, 진실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의 증거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바든지 혹은 그를 위해 다른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바를 하나님께서 해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적어도 원칙에 있어서는, 자연적인 수단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바를 초자연적인 섭리로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니요, 알려진 과학적 원리들의 지혜로운 적용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깨달을 것이다”(Nichol, ed., 7:541)라고 진술된 이 입장을 추구한다. 신학적으로도, 이것이 정통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이해를 야고보서의 바로 이 문맥에도 강요할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는 R. A. Martin의 제안처럼 “구원하리니”라는 구절은 “이 치료가 이루어진 것은 기도와 기도의 응답으로 유용하도록 하나님께서 선택한 능력이라는 것을 힘있게 말하는 한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48, 49)는 것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236.3)
 야고보는 “혹시 [병자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15, 16)고 진술할 때 죄와 병을 함께 묶는다. 고대 세계에서, 죄와 병은 동반적이었다. 친구들로부터 죄를 지었다고 고소받은 욥의 경우도,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의 병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에 대한 요한복음의 기사도 이를 예증한다(비교 욥 4:1-5:27). 후자의 경우에,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 9:2). 그러나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응답(“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요 9:3) 뿐만 아니라 욥의 경우도 죄와 병 사이에는 엄격한 성서적 동등함이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하지만 야고보는 어떤 병은 죄와 관련이 있음을 내포한다. (237.1)
 어떤 병이 죄와 관련이 있다면, 고백과 용서가 필수적인 것이 이치에 맞다. 유대 랍비와 예수님의 말씀에도 이것이 지적된다. 전자는 고침을 받기 전에 그의 죄를 용서함 받아야만 한다고 믿었다. Rabbi Alexandrai는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전까지 어떤 사람도 그의 병으로부터 나음을 입을 수 없다”(Barclay, 131)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그분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5:2)고 말씀하셨다. (237.2)
 고백과 용서가 필요한 죄는 어떤 것인가? 건강과 관련된 어떤 죄가 이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본교 성경 주석은 야고보가 “건강한 삶에 대해 알려진 원칙에서 이탈함”이 내포된 죄를 언급하고 있다고 제안한다. 이런 죄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이제부터는 알려진 건강 법칙에 조화되게 살리라는 병자의 결심에 근거하여 값없이 사하심을 받는다”(Nichol, ed., 7:541). 이 제안은 “그가 마음속에 주로 가지고 있는 결점은 다른 형제를 향하여 공격하며, 서로간의 교제를 망치며,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경배하기가 힘들게 된다[참고, 마 5:23, 24]”(Tasker, 135)라는 의견보다 좀 더 타당성이 있다. 이 나중 제안에는 병과 고통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없다. 야고보의 관심은 병자에게 있다. 하지만 야고보의 흥미가 주로 건강한 삶으로부터의 이탈에 있다는 것조차도 확실치 않다. 야고보의 신학에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신체의 완전함은 영혼의 완전함과 묶여있다는 것이다. 이러므로 고백과 용서는 치료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238.1)
 고백의 문제에 대하여 추가적인 말씀이 주어졌다. 야고보는 고백을 “서로에게”(5:16) 하도록 권고한다. 이것은 공적인 배경으로 제안된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교회에서 죄에 대한 공적인 고백을 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절로부터 야고보가 그의 독자들에게 일반적인 회집에서 그들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로이 그들의 죄 모두를 공적으로 고백하거나, 혹은 사사로이 개인적으로 선택되었을지라도 완전히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권고하고 있다는 것을 지지하도록 적절히 추론해서는 안 된다”(Tasker, 135). 나는 개인적으로 이 본문을 극단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은 이득보다는 손실이 더 많다고 이해한다. 우리는 죄에 대한 공적인 고백이 완전에 이르는 과정에 도움이 되며 해가 되지 않는 때가 언제인지 알도록 지혜를 구해야만 한다. (238.2)
 야고보는 기도에 대한 그의 강조점을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16절)고 지적하면서 분명히 나타낸다. 그가 “의로운 장로”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흥미롭다. 효력있는 기도는 하늘과 땅 사이의 선상에서 독점권을 가진 특별한 부류의 사람에게로 제한되지 않는다. “의롭다”는 것을 “실수가 없는”, “죄 없는”, “완전함”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기도, 치료, 고백에 대한 이 부분의 결론의 역할도 하지만 엘리야의 예증에 대한 서론으로서의 역할도 된다. 엘리야는 구약 성경에서 죄 없는 완전한 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과 능동적인 교제와 친교와 관계를 가진, 즉 구약 성경의 언어의 의미로 의로운 자로 제시된다. 의로운 관계에 대한 그런 유형이 내포된 사람들의 기도는 능력 있고 효과적이다. (239.1)
 엘리야의 모본
 역사하는 힘이 많은 기도의 모본으로 엘리야를 제시함에 있어서, 야고보는 먼저 그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17절) 사람이었다는 매우 중요한 요점을 제시한다. 이 구절에서 번역된 homoiopathēs라는 헬라어 단어는 엘리야가 모든 인류가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한 제한성을 가졌다는 것을 제안한다. Peter Davids는 “유대 전통에 있어서, 구약 성경에서처럼, 엘리야는 진정한 인간이다. 그는 경건하지만, 종종 의심과 의기소침이 괴롭히기도 한다.... [그는] 특별하신 하나님과 함께한 보통의 인간이다”(James, 125)라고 말한다.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에게 엘리야가 했던 것은 어떤 초인간적이고 특별하고 신비로운 일을 통하여 성취되지 않았음을 이해시키도록 시도한다. 그는 사람이었고, 우리와 같았으며, 하나님과 교제하였다. 우리의 기도는 그의 기도처럼 효과적일 수 있다. (239.2)
 여기에 언급된 사건은 열왕기상 17, 18장에 기록된 것임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울 수 있다. 하지만 야고보가 그의 설명을 위해 그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의 기사에는 3년이라는 가뭄의 기간에 대하여 어떤 언급도 없으며, 기도의 응답으로 비가 그쳤다는 기록도 없다. 이 첨가된 자료들은 그 이야기의 대중적인 이해로 진술된 랍비의 재료들(눅 4:25도 보라)로부터 얻어졌을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 랍비의 주석에는, 엘리야의 기도의 흔적은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서서(왕상 17:1), 나중에는 땅에 스스로 엎드리어 그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사실로부터 추정된다(18:42; R. A. Martin, 49; Moo, 188을 보라). (240.1)
 가뭄이 3년 반 동안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도 또한 유대 주석이다. 유대 예언적 묵시적 작품들에서, 3년 반(완전수 일곱의 반)은 많은 경우에 재난과 심판의 기간이었다(단 7:25; 12:7; 계 11:2; 12:14). 또한 Bo Reicke도 이 기간은 “하나님의 은혜의 최후의 표징을 기다리는 기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61)고 주석한다. 야고보의 공동체에서 그 의미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야고보는 고통을 겪고 있는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도 엘리야의 기도가 효과적이었던 것처럼 확신을 가지며 곤란한 시대에 그들의 열렬한 기도가 더욱더 가치 있도록 격려하는 데 그것을 사용한다. (240.2)
 결론